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회 부천노동영화제 폐막식 ⓒ 부천노동영화제
"기사 쓰신 기자님이라고 들었어요."
따라 나온 이가 말했다. "쓰신 글 정말 잘 읽었어요"하는 그의 말에 "네, 뭐" 하고 말았다. 비가 막 쏟아지려는 참이었다.
그는 "이 영화는 보셨나요?"하고 묻는다. 영화제 마지막날, 폐막식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정태춘, 아치의 노래>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보았다. 정직하게, 또 건강하게 나이들어 가는 이 백발의 가수를, 바하 캘리포니아부터 정동진까지를 노래하는 이 단단한 영혼을, 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제9회 부천노동영화제(11월 2일~11월 12일)는 <정태춘, 아치의 노래>를 폐막작으로 선정했다. <순자와 이슬이>부터 <태일이>,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그녀들의 점심시간>,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같은 상영작 면면은 주최측이 한편한편을 고심해 선정했음을 알게끔 했다. 그 모든 영화 가운데 켄 로치도, 다르덴 형제도 아닌 가수 정태춘의 다큐멘터리가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이 영화를 좋게 보았음에도 나는 주최측의 의도를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 아치의 노래, 정태춘 포스터 ⓒ 부천노동영화제
정태춘의 음악인생과 노동의 관계성
노동과 이 다큐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아차' 하고 말았다. 글쟁이에게 글을 쓰고 파는 게 노동이듯이, 저를 아치라고 부르는 가수에게는 노래가 노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태춘만큼 제 노동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가수도 없지 않은가.
영화는 익히 알려진 대로 가수 정태춘의 음악인생을 다룬다. 어릴 적 가난했던 마을의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군대에선 '시인의 마을' 같은 명곡들을 썼다. 서울로 상경해 서라벌레코드와 계약한 뒤 내놓은 1집은 한국 음악사상 손꼽는 명반이 됐다.
정태춘의 노동이 특별함을 지니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더 뒤의 일이다. 앨범이 연달아 실패한 뒤 그는 전국을 돌며 소규모 공연을 이어간다. 대중매체를 떠나 현장에서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며 시대정신을 껴안았다. 운명인듯 소명처럼 그는 거리로 나아갔다. 중요한 집회 현장에서 제 노래를 불렀다. 사회문제를 가사로 담아내고 특유의 정서와 함께 우려낸 곡을 연달아 발표하니 독재정권이 불편할 밖에 없는 일이다.
▲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내 노동의 품격을 지켜낸다는 것
마침내 그의 곡에 공연윤리위원회가 검열의 칼날을 들이대자, 그는 굽히지 않고 싸움을 시작했다. <19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비합법 LP로 발매한 건 이 싸움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6년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한국 음악사에서 음반에 대한 검열성 사전심의가 철폐되기까지 정태춘이 쌓은 공이 지대하다.
영화는 정태춘의 음악인생, 또 그 노동의 품격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로부터 그는 또 다시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에 눈을 돌리고 곡을 써나간다. 그에게 노인들이 리어카를 몰고 폐지를 줍는 오늘의 한국은 노인을 거지로 대우하는 비인간적인 세상이다. 그는 제 무기로 이 시대의 비인간적 노동을 고발하고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정태춘의 노동은 그렇게 또 한 줌의 품격을 더해간다.
폐막식 무대에 선 부천노동영화제 관계자는 처음 영화제가 섰을 당시엔 지자체로부터 50만 원만 지원받았다고 말했다. 그 작은 영화제가 어느덧 9회째의 막을 내렸다. 부천 시민들의 터전 곳곳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부대 행사가 열렸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과 출연한 배우, 공익적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시민과 만났다. 경기도는 부천노동영화제를 비롯해 시민들 가까이서 제 색깔을 펼쳐보이고 있는 작은 영화제 몇을 지원하고 있다. 그렇게 이 작은 영화제들이 제 노동 밖을 좀처럼 바라볼 여유 없는 이들과 만났다.
올해들어 강릉과 평창을 비롯한 여러 영화제가 지자체의 지원중단으로 폐지되거나 폐지가 논의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기도의 작은 영화제들의 성공적 개최는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