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는 흔히 "전편만한 속편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1편의 흥행에 힘입어 만든 속편은 아무래도 스토리와 완성도, 재미 면에서 1편을 따라가기 힘들다는 뜻이다. 따라서 2000년대 이후로는 <반지의 제왕>이나 <엑스맨> <본>트릴로지,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처럼 처음부터 3부작으로 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한국영화 중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 있지만 사실 '복수 3부작'은 서로 세계관이 연결되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3부작으로 기획해 영화를 만든다 해도 마지막 편에 힘을 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2편은 상대적으로 뒷전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영화가 마블의 <어벤저스> 4부작이었다. 어벤저스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1편과 '끝판왕' 타노스와의 전면전이 나오는 3, 4편이 관객들의 엄청난 호응을 얻은 것에 비해 2편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영화의 무게감이나 재미, 관객들의 평가에서 다소 아쉬운 결과를 낸 바 있다.

사실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비해 한 편으로 이야기의 서사가 완성되는 멜로영화는 속편이 나오기 어려운 대표적인 장르다. 하지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1995년부터 2013년까지 무려 18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는 멜로 영화 3부작을 완성했다. 그리고 짧았던 하룻밤의 사랑을 나눴다가 9년 만에 다시 만나는 남녀의 사랑을 그린 <비포 선셋>은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3부작 중에서도 진한 여운을 남긴 작품으로 꼽힌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마니아층이 있는 <비포 선셋>은 지난 2016년에 재개봉하기도 했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마니아층이 있는 <비포 선셋>은 지난 2016년에 재개봉하기도 했다. ⓒ THE픽쳐스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2회 수상에 빛나는 거장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태어난 링클레이터 감독은 1991년 직접 연출과 각본, 제작, 주연까지 1인 4역을 맡은 <슬래커>를 통해 데뷔했고 2년 후 <멍하고 혼돈스러운>을 연출했다. <멍하고 혼돈스러운>은 훗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매튜 맥커너히의 데뷔작이자 데뷔 초기의 밀라 요보비치와 벤 애플렉 등이 출연했다. 그리고 링클레이터 감독은 다시 2년이 지난 1995년 아름답고 가슴 시린 로맨스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선보였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프랑스의 여대생과 미국인 청년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기차에서 만나 나누는 하루 동안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비포 선라이즈>를 통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 감독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연출가로는 물론이고 배우로서의 재능도 겸비한 링클레이터 감독은 <심층> <스파이 키드> <첼시 호텔> 등 여러 영화에서 조·단역으로 출연하며 배우 활동도 병행했다.

2003년 배우 잭 블랙을 일약 스타로 도약시킨 <스쿨 오브 락>을 연출한 링클레이터 감독은 2004년 1995년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 셀린느와 제시를 9년 만에 소환해 <비포> 시리즈의 속편 <비포 선셋>을 선보였다. <비포 선셋>은 작가가 돼 파리에서 홍보활동을 한 제시와 제시를 찾아온 셀린느의 재회와 해가 지기 전까지 파리를 돌아다니며 나누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제작비의 5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올렸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비포 선셋> 이후 <배드 뉴스 베어즈> <스캐너 다클리> <나와 오손 웰스> <버니> 등을 연출한 링클레이터 감독은 <비포 선셋> 이후 다시 9년이 지난 2013년 <비포>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 <비포 미드나잇>을 연출했다. 링클레이터 감독이 18년에 걸쳐 만들어낸 셀린느와 제시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많은 관객들로부터 '가장 완벽한 로맨스 3부작'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비포> 3부작을 끝낸 링클레이터 감독은 2014년 또 하나의 인생작 <보이후드>를 연출해 베를린 영화제와 골든글러브 감독상을 휩쓸며 전성기를 달렸다. 2010년대 중·후반 <에브리바디 원츠 썸!!> <리스트 플래그 플라잉> <어디갔어,버나댓> 등 코미디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링클레이터 감독은 <스쿨 오브 락>에 출연했던 잭 블랙과 재회해 만든 애니메이션 <아폴로 10 1/2: 스페이스 에이지 어드벤처>가 지난 4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18년에 걸쳐 완성된 완벽한 멜로 3부작
 
 <비포 선셋>은 런닝 타임 대부분의 시간이 두 주인공의 대화로 채워진 영화다.

<비포 선셋>은 런닝 타임 대부분의 시간이 두 주인공의 대화로 채워진 영화다. ⓒ THE픽쳐스

 
사실 영화에서는 1편을 흥행시킨 주인공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속편에서 하차하면서 배우가 교체되거나 속편 제작이 무산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비포 선라이즈>의 두 주인공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는 <비포 선라이즈>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자신들이 연기했던 셀린느와 제시를 잊지 않았고 결국 <비포> 시리즈는 전편 개봉 9년 만에 배우교체 없이 속편이 제작될 수 있었다.

<비보 선셋>의 전작 <비포 선라이즈>는 두 주인공 셀린느(줄리 델피 분)와 제시(에단 호크 분)가 꿈 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6개월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헤어지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6개월 후 두 사람의 약속은 어긋나 버리고 그렇게 서로를 잊고 살아가던 셀린느와 제시는 9년의 세월이 흐른 후 유명작가가 된 제시가 기자들과의 낭독회를 마친 파리의 어느 서점에서 그를 찾아온 셀린느와 재회하며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비포 선셋>은 79분이라는 길지 않은 런닝 타임 중에서 70분 이상의 시간을 셀린느와 제시의 '대화'로 채우는 영화다. 이야기의 빠른 전개와 기승전결을 좋아하는 관객들은 <비포 선셋>의 이야기 전개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편 <비포 선라이즈>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시시콜콜한 근황토크로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가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감정이 점점 격해지는 과정을 충분히 공감하며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비포 선라이즈> 역시 단 5주 만에 촬영을 마친 영화였지만 <비포 선셋>은 촬영기간이 단 3주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배우의 감정몰입이 가장 중요한 영화의 특성상 링클레이터 감독은 촬영기간 내내 한 번도 배우들을 다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링클레이터와 함께 각본작업에 참여하며 셀린느와 제시에게 완벽하게 몰입한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 역시 링클레이터 감독의 바람대로 뛰어난 연기호흡을 선보였다.

영화 속에서 제시는 셀린느에게 자신이 이미 결혼을 해 4살 짜리 아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재 자신은 아내와의 부부생활이 원만하지 않으며 아내와 함께 있을 때는 셀린느를 만날 때처럼 설레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이는 제시를 연기한 배우 에단 호크의 실제 생활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실제 에단 호크는 아내인 배우 우마 서먼과 불화를 겪다가 영화가 개봉한 지 1년이 지난 2005년에 정식으로 이혼했다.

링클레이터 감독과 5편이나 함께 한 에단 호크
 
 <비포 선셋>에서 노래 실력을 뽐낸 줄리 델피는 지난 2003년 솔로앨범을 발매한 적도 있는 팔방미인이다.

<비포 선셋>에서 노래 실력을 뽐낸 줄리 델피는 지난 2003년 솔로앨범을 발매한 적도 있는 팔방미인이다. ⓒ THE 픽처스

 
지난 1989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토드 앤더슨을 연기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에단 호크는 지금까지 80여 편의 많은 영화와 TV시리즈에 출연한 배우다. 호크는 젊은 시절부터 터프함과 아련함을 겸비한 멋진 눈빛을 가진 미남배우로 사랑 받았음에도 아직 엄청난 흥행작에 출연한 적은 없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배우는 물론 각본가로도 활동하고 있고 지난 2018년에는 뮤지컬 드라마 <블레이즈>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에단 호크는 <비포> 3부작의 링클레이터 감독과는 남다른 인연을 자랑하기도 한다. 호크는 <비포> 3부작에서 남자주인공 제시를 연기했을 뿐 아니라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함께 각본을 쓰기도 했다. <보이후드>에서 메이슨(엘라 콜트레인 분)의 아버지를 연기했던 에단 호크는 자신이 연출한 <블레이즈>에서는 반대로 링클레이터 감독을 배우로 캐스팅해 석유기업가 역으로 출연시켰다.

프랑스 출신의 감독 겸 배우 줄리 델피는 1994년 <세 가지 색 : 화이트>에 출연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부터 18년에 걸쳐 출연한 <비포> 3부작을 통해 명성을 얻었는데 9년 주기로 만든 <비포> 3부작에서는 줄리 델피의 20대부터 40대까지의 모습을 차례로 볼 수 있다. <비포 선셋>과 <미포 미드나잇>의 각본작업에도 참여한 줄리 델피는 남녀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셀린느의 대사 속에 담아내기도 했다.

<비포 선셋>에서는 지난 2003년 자신의 이름을 음반명으로 한 데뷔 앨범을 발표했던 '1집 가수' 줄리 델피의 노래실력도 감상할 수 있다. 줄리 델피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노래 중 3곡은 <비포 선셋>에도 삽입됐다. 특히 'A Waltz for a Night'는 영화 속에서 남자주인공인 제시의 이름을 넣고 개사해 부르며 제시와 관객들을 더욱 설레게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비포 선셋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에단 호크 줄리 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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