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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를 향한 느린 뜀박질, 영화 <원더스트럭>

[담론으로 보는 영화] 메시지는 소리로만 전달되지 않는다

18.05.12 19:21최종업데이트18.05.12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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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더스트럭>의 작품 포스터ⓒ CGV 아트하우스




1. 이미지냐 이야기냐, 그것이 문제로다

영화에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지만 눈으로 보는 즐거움도 있다. 영화에는 몽타주라는 시간의 흐름과, 미장센이라는 공간의 배치가 있다. 감독은 그 두 가지 시공간을 하나로 엮어 관객에게 보여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충분히 어울려질 수 있음에도 어느 한쪽에 대한 의구심을 품는 경우가 있다. '영화'라는 건 결국 시나리오(문학)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야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 이 경우, 각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 이미지는 미학(美學)이고 이야기는 메시지(Message)다.

가끔 우리는 두 입장 중 한쪽으로 치우친 어떤 영화를 발견하고는 한다. 관객에게 무언가 깨우침을 주어야 한다는 나머지 본연의 역할을 망각한 작품, 영화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나머지 재미가 사라진 작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영화인이 이 문제를 두고 대립하고 있다. 영화의 탄생 이래로 시작된 이 고민은 요즘에 와서 와해되거나 무화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주장의 본의만큼은 여전히 강력함을 유지한다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2. 이미지, 메시지를 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신작 <원더스트럭>(2018)은 이미지가 메시지를 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유성 영화로의 전환기 당시, 영화에 소리가 도입되는 걸 극구 반대했던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청각을 배제한 시각만이 영화의 미학을 온전히 표현해낼 수 있다는 발언은, 이 영화에서 청각 장애를 지닌 두 아동을 통해 수차례 언급되고 반박된다.

1977년 불의의 사고로 청력을 잃게 된 소년 '벤'과, 1927년 선천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소녀 '로즈'의 이야기. 이 영화는 1977년과 1927년 두 가지 타임라인을 교차로 보여주는데, 77년은 컬러로 27년은 흑백으로 촬영했다. 단순히 흑백이라는 덧칠에 불과한 게 아니다. 소리 없이 몸짓으로만 떠들고 웃기고 환호해야 했던 무성영화 시대의 유산이 바로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무성영화에서는 온 세상을 날카로운 손끝에 모두 담아내겠다는 배우의 의지가 중요하다. 소리라는 한줄기의 파동에 몸을 맡기며 부유하듯, 정말로 동작 하나하나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만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무성 영화가 그만큼 고도로 응축되어 있었음을 상기하게 된다. 공연이 끝난 후의 아티스트에게는 백 번의 칭찬보다 한 번의 박수갈채가 훨씬 기쁘게 다가온다. 그건 박수갈채 소리가 화려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박수라는 행위는 명백하게 존경과 경이에 대한 헌사를 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마 토드 헤인즈는 사랑 또한 그러하다고 믿는 듯 보인다. 우리는 감독의 전작 <캐롤>(2015)에서 두 여인의 시선을 함께 느껴본 바가 있다. 그 영화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꼭꼭 숨겨둔 채, 오직 눈동자만을 서로의 가슴 속에 내리꽂는다. 카메라는 두 여인이 내비치는 가느다란 시선, 혹은 감정을 아주 섬세하게 다루어 낸다. 그리고 <원더스트럭>도 마찬가지다.

사실 <원더스트럭>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시선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캐롤>이 사랑의 시선을 담아냈었다면, <원더스트럭>은 그저 두 꼬마의 여정에 불과하다. 두 꼬마는 할머니와 손자라는 가족 관계이지만 그게 두 사람을 엮는 공통됨은 아니었다. 공통점은 '청각장애'였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후천성과 선천성이라는 경우의 문제뿐이다.

후천적 장애와 선천적인 장애라는 것은 '소리를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후천적 장애의 경우, 지금까지 알던 세계를 포기하면서 오는 충격이 무척 크다. 더는 석양을 볼 수 없고, 더는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원래 가졌던 것을 내려놓는 게 훨씬 어려운 법이다.

이 영화를 소수자의 시선으로 풀어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시선보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졌던 것을 내려놓는다'라는 것은 '없었던 것을 가진다'라는 무성영화의 경우와 정반대이므로 그러하다.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3. 미지의 세계를 향한 느린 뜀박질

이 영화의 원작 소설 '원더스트럭'은 페이지 하나에 글, 페이지 하나에 그림이 줄곧 이어지는 짧은 단편이다. 아이들이 보던 그림동화가 어른을 위한 것으로 탈바꿈했다고 보면 된다. 말하자면 위에서 말했듯이 이미지와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이어지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와 소설에서 '이미지'를 제하고는 이야기를 제대로 알기 힘들다. 결국 이미지가 이야기를 지배하는 형국이 된다.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전환은 '소리 없는 세계'가 소리를 체득해 가는 과정이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대사'다. 수 번의 몸짓보다 한 줄의 대사가 효율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원더스트럭>은 아주 고집스럽게 수 번의 몸짓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미지가 이야기를 지배하려고' 한다.

앞서 두 아이의 장애의 경우가 다르다고 말했었다. 후천성과 선천성이다. 소년은 '전화'를 하던 중 벼락을 맞아 청력을 잃었고, 소녀는 '무성 배우'를 보며 동경을 찾아 떠나게 된다. 즉, 소년은 소리를 잃었고 소녀는 소리를 얻고 싶어 한다.

정리를 해보자. 소년은 이야기에서 이미지를 찾아 떠난다. 소녀는 이미지에서 이야기를 찾아 떠난다. 그런데 마치, 둘 다 '이미지'에 무언가를 투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년에게는 엄마가 말해주지 않던 아빠에 대한 진실, 소녀에게는 가족이 허락하지 않던 사회로의 진입이다. 키워드로 표현하자면 각각 '진실'과 '자유'다. 그래서 소년은 무성의 세계로 진입해야 하고, 소녀는 무성의 세계에서 이탈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진실은 무성의 세계 안에 있고 자유는 무성의 세계 밖에 있다. 즉, 진실은 침묵 속 어딘가에 있으며 자유는 침묵을 깨야만 쟁취할 수 있다.

두 장애 아동 사이의 50년 세월 동안 달라진 사회 인식보다 중요한 건, '세계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 영화에서 무성 영화에 대한 강한 헌사는 동경이라기보단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직접 암시하는 도구다. 말과 행동, 혹은 이야기와 이미지의 형태. 그리고 진실과 자유.

두 아이는 자신이 보고 싶은 사람을 향해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러나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에게 세상은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날카로운 경적과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행인의 경고조차 한줄기의 파동이 된다. 아이는 평생 겪지 못했던 잃어버린 세계를 향해 천천히 뜀박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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