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6월 7일, 8일, 9일. 그 사흘 동안 벌어졌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을 자처할 수 있다. 잔뜩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렸다가 한 순간에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듯한, 새로운 종류의 당혹감과 절망감.

인천 야구팀이 오랜만에 우승컵을 들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리고 장명부와 임호균이라는 빛바랜 흑백사진 속 두 투수의 얼굴과 겹쳐 떠올려야 할 그 사흘간 말이다.

1983년부터 '제대로' 시작한 인천 야구

장명부 투수의 투구 장명부 투수가 투구하고 있는 모습

▲ 장명부 투수의 투구 장명부 투수가 투구하고 있는 모습 ⓒ 한국야구위원회


인천 팬들에게 진정한 프로야구의 출발점은 1983년이었다. 지난해 승률 1할대에 머물렀던 치욕적인 꼴찌전설에도 불구하고, 1983년 봄 자유공원 한쪽에 벌여놓은 어린이회원 모집창구에는 길게 장사진이 쳐졌다.

그리고 거리에는 큼지막한 별을 이마에 붙여놓은 삼미 슈퍼스타즈 모자와 재킷 차림의 아이들이 붐볐다. 지난 해,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자책점 0'으로 평균자책점왕에 오른 임호균과 김봉연을 대신해 1루를 지킨 김진우 없이 치러졌던 프로야구는 '원천무효'였고, 이제야 진정한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각지 않았던 원군들이 이어졌다. OB 베어스에서 양보한, 역시 세계선수권대회 우승멤버인 정구선과 이선웅이 있었고, 인하대 출신의 강속구 투수 김상기(뒷날 태평양 돌핀스의 간판타자가 되는 김동기의 친형)도 낯익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억대'의 몸값으로 모셔왔다는 일본 프로야구의 15승 투수 장명부와 역시 일본 프로야구 3할 타자 이영구가 있었다.

원년에 단 한 명도 없었던 국가대표 출신들이 무려 네 명으로 늘어난데다가, 박철순과 백인천 이상의 위력을 기대하게 했던 '해외파' 본류들이 합세한 선수명단은 몇 번이고 반복해 읽기만 해도 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물론, 장명부가 15승을 구가하던 전성기를 지나 1982년 단 3승으로 추락한 '퇴물'이었다는 점과, 이영구의 기록으로 팬 북에 명시되어있던 .333의 일본 프로무대의 타율이 무려 10년간 경험한 3번의 기회에서 때린 단 한 개의 안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지만 말이다.)

비록 세계선수권대회 당시 대표팀 내에서 가장 허약했던 타자들이었지만, 김진우와 정구선은 곧장 홈런과 타점 부문 순위표에 이름을 올리며 신문 읽는 재미를 선물했고, '날으는 돈가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선웅도 시즌을 마무리할 즈음엔 2할2푼대로 주저앉게 되지만 시즌 초에는 붙박이 3번으로 나서며 3할대를 오르내리는 타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영구 역시 일본에서 기록했다던 3할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2할 8푼대를 꾸준히 유지해 '김재박의 라이벌'로까지 불리며 '공수겸비형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프로 개막 전, 최소한 인천에서만큼은 최동원과 이선희 못지않은 투수로 통했던 임호균이 드디어 나타났다. 이상군, 김용수와 더불어 역대 최고의 제구력 투수로 거론되는 그가 스리 볼로 몰린 상황에서 침착하게 낚아 올리는 삼진은 박철순의 '삼구삼진'과는 또 다른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해 234.2이닝을 던지며 열다섯 번이나 완투했고 12승 15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모든 '축복'에 가까운 기록들을 사소한 것으로 밀어내버린 것이 바로 장명부였다. 그 한 해 동안 열린 팀의 백 경기 중 무려 60경기에 나서 책임졌던 427.1이닝. 무려 36번의 완투와 26완투승을 비롯한 서른 번의 승리. 그 숫자들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던 시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역사 속에 새겨버린 그 불멸의 숫자들.

427이닝 던지고 완투 36번, 30승의 '괴물 투수' 장명부

공을 던지는 팔의 높이에 따라 정통파, 스리쿼터, 사이드암, 언더핸드로 불린다는 어린이용 야구교범으로는 도저히 그의 투구 폼을 설명할 수 없었다. 사이드암인지 스리쿼터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각도에다가 때로는 불쑥 귀를 스치는 듯한 높이에서 팔을 뻗었고, 또 때로는 언더핸드 가까운 폼에서 공을 뿌렸다.

그래서 그의 공은 속도든 변화구의 각이든 '그때그때' 달랐고, 안타를 한 개 맞아도 분하기는커녕 제법이라는 듯 싱글거리며 후속타자들을 솎아내는 능글맞은 표정은 약팀의 대명사 삼미에게 발목을 잡혀 그렇지 않아도 짜증스런 상대 선수들에게 두 배의 불쾌감을, 지긋지긋한 패배에 신물이 나있던 팬들에게는 오랜만의 가학적 쾌감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또 슬금슬금 기가 오른 상대 팀이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가기라도 할 때면 기꺼이 상대 중심타자의 머리를 향해 날리는 빈볼 역시, 드러내고 응원하기는 민망했지만 얼마나 짜릿했던가.

장명부 장명부 투수의 투구동작

▲ 장명부 장명부 투수의 투구동작 ⓒ 한국야구위원회


투수로테이션이라는 개념이 없던 그 시절,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는 장명부가 던지는 경기와 임호균이 던지는 경기로 나뉘었고, 그냥 정성만이나 김상기를 투입해 일단 쉬어 가다가 혹시라도 리드를 잡으면 장명부가 나오는 경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400이닝 투수 장명부와 200이닝 투수 임호균을 제외하면 백 이닝 이상 던진 투수가 한 명도 없었고, 30승 투수 장명부와 10승 투수 임호균 다음 서열을 이을 수 없을 정도였다.

쥐들의 세상에 내려온 고양이 같았던 장명부의 덕분에 슈퍼스타즈는 연전연승했고, 몇몇 골수팬 아저씨들이 뿜어내던 담배연기만 자욱하던 도원구장은 날마다 '연안부두'가 합창되는 축제장이 되어갔다. 지난해 16전 16패의 OB 베어스에게 단 1승을 올린 것만으로도 감격하던 팬들이 슬슬 '우승'을 떠올리기 시작한 것은 6월 초였다.

라이벌은 해태 타이거즈였다. 지난 해 홈런, 타점, 도루왕을 배출하고도 여섯 팀 중 4위에 그쳤던 타이거즈는 장명부와 이영구에 댈 것은 아니었지만 주동식과 김무종이 투타에 안정감을 심었고, 지난 해 부진했던 이상윤과 김용남이 살아났고 김종모가 장효조와 비견될 만큼 정확한 타자로 떠올랐다. 김응룡 감독의 지도력이 통하면서 강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박철순의 허리 부상과 함께 누워버린 OB, 만루 홈런 두 방을 맞은 이선희와 함께 격추당한 삼성을 대신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강함을 확인시켜줄 '카운터파트'에 불과했다. 해태와 만나면 항상 접전이었지만, 결국 삼미의 승리로 끝을 내며 그렇게 대단한 김종모의 방망이와 이상윤의 강속구로도 어찌 해볼 수 없는 장명부의 막강함이 더 두드러졌던 것이다.

악의 군단(?) 타이거즈, 피곤한 영웅 장명부

인천팬들의 마음속에서 붉은 색과 검은 색 유니폼이 자극적이었던 해태 타이거즈는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는 '악의 군단'이었고, 장명부는 연투에 지친 피곤한 몸으로도 마지막 한 번의 기합으로 힘을 끌어내 그들을 퇴치하며 끝내 승기를 휘날리는 영웅이었다.

그리고 6월 7일. 그날부터 삼미 슈퍼스타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전기리그 마지막 3연전이 열렸다. 그때까지의 성적은 삼미가 24승 14패, 해태는 20승 1무 15패. 30승으로 예상되는 전기리그 우승을 위해 2.5경기차로 앞서고 있던 삼미는 남은 경기에서 6승 6패면 족했고, 해태는 10승 4패를 해야 했다.

원정이었지만, 맞대결에서 최소한 1승만 건져도 밑질 것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 2선발 김용남이 어깨부상으로 이탈하며 선발진이 무너진 해태로서는 오히려 이상윤을 앞세울 수 있는 경기에서 1승이라도 건질 수 있을지가 걱정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6월 7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광주 원정경기는 순간 모든 것을 잿빛으로 물들여버리고 말았다. 장명부와 이상윤의 대결로 시작된 그 1차전은 7회까지 1-1로 맞선 팽팽한 투수전이었다. 그러나 7회말 선두타자 김종모에게 던진 장명부의 밋밋한 직구가 120m짜리 홈런으로 되돌아 날기 시작한 그 순간, 장명부의 어깨 위에 쌓여있던 피로감과 선수들 가슴 속에 남아있던 설익은 자신감들, 그리고 위태롭게 이어지던 행운까지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홈런을 맞으며 '쉬어 가는 타이밍'을 빼앗긴 장명부는 김일권과 김준환, 김성한에게 연속안타를 맞으며 순식간에 석 점을 빼앗겼고, 같은 재일교포 김무종의 몸을 표적삼아 마지막 공을 던지고는 스스로 마운드에서 내려와 더그아웃에 글러브를 내던졌다. 10-1로 마무리.

2차전에 나선 것은 '2인자' 임호균이었고, 상대 선발은 '부업투수' 김성한이었다. 비록 김성한이 지난 해 10승을 기록했던 적이 있다지만, 누가 봐도 기울어지는 승부였다. 그러나 3회까지 무안타로 완벽하게 막던 임호균이 4회 들어 무사 만루를 허용하더니 김종모와 김무종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순식간에 다섯 점을 헌납해버리고 만다. 그 경기 역시 김성한의 완봉승으로 마무리된다.

반드시 잡아야만 1위를 지킬 수 있었던 삼미는 또다시 장명부를 3차전에 내보냈지만, 이미 식어버린 그의 어깨는 물이 오른 김종모의 방망이를 이겨내지 못했고, '삼미의 장명부가 아닌 장명부의 삼미'라고 불렸던 팀의 타선 역시 덩달아 풀이 죽으면서 주동식의 공을 겨누지 못했다. 또다시 3-0의 완패.

승리의 공식이자 상징이며, 행운의 여신이기도 했던 장명부가 흔들리자 모든 것은 끝이었다. 광주의 팬들이 '광주대첩'이라고 이름 지은 그 3연전에서 삼미는 2.5경기차의 선두에서 반경기차 2위로 내려앉았고, 이후에도 삼성과 MBC에 연전연패하며 첫 번째 우승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날개 꺾인 영웅, 그리고 인천 야구의 몰락

장명부와 김무종 83년 해태 우승의 주역 김무종(왼쪽)과 30승의 주인공 장명부(오른쪽)

▲ 장명부와 김무종 83년 해태 우승의 주역 김무종(왼쪽)과 30승의 주인공 장명부(오른쪽) ⓒ 한국야구위원회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타자를 잡아낼 수 있었던 막강한 에이스 장명부의 날개 아래, 어쨌든 마지막 순간에는 승리를 거머쥘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믿었던 인천의 소년 팬들. 그들로 하여금 항상 극적으로 이기는 주인공이 아니라, 마치 이길 줄 알고 기고만장하다가 분해서 땅을 치며 '두고 보자'를 외치는 악당의 마음을 이해하게 했던 그 3연전.

그 날을 분기점으로 호남야구는 80년대 최강의 전설로 날아올랐고, 인천야구는 또다시 길고 어두운 '도루묵'의 길을 기어 다녀야 했다.

그 이듬해도, 또 그 이듬해도, 그는 여전히 강한 투수였지만 어딘가 김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3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지만, 반대로 20패와 25패라는, 전설적인 시즌 최다 패전의 기록을 쌓아올리는 데 더 정성을 쏟는 듯했다.

1983년 시즌 개막 전, '30승을 올리면 1억을 주겠다'고 했던 삼미 사장이 농담이었다며 발을 빼자 장명부가 태업을 벌이는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TV 카메라 앞에 선 장명부도 눈물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 때 내가 왜 30승을 했는지…, 차라리 그 때 30승을 하지 말았으면…'이라는 뜻 모를 어눌한 한국말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능력치를 가진 투수. 그러나 이미 의욕을 상실한데다가, 도박에 빠져 억대의 연봉마저 깨끗이 날려버린 빈껍데기. 슈퍼스타즈를 인수해 새로운 인천 팀으로 나선 청보 핀토스의 새 감독으로 선임된 허구연은 고민 끝에 그를 정리하는 것으로서 팀 재건의 첫 발을 내디뎠고, 그것은 장명부와 인천 팀 모두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 뒤로 인천야구는 1989년, 돌핀스의 돌풍이 몰려오기 전까지 길고 긴 침체와 수모를 견뎌내야 했고, 장명부는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에서 선수와 코치생황을 이어가며 끝없는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결국 지난 2005년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클럽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마치 돌풍처럼, 벼락같이 나타나 온통 세상을 뒤집어놓을 듯 진동하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래서 입이 떡 벌어지는 흔적을 새겨놓고도 기억 속에 큰 존재감을 남기지 못한 대투수. 그렇지만 인천 팬들의 가슴 속에 가장 짜릿한 승리의 희열과 가장 저릿한 절망의 회한을 한꺼번에 남겨놓은 이방인.

그는 가끔 중요한 사람에게 사인을 해줄 때 '無二一球'(무이일구, 두 번의 기회가 없다는 듯 단 한 개의 공에 전력을 다한다는 뜻. 일본의 야구지도자들이 즐겨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한다)라는 글귀를 써주었다고 한다.

물론, 그는 그 글귀의 뜻과는 사뭇 다른, 능글맞은 공을 던지는 투수였고, 때로는 쉬어 가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러 홈런을 내주거나 상대 타자의 몸을 맞히며 심통을 부리는 못된 투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야구라는 인생의 공 하나를 놓치고는 그대로 녹아내리듯 사라져버린  길이, 문득 그 글귀와 맞물리며 서글퍼지기도 하는 이름, '장명부'다. 

덧붙이는 글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음식을 매개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우장춘, 씨앗의 힘 씨앗의 희망>(봄나무)을 펴냈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연재중인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야구의 추억 장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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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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