▲ 슬픔이 가득한 눈. 우수에 찬 도시 남자 이미지가 강했다면 <판도라> 속 김남길은 보다 가벼워졌고, 진솔해졌다. ⓒ new
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를 다룬 영화 <판도라>에서 김남길이 맡은 재혁은 두 갈래로 해석 가능한 캐릭터다. 대한수력원자력(실제 한국수력원자력이 모델)내 하청 직원으로 부산 지역 원전 시설을 정비하는 재혁은 영화 속 재난이 극에 달했을 때 최후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구원자였다. 판타지가 아닌 묵시록 같은 이야기 속에서 재혁은 정부와 권력자들이 저질러 놓은 온갖 부조리에 당하는 힘없는 국민이자 동시에 그런 그들을 향해 강한 펀치를 날리는 마지막 희망인 셈이다.
영화 개봉 직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남길 역시 이에 동의했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사느라 욕봤데이"라는 대사를 읊으며 그는 "재혁의 이야기만 영화에 나오지만 실제로 우리 모두에게 할 수 있는 대사이자 위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판도라>는 촬영을 마친 지 1년 6개월이 훨씬 지나 개봉하게 됐다. 제작 과정에서 상업영화 모태펀드가 돌연 투자의지를 철회하는 등 외압논란도 겪었다. 개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린 진도 5.8의 지진을 '실제로' 경험했고, 영화의 자세한 내용을 함구한 채 지내던 제작진 이하 배우들 역시 깜짝 놀랐다. '그저 영화로만 남길…' 이 간절한 바람과 동시에 "함께 각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스쳐갔을 법하다. 그리고 지난 7일 드디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혼란과 고민 속에서의 해답
인터뷰 당시는 해가 막 저물던 때였다.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김남길은 속사포처럼 영화 이야기를 전했다. 비보도 전제로 그는 영화 준비 과정에 얽힌 몇 가지 일화를 언급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전부터 암묵적으로 이뤄져 온 권력의 민낯이 스쳐지나갔다. "빨리 관객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던 이 배우의 소망과는 별개로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 이야기부터 할 필요가 있었다.
▲ 영화 <판도라>의 '재혁' 김남길. ⓒ NEW
- 촬영 종료 후 2년을 기다린 <소수의견>(용산참사 소재)이 그랬듯 <판도라>도 공개까지 꽤 기다려야 했다. 상업영화를 찍은 배우로서 이례적인 기다림이다.
"맞다. 처음엔 <살인자의 기억법> 등 차기작을 찍고 있어서 괜찮았는데 이렇게 개봉이 늦을 줄 몰랐다. 개봉 시기 고민이야 내 몫은 아니지만 조바심이 많이 났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기다리자는 마음이었는데 우리가 지진을 겪지 않았나. 5.8 강도였나. 나도 서울에서 느낄 정도였다. 경주 분들은 아직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더라. 개봉 전까지 나도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우린 안전불감증 이야기를 하려는 건데 불안감 때문에 사람들이 영화를 볼까'라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거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작품에 참여했는데 현실처럼 다가오니 무섭더라."
- 내심 영화적 소재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텐데.
"처음에 큰 고민은 없었다. 스토리 자체도 너무 좋았고, 배우 입장에서 재혁은 욕심 나는 인물이었다. <판도라>가 콘트롤타워의 부재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이건 우리나라 사고에서 늘 있던 일 중 하나이지 않나. 중요한 건 원전사고는 그 모든 대비가 완벽해도 막을까 말까 하다는 사실이다. 관심도 없던 원전 문제를 영화 찍으며 알게 된 셈이다. 사회적 메시지가 담길 수도 있는 작품인데 여러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촬영 자체는 배우 입장에선 어떤 외압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감독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찍고 나니 여러가지 힘들었던 일을 알려주시더라! 그래도 결과물 자체는 여러 생각 거리를 던지는 영화로 나와서 좋다. 촬영할 땐 이런 게 정서적으로 잘 전달될 수 있을지 의문이 있었다."
- 말한 대로 정서적 공감이 중요한 작품이다. 다른 재난영화와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를 표현하기가 가장 어려웠을 것 같다. 또 재난영화 특성상 신파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뻔하게 보이는 신파가 있지만 그걸 해소시킬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진으로 인한 원전사고라는, 그간 없었던 내용을 다룬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작품을 준비하며 살을 좀 찌웠다. 그간 내게 도시적, 차가운 이미지가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조위가 내 모델이라 생각하고 부러 슬픈 눈을 하고 그렇게 날 가꿔보기도 했다(웃음).
재혁은 '츤데레'(겉은 무뚝뚝하지만 속은 애정으로 가득한)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가벼움도 있는 인물로 해석했다. 감독님과 대화하면서 인류애가 있는 인물로 만들어갔다. 소시민의 영웅이기도 하잖나. 사실 재혁은 영웅이 되고자 한 사람도 아니다. 일종의 등 떠밀린 사람 중 하나지. 마지막 장면에서 내 대사가 좀 많다고 느꼈는데 그래도 짠하더라. 분명 신파지만 이게 한국형 재난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잘못은 즈그들이 해놓고, 수습은 국민들 보고 하란다!' 이 대사가 기억난다. 연기할 땐 그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한탄이라 느꼈는데 그보다는 더 많은 걸 함축하고 있는 대사더라.
이 재난이 다른 재난영화와 다른 건 이기적 개인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잖나. 이기적으로 행동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난 해결 과정 자체가 중요했지. <부산행>은 좀비로부터 날 격리하면 살 수 있지만 방사능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걸 고민하면서 만들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 <판도라> 속 재혁은 가족을 지키려 한 소시민일 뿐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영웅이 됐을까. 그를 쫒다 보면 애잔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영화가 다가온다. ⓒ new
그 어떤 작품에 참여하든 배우는 기본적으로 캐릭터를 준비하며 관련 지식을 공부한다. <판도라>의 김남길도 마찬가지다. 다만 원자력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배우들은 곁가지로 공부하면서 동시에 정서적 느낌을 실제와 동기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촬영 전 김남길은 실제 원전이 있는 월성 등을 찾았고, 마을 사람들과 대화하며 그 느낌을 마음에 품었다. "뭔가 죽어있는 마을 같은 느낌이 있었다"며 그는 당시 소회를 일부 전했다.
- 얘길 들어보니 대사가 너무 현실적이어 오히려 편집하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현실성이 담보된 작품같다.
"대통령(김명민 분)에 대한 장면을 편집한 게 많을 거다. 아마도 시국이 이래서 감독님이 빼지 않았을까. 영화적 메시지가 왜곡돼서 사회고발 내지는 정치를 까는 영화로 보일까봐 다들 걱정했다. 우린 안전불감증을 대비하고 콘트롤타워의 부재를 지적하려 했기에 굳이 과하게 대통령 장면을 넣을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 희망에 대한 영화라고 홍보하던데 민간인들이 결국 크게 당하지 않나.
"그렇다. 다만 희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마음 아프고 안쓰럽긴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 하고 싶다. 재혁이가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이래야 하노'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 정서가 잘 전달되지 않으면 그저 시끄러운 재난영화일 뿐이겠지. 마지막 장면은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다. 정말 진지하게 내가 죽는다는 상상도 했고, 죽음에 대한 영상도 찾아봤다. 촬영 이틀 전부터 굶었다. 몸이 안 좋으면 오히려 붓는데 그 느낌을 가져가고 싶었다."
- 정부와 대한수력원자력 관계자들을 불신하면서도 영화 속 국민은 동시에 그로 인한 이익을 보기도 했고, 실제로 재혁 어머니(김영애 분)는 확신에 차서 원전이 안전하다는 말을 믿지 않나. 양가적인 우리나라 국민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사람들은 다 이중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상황에 따라 사람들은 달라지곤 하잖나. 배려와 이해, 존중이 좋다는 걸 알지만 이게 특정 상황에서 잘 발휘될 수 있을까. 결국 선택의 문제다. 나도 연기하면서 인간 본질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도 해보고.
다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랬으면 좋겠다. 자꾸 밖에서 문제를 찾지 말고. 내 안의 문제 아닌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보이려면 종교에서 오래 수련하지 않고는 힘들 거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서로 의지하며 배우고 나누며 사는 거지."
▲ "나누며 살자"는 말처럼 김남길은 실제로 그 삶을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비영리단체인 길스토리를 통해 그는 각박한 도시인들의 마음을 문화 프로젝트로 녹이는 중이다. ⓒ new
- <판도라> 개봉 이후 관계 당국에서도 많이 고민할 것 같다. 실제로 원전 관리 인원을 늘린다고 최근 한수원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다고 관리가 될까. 우리가 의도했든 아니든 우리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상현실 같은 영화지만 <판도라>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면 좋겠다. 지금 한국에 원전이 25개라던데 정부는 더 짓는다고 한다. 우리 땅 넓이에선 한 두 개만 있어도 되는데 말이다. 배우들끼리도 원전에 대해 논쟁하고 그랬다. 원전으로 우리가 전기를 싸게 쓰는 건 사실인데 폐기물은 어떻게 처리하나. 기술도 없고, 대책이 없잖나. 독일은 지금 원자로 자체를 줄이며 대체 에너지 개발을 늘리고 있다.
영화 대사에 나오듯 원전은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따라 괴물이 될 수 있다. 안전요원 충원은 임시방편이라 본다. 원전 시설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꾸준히 브리핑도 해야 한다. 그래야 불안증이 없어지지 않을까. 한 기관, 한 집단에 원전을 맡기기엔 불안하다. 전 국민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에 대한 문제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