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대 중반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쿡방 프로그램과 <식신원정대>,<식신로드>,<맛있는 녀석들> 같은 먹방 프로그램이 방송가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처음 쿡방과 먹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때만 해도 한 때의 유행으로 지나갈 거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맛있는 녀석들>은 어느덧 햇수로 10년째를 맞는 장수프로그램이 됐고 <현지에서 먹힐까?>,<장사천재 백사장> 같은 쿡방 프로그램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유튜브로 범위를 넓히면 쿡방과 먹방의 기세는 더욱 대단해진다. 쯔양과 히밥처럼 먹방 유튜버의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된 유튜버들도 많고 성시경의 <먹을텐데>와 현주엽-김태균의 <운동부 둘이 왔어요>, 천하장사 출신 윤정수 코치의 <맛만 볼까> 등 먹방 콘텐츠 유튜브도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백종원의 요리비책>과 승우아빠, 산적TV밥굽남 등 등 요리를 주제로 하는 유튜브 역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영화에서도 이안 감독의 초기작 <음식남녀>를 비롯해 한국영화 <북경반점>과 <식객>,<리틀 포레스트> 등 요리와 관련된 작품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요리영화는 스케일이 작고 아기자기하게 풀어가는 작품이 많기 때문에 할리우드보다 주로 동양에서 발전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할리우드에도 유쾌함과 감동을 함께 잡은 요리영화가 있었다. 존 패브로 감독이 감독과 주연, 각본, 제작까지 1인4역을 맡았던 영화 <아메리칸 셰프>다.
 
 1100만 달러의 적은 제작비로 만든 <아메리칸 셰프>는 제작비의 4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1100만 달러의 적은 제작비로 만든 <아메리칸 셰프>는 제작비의 4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주)영화사 진진

 
감독과 배우 다 되는 만능 재주꾼

1992년 배우로 먼저 데뷔한 패브로 감독은 1990년대 중반부터 각본가 활동을 겸하며 더그 라이먼 감독의 초기작 <스윙어즈> 각본을 썼다. 2000년까지 배우와 각본가로 활동하던 패브로는 2001년 <메이드>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고 2003년에는 윌 페렐과 주이 디샤넬 주연의 <엘프>를 연출했다. <엘프>는 3300만 달러의 제작비로 2억2800만 달러의 성적을 올리며 패브로 감독의 첫 번째 흥행작이 됐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패브로 감독은 2005년 아역 시절의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출연했던 <쥬만지>의 스핀오프 영화 <자투라: 스페이스 어드벤처>를 차기작을 선보였지만 딱 제작비 만큼의 수익 밖에 거두지 못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패브로 감독은 <자투라>의 아쉬움을 2008년 한 슈퍼히어로 영화를 연출하면서 한 번에 날려 버렸다. 바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신화의 시작을 알린 영화 <아이언맨>이었다.

패브로 감독은 주인공 토니 스타크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긴밀한 논의를 거쳐 기존 각본을 대폭 수정해 영화를 완성했다. 그리고 <아이언맨>은 1억 4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5억 85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면서 MCU의 순조로운 출발을 세상에 알렸다. 패브로 감독은 2010년에 개봉한 <아이언맨2>에서도 연출을 맡았을 뿐 아니라 전편에 비해 비중이 커진 토니 스타크의 경호원 해피 호건 역할도 잘 소화했다.

하지만 <아이언맨2>부터 시작된 마블 스튜디오의 지나친 간섭에 염증을 느낀 패브로 감독은 <아이언맨3> 연출을 포기하고 2014년 연출과 각본, 주연, 제작을 모두 맡은 작은 규모의 영화 <아메리칸 셰프>를 만들었다. <아이언맨>의 10%도 채 되지 않는 11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아메리칸 셰프>는 4800만 달러의 쏠쏠한 흥행성적을 올렸다. <아이언맨> 같은 블록버스터 뿐 아니라 작은 영화도 잘 만드는 감독임을 증명한 셈이다.

2016년 디즈니 실사영화 <정글북>을 통해 9억6600만 달러라는 흥행성적을 이끈 패브로 감독은 2019년 또 다시 디즈니 실사 영화 <라이온 킹>을 연출했다. 2억6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라이온 킹>은 무려 16억6300만 달러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올렸다. 패브로 감독은 <라이온 킹>을 만드는 와중에도 해피 호건 역으로 꾸준히 MCU 영화에 출연했고 2018년에는 <한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토비아스 범죄팀의 리오 듀란트를 연기했다.

아들에게 전한 셰프 아빠의 요리철학
 
 <아메리칸 셰프>는 요리만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

<아메리칸 셰프>는 요리만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 ⓒ (주)영화사 진진

 
<아이언맨 1,2>를 흥행시킨 패브로 감독은 2011년 '인디아나 존스' 해리슨 포드와 '007'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카우보이&에일리언>을 만들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그리고 마블의 지나친 간섭에 지쳐버린 패브로 감독은 <아이언맨3> 연출을 고사했고 대신 2014년 작은 규모의 요리영화 <아메리칸 셰프>를 만들었다. <아메리칸 셰프>의 제작비는 1100만 달러로 <아이언맨2>(2억 달러)의 5.5% 수준에 불과했다.

<아메리칸 셰프>는 LA의 유명 레스토랑 골루아즈의 헤드 셰프 칼 캐스퍼(존 패브로 분)가 인터넷 요리평론가의 악평이 불씨가 돼 삭당에서 쫓겨나고 이혼한 아내의 전남편에게 얻은 푸드트럭으로 재기를 노린다는 내용의 영화다. 크게 어려운 내용 없이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지만 요리 밖에 모르던 주인공 칼의 인간적인 성장과 아들 퍼시(엠제이 앤서니)와의 관계 개선 등 교훈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다.

<아메리칸 셰프>에서 칼이 푸드트럭에서 만든 첫 번째 음식은 푸드트럭 설치를 도운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한 샌드위치였다. 이 과정에서 퍼시는 샌드위치를 태운 후 "어차피 돈도 안받잖아"라며 손님에게 샌드위치를 그냥 내주려 한다. 이를 본 칼은 퍼시를 따로 불러 "나는 요리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거기서 힘을 얻어. 너도 해보면 빠지게 될 거야. 이래도 탄 샌드위치를 손님에게 드려야 할까?"라며 자신의 요리 철학을 아들에게 가르친다.

<아메리칸 셰프>에서는 SNS를 이용한 바이럴 마케팅(소문이나 여론을 통해 상품의 정보가 전파되도록 하는 마케팅 전략)이 적극 활용된다. SNS를 매우 능숙하게 활용하는 퍼시는 SNS를 통해 꾸준히 아빠의 푸드트럭을 홍보하고 칼의 샌드위치를 맛본 사람들은 다시 SNS로 칼의 푸드트럭을 세상에 알린다. 결국 칼은 그의 요리를 혹평하며 칼을 나락으로 빠트렸던 요리비평 블로거 램지(올리버 플랫 분)에게도 사과를 받아낸다.

패브로 감독은 <아메리칸 셰프>를 제작하기 위해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푸드트럭 요리사 로이 최를 섭외해 일정기간 동안 로이 최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패브로 감독이 로이 최에게 치즈토스트 요리법을 배우는 과정은 영화의 쿠키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패브로 감독과 로이 최 셰프는 2019년 6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아메리칸 셰프>의 스핀오프 다큐멘터리 <더 셰프 쇼>를 만들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1100만 달러로 이런 캐스팅이 가능?
 
 '블랙 위도우' 스칼렛 요한슨은 <아메리칸 셰프>에서 주인공 칼이 해고 당하는 레스토랑의 홀 매니저로 출연했다.

'블랙 위도우' 스칼렛 요한슨은 <아메리칸 셰프>에서 주인공 칼이 해고 당하는 레스토랑의 홀 매니저로 출연했다. ⓒ (주)영화사 진진

 
<아메리칸 셰프>의 제작비나 제작과정을 잘 모르는 관객들은 포스터 속 출연진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능가하는 호화캐스팅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패브로 감독과의 인연으로 <아메리칸 셰프>에서 조·단역으로 출연을 자처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던 대배우 더스틴 호프먼은 칼과 요리 메뉴로 갈등을 빚다가 칼을 해고하는 골루아즈의 사장 리바를 연기했다.

<아이언맨2>로 패브로 감독과 인연을 맺었던 스칼렛 요한슨은 <아메리칸 셰프>에서 골루아즈의 홀메니저 몰리 역을 맡았다. 공식적으로 싱글인 칼은 고민상담을 이유로 은근슬쩍 몰리에게 들이대려 하지만 몰리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한다.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칼에게 낡은 푸드트럭을 지원해주는 마빈 역으로 깜짝 출연했다.

퍼시의 엄마이자 칼과 이혼 후 친구처럼 지내는 이네즈 역은 콜롬비아 출신의 모델 겸 배우 소피아 베르가라가 맡았다. 이네즈는 자신과 마빈의 사이를 질투하는 칼에게 "그러는 당신은 몰리와 무슨 사인데?"라며 역공을 펼치며 여전히 칼에 대한 애정이 남은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다이하드2>와 <로미오+줄리엣>,<존 윅>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존 레귀자모는 칼을 따라 대형 레스토랑에서 푸드트럭으로 이직하는 마틴을 연기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아메리칸셰프 존패브로감독 스칼렛요한슨 로브트다우니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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