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세대 웹툰작가로 꼽히는 강풀작가는 <순정만화>와 <아파트> <바보> <타이밍> 같은 스토리와 서사가 있는 장편 웹툰들을 히트시키며 장편웹툰의 유행을 선도했다. 강풀작가는 2018년 <브릿지> 이후 5년 넘게 신작 연재가 없어 독자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2023년 OTT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무빙>의 각본을 쓰면서 여전히 '이야기꾼'으로서 감각이 살아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강풀에게도 2000년대 중·후반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웹툰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들이 하나같이 흥행에 실패한 것이다. 실제로 2006년 전국 64만 관객에 그쳤던 <아파트>를 시작으로 2008년 97만 관객의 <바보>와 73만 관객의 <순정만화>가 차례로 흥행에서 쓴맛을 봤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당시 독자들 사이에서는 "강풀의 이야기는 스크린이 아닌 모니터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정도.

그렇게 강풀 작가는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면서도 영화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묘한 포지션을 이어갔다. 하지만 강풀 작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영화화하려는 제작사는 줄지 않았고 강풀 원작의 영화는 2010년대 초반 세 편 연속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강풀 작가의 마음고생을 덜어줬다. 그리고 강풀원작 영화의 성공을 알렸던 첫 번째 작품이 바로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강풀 순정만화의 세 번째 야이기 <그대를 사랑합니다>였다.
 
 총 제작비 21억 원이었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손익분기점을 훌쩍 뛰어넘는 기대 이상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총 제작비 21억 원이었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손익분기점을 훌쩍 뛰어넘는 기대 이상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후배들 존경 받는 연예계의 큰 어른

서울대 철학과 출신의 이순재 배우는 1956년 연극을 통해 연기를 시작해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다만 연예계의 큰 어른으로 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지금의 위상과 달리 1980년대까지는 신성일, 남궁원, 노주현, 박근형, 이덕화 등 잘생긴 동료 및 후배 배우들에 밀려 톱스타로 불리진 못했다. 이순재 배우는 당시 사극에서 광해군과 김좌근, 변학도 같은 악역으로 출연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던 1991년 이순재 배우는 국민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를 통해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고 1992년엔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복귀 후 <목욕탕집 남자들> <보고 또 보고> 등에 출연한 이순재 배우는 1999년 역대 사극 최고시청률에 빛나는 <허준>에서 허준(전광열 분)의 스승 유의태 역을 받아 열연을 펼쳤다. 등장분량은 길지 않았지만 <야인시대>의 원노인을 기억하는 시청자들도 적지 않다.

1980년대 중반 이후 20년 가까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던 이순재 배우는 2005년 차태현, 송혜교 주연의 <파랑주의보>에 출연하며 영화활동을 재개했다. 2009년에는 픽사 애니메이션 <업>에서 칼 프레드릭슨의 목소리 연기를 했는데 역대 비성우 더빙연기 중 최고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장진 감독의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는 민주투사 출신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대한민국 대통령 김정호 역을 맡았다.

2006년과 2009년 <거침없이 하이킥>과 <지붕 뚫고 하이킥>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더욱 친근해진 이순재 배우는 2011년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한 추창민 감독의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출연했다. 이순재 배우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독거 노인 송이뿐(고 윤소정 분) 할머니와 귀엽고 애틋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을 나누는 김만석 할아버지 역을 맡아 관객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순재 배우는 2012년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드라마 버전에서도 다시 김만석 할아버지를 연기했고 2018년에는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출연했을 정도로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애정을 보였다. 올해 11월이 되면 아흔이 되는 나이에도 2023년 드라마 <패밀리>와 연극 <갈매기> <리어왕>에 출연했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순재 배우는 수많은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대배우다.

평균 연기경력 47년 배우들의 업력  
 
 김만석 할아버지(왼쪽)는 송이뿐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해 주면서 넌지시 사랑을 고백한다.

김만석 할아버지(왼쪽)는 송이뿐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해 주면서 넌지시 사랑을 고백한다. ⓒ (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강풀원작의 영화들이 차례로 흥행에 실패한 데다가 추창민 감독 역시 2006년 <사랑을 놓치다>의 흥행실패 이후 5년 동안 신작을 내놓지 못했다. 게다가 영화에서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던 70대 노인들의 사랑이야기. 아무리 노련한 배우 4명이 모였다 해도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흥행에 큰 기대를 할 수 없었던 이유다. 실제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순제작비 10억 원, 총제작비 21억 원에 불과(?)한 작은 규모로 만든 영화였다.

하지만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기 힘들 거 같았던 노인들의 원숙한 사랑이야기는 2011년 2월에 개봉해 서서히 입소문을 타면서 잔잔하게 흥행몰이를 했고 최종적으로 164만 관객을 동원하는 작은 이변을 일으켰다. 특히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부모자식 간의 사이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자식이 부모님을 모시고 극장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만큼 부모님 세대와 자식 세대에게 모두 깊은 울림을 주는 지점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만화를 원작으로 만드는 영화들은 원작과의 비교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을 요소가 더욱 많아진다. 하지만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최동훈 감독의 <타짜>와 함께 영화화가 잘된 대표적인 만화원작 영화로 꼽힌다. 무엇보다 주인공 4명의 연기경력이 40년을 훌쩍 넘는 '연기 장인'들을 섭외하면서 그 어떤 장면에서도 연기력 논란이 생길 여지조차 없었다.

흔히 장례식장에서 평균수명보다 오래 살고 큰 고통 없이 편하게 삶을 마감한 고인을 보며 '호상'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는 장군봉(고 송재호 분)의 장례식장에 온 김만석(이순재 분)이 "사람이 죽었는데 잘 죽은 게 어디 있냐"며 군봉의 죽음을 '호상'이라고 표현하는 젊은이들에게 호통을 친다. 만석에게 군봉은 평범한 이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려 주던 하나 밖에 없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2007년 웹툰연재 당시부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영화 외에도 많은 매체를 통해 재생산됐다. 2008년에는 영화보다 먼저 연극으로 제작되면서 높은 객석점유율 속에 2020년까지 많은 사랑을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 2012년에는 SBS PLUS 채널에서 16부작 드라마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방영됐고 2014년에는 KBS 3라디오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했다.

착하고 예의 바른 캐릭터도 어울리는 송지효
 
 송지효는 <쌍화점> 이후 3년 만에 착하고 순수한 주민센터 직원 역을 선택했다.

송지효는 <쌍화점> 이후 3년 만에 착하고 순수한 주민센터 직원 역을 선택했다. ⓒ (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이순재 배우와 고 송재호 배우, 김수미 배우가 2000년대까지 각종 매체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에 비해 고 윤소정 배우는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1997년 <올가미> 이후 약 14년 만에 출연한 영화 주연작이었다. 윤소정 배우는 김만석 할아버지와 설레는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송이뿐 할머니 역을 잘 소화하며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윤소정 배우는 지난 2017년 패혈증으로 별세했다.

<전원일기>의 '일용엄니'로 유명했던 김수미 배우는 2000년대 여러 영화와 예능, 홈쇼핑(?) 등을 통해 '게장 잘 담그는 욕쟁이 할머니'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하지만 김수미 배우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장군봉의 아내 조순이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통해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특히 만석의 스쿠터를 타고 남편 군봉과의 드라이브를 꿈꾸는 장면은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다.

2008년 영화 <쌍화점>으로 파격적인 연기변신을 시도했던 송지효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만석의 손녀이자 주민센터 직원 김연아를 연기했다. 어른을 공경하고 친절함이 몸에 밴 착한 캐릭터로 송이뿐 할머니가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기초생활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적극 도왔다. 송이뿐 할머니가 차려준 고봉밥을 맛있게 먹고 약국에 가 소화제를 구입하는 장면은 의외의 웃음포인트.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4명의 주인공은 물론이고 조연과 단역들까지 대부분 착한 인물로 나온다. 차에 난 작은 흠집으로 군봉에게 시비를 거는 역할로 특별 출연한 이문식이 유일하게 나쁜 인물처럼 보이지만 이문식 역시 개그 캐릭터임이 밝혀진다. 영화 말미 송이뿐 할머니가 떠난 집에 새로 이사 와 골목의 가로등을 켜는 착한 꼬마 역할은 훗날 <신과 함께> 시리즈로 '쌍천만 배우'가 되는 아역시절의 김향기였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그대를사랑합니다 추창민감독 이순재 김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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