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정지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 <해피엔드>가 개봉했다. <해피엔드>는 북한 비밀 특수대 공작원(<쉬리>)에서 실직 가장으로 변신한 최민식의 연기도 돋보였지만 무엇보다도 귀엽고 청순한 이미지의 배우 전도연이 선보인 파격적인 변신이 엄청난 화제가 됐다. 물론 당시만 해도 <접속>과 <약속>,<내 마음의 풍금>으로 전성기를 달리던 전도연이 지나치게 성급하게 노출연기를 시도했다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 <해피엔드>는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지로 굳어지던 전도연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 됐다. <해피엔드> 이후 더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할 수 있게 된 전도연은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전도연이 <해피엔드>로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인 지 11년이 지난 2010년 또 한 명의 여성배우가 영화 속에서 파격적인 노출연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이 배우는 2019년 칸 영화제에서, 2020년에는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세계적인 배우들과 나란히 레드카펫을 밟았고 2019년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해피엔드>의 전도연처럼 <방자전>을 통해 연기 스펙트럼을 크게 넓혔던 배우 조여정이 그 주인공이다.
 
 조여정의 파격적인 연기변신이 돋보였던 <방자전>은 전국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조여정의 파격적인 연기변신이 돋보였던 <방자전>은 전국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 CJ엔터테인먼트

 
최연소 뽀미언니에서 대표 여성배우로

고등학교 시절이던 1997년 패션잡지 모델로 데뷔한 조여정은 1998년 <뽀뽀뽀>의 제 15대 뽀미 언니로 선정됐다.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최연소 뽀미언니 기록이다. 1998년 송혜교, 최제우(개명 전 최창민) 등과 함께 시트콤 <나 어때>에 출연하면서 연기활동을 시작한 조여정은 2002년 시청률 50%를 넘긴 <야인시대>에 출연했다. 하지만 당시 조여정의 역할은 여주인공 중 한 명인 설향(허영란)의 친구A에 불과했다.

드라마 위주로 활동을 이어가던 조여정은 2006년 영화 <흡혈형사 나도열>에서 김수로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 주연으로 데뷔했고 같은 해 여름에는 MBC 일일드라마 <얼마나 좋길래>에 출연했다. 하지만 조여정이 출연한 <얼마나 좋길래>는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던 동시간대의 KBS 일일드라마 <열아홉 순정>에 밀려 기대만큼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결국 조여정은 2010년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에서 파격적인 변신을 단행했다.

조여정은 춘향이 선비인 이몽룡이 아닌 노비 방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발칙한 설정의 영화 <방자전>에서 섹시한 춘향을 연기하며 파격적인 노출연기를 단행했다. 단순한 에로영화가 아닌 섹시 코믹멜로로 <춘향전>을 재해석한 <방자전>은 전국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조여정 역시 <방자전>을 통해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조여정 역시 <방자전> 이후 '노출 여성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이는 차기작이었던 <후궁: 제왕의 첩>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조여정은 2014년 <표적>과 <인간중독>, 2015년 <워킹걸>에 출연하면서 착실히 필모그라피를 쌓아 나갔다. 특히 신인배우 임지연에게 주연 자리를 양보하며 조연을 자처한 <인간중독>을 통해 한국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연기상을 수상했다.

2016년 <베이비시터>, 2017년<완벽한 아내>에 출연한 조여정은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범상치 않은 두 아이를 키우는 부잣집 사모님 연교를 연기하며 열연을 펼쳤다. <기생충>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하며 '한국영화의 자랑'이 됐고 조여정 역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기생충>의 주역임을 증명했다. 조여정은 지난 달 송승헌, 박지현과 함께 김대우 감독의 신작 <히든 페이스>의 촬영을 마쳤다.

춘향전 캐릭터 개성 있게 비튼 영화
 
 <방자전>은 조여정의 노출연기가 부각됐지만 충행과 이몽룡의 슬프고 애틋한 사랑이야기에 더 주목해야 하는 작품이다.

<방자전>은 조여정의 노출연기가 부각됐지만 충행과 이몽룡의 슬프고 애틋한 사랑이야기에 더 주목해야 하는 작품이다. ⓒ CJ엔터테인먼트

 
작가가 밝혀지지 않은 조선시대의 연애소설 <춘향전>은 일제시대인 1923년부터 2000년까지 무려 17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진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방자와 향단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도 지난 1972년 이형표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바 있다(당시 고 박노식 배우가 방자를, 고 여운계 배우가 향단이를 연기했다). 하지만 방자(고 김주혁 분)와 춘향(조여정 분)이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영화는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이 유일하다.

<방자전>은 관객들이 학창시절에 배운 <춘향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비틀어 새로운 재미를 선사했다. 장원급제하는 멋진 선비 이몽룡(류승범 분)은 양아치에 가까운 인물로 나오고 오히려 노비인 방자(고 김주혁 분)가 상남자로 그려진다. 마냥 얌전한 춘향도 <방자전>에서는 적극적이고 섹시한 인물로 표현됐고 춘향이의 몸종 향단이(류현경 분)는 춘향에게 라이벌의식을 품고 있는 인물로 나온다. 

김대우 감독은 <방자전>의 캐스팅 단계부터 주연배우들의 수위 높은 노출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 때문에 주인공 춘향 역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조여정이 기존 이미지와 다른 당당하고 진취적인 춘향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 출연을 결정했다. 이후 김대우 감독은 차기작 <인간중독>과 개봉예정인 <히든 페이스>에서 연속으로 조여정을 캐스팅했다.

많은 관객들이 배우들의 과감한 노출이나 코믹한 장면에만 집중했지만 사실 <방자전>은 방자와 춘향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룬 슬픈 멜로물이기도 하다. 특히 방자에 의해 춘향가가 탄생하는 장면은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김주혁의 진정성 있는 연기와 만나 상당히 구슬프게 느껴진다. 영화의 주목도가 조여정에게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김주혁의 연기와 존재감이 없었다면 <방자전>의 재미는 크게 반감됐을 것이다.

90년대부터 각본가로 활동하며 <결혼이야기2>,<정사>,<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각본작업에 참여한 김대우 감독은 <음란서생>으로 250만 관객을 모은 데 이어 <방자전>으로 30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3번째 영화 <인간중독>이 140만 관객으로 아쉬움을 남겼고 강풀 작가 웹툰 원작의 <마녀>는 제작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는 콜롬비아 영화를 리메이크한 <히든 페이스>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어디에도 없던 역대급 변태 사또
 
 송새벽은 어눌한 말투의 변태사또 연기를 통해 단숨에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

송새벽은 어눌한 말투의 변태사또 연기를 통해 단숨에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 ⓒ CJ엔터테인먼트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가 송강호라는 대배우를 발굴했다면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은 송새벽이라는 개성 있는 배우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다가 2009년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세팍타크로 형사 역으로 상업영화계에 뛰어든 송새벽은 <방자전>에서 변태 변학도를 연기하면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현재까지도 느리고 어눌한 사투리 연기는 송새벽의 트레이드마크로 남아있다.

방자와 춘향이, 이몽룡이 그런 것처럼 류현경이 연기한 향단이 역시 기존의 <춘향전>에서 보인 향단이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주인집 아씨로 모시는 춘향이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는 향단이는 춘향의 집에서 쫓겨난 후 주막을 차려 부자가 되고 춘향의 '공식적인 정인' 이몽룡을 유혹한다. 류현경은 <방자전>을 통해 대한민국 대학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영화를 보다 보면 오늘날 스타가 된 배우들의 파릇파릇하던 신인 시절을 볼 수 있는데 <방자전>에도 그런 배우가 한 명 등장한다. 바로 춘향에게 옷을 입혀주는 한복쟁이로 짧게 출연했던 이제훈이었다. <방자전>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훈훈한 얼굴만 보여주다 퇴장하는 이제훈은 2010년에만 무려 7편의 영화(독립·단편영화 포함)에 출연하며 엄청난 다작배우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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