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니라 좋은 삶을 살아가는 일상이다.' 박노해 시인의 어록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평온한 일상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던 덕분이다. 1996년 강릉에서 벌어진 49일간의 작은 전쟁과 18명의 희생자들은, 우리에게 전쟁의 공포와 평화의 소중함을 동시에 일깨우며 많은 교훈을 남겼다.
 
7월 2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조명했다. 1996년 강원도에서 군복무 중이던 당시 21세 표종욱 일병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군에서는 표 일병이 '탈영'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족들에게 하루에도 수차례씩 전화를 걸어 자수시키라고 압박한다. 충격을 받은 가족들은 표 일병이 탈영할 이유가 없다고 해명하고, 실종된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며칠씩이나 찾아다녔다. 하지만 군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았고, 표 일병의 행적도 오리무중이었다. 과연 표 일병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야기는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9월 18일 0시, 강릉에서 택시를 몰던 기사 이아무개씨는 심야의 고속도로에서 군복을 입은 일련의 수상한 무리들을 발견한다. 수상한 기색을 느낀 이씨는 잠시후 현장으로 돌아가 주변을 돌아보다가 해변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 위에서 놀랍게도 표류하고 있던 잠수함을 발견한다. 놀란 이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일선 군부대에도 소식이 전달하며 진돗개 하나(적의 침투-도발이 확실할 때 발령하는 군 최고 경계 및 전투태세)가 발령된다.
 
군은 해군 특수부대(UDT/SEAL)를 파견하여 잠수함 수색에 나선다. 당시 수색에 참여했던 유병호 상사는 특수부대원들도 꺼려하던 위험천만한 임무를 먼저 자원했다. 유 상사는 "분위기가 싸했다. 폭파 장치가 있거나 부상 잔류자가 있다면 마지막 저항을 하다가 자폭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색은 해야 했다. 그렇다고 후배들에게 들어가라는 건 말이 안됐다. '누군가 들어가야 한다면 내가 가야하지 않겠나' 생각했다"고 밝혔다.
 
피말리는 긴장감 속에 다행히 수색은 무사히 종료됐다. 잠수함 내부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대량의 총기와 수류탄이 발견됐다. 선내에 서류들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모두 소각된 상태였다. 유일하게 발견된 한 장의 쪽지에는 '최고사령관 동지(김정일), 전투원 동지, 임무수행을 떠나는 전투원들이 서면으로나마 전투적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영웅들은 절대로 죽지 않고 살아서 승리의 보고를 안고 임무가 실행되어 적화통일의 그날을...'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로써 적들의 실체가 북한의 '무장공비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군은 수색 끝에 인근 해안도로에서 무장공비들의 이동 흔적을 발견했고, 두 자릿수 인원이 넘는 공비들이 내륙으로 침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소식이 뉴스를 타고 알려지면서 강릉을 비롯하여 전국이 공포에 휩싸였다. 공비들이 침투한 강원도 지역에서는 군부대가 총동원되었고 예비군까지 비상소집되며 전면 통행금지가 실시됐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당시 김남성 중사가 이끌던 수색조는 산을 수색하다가 총성을 듣는다. 수색조는 총성이 난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놀랍게도 무려 11명에 이르는 남성 시신들을 발견한다. 시신들은 모두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일상복 차림이었지만 모두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고, 시신에서는 권총과 실탄, 유서 등이 발견되며 이들이 변복한 무장공비임이 밝혀졌다. 
 
북한에서는 이른바 '자폭교육'이라는게 존재한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목숨을 끊어서 장군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 심지어 온가족이 보는 TV프로그램이나, 군에 갓 입대한 10대 여군들도 자폭정신을 강조할 정도다. 그래서 북한군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살을 위한 총알 한 발은 꼭 남겨놓는다고 한다.
 
그런데 11명의 시신에서는 저항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작 사망자들의 총기에서는 탄약흔이 검출되지 않았다. 바로 다른 공비들이 동료들을 사살하고 도주한 것이다. 죽은 이들을 자살로 위장하고 도망갈 시간을 벌려는 계획이었다. 아직 정확한 공비의 숫자를 파악하지 못했던 군은, 공비들이 남아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추적을 재개했다.
 
경찰은 잠수함이 발견된 지역에서 약 2km 떨어진 모전리의 산골농가에서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신고를 접수한다. 농장주인과 이야기 중이던 젊은 남자는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었고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북에서 내려온 공비임을 자백했다. 먹을 것을 구하려 산에서 내려왔다가 무리와 떨어진 상태였고, 동료 11명의 사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공비의 정체는 바로 이광수, 잠수함 조타수로 전투원이 아닌 승조원이었다. 당국은 더 이상 진술을 거부하고 침묵하는 이광수를 회유하기 위하여 공을 들였다. 이광수는 먹고 싶은 음식을 질문받자 뜬금없이 광어를 언급했다. 이광수는 훗날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광어가 고급어종이다. 남조선이 못 사는 나라같은데 광어가 있겠나 싶어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이광수는 자신이 농장주인 부부의 전화 신고로 체포된 상황에 대해서도 "집집마다 전화기가 있는 줄 몰랐다. 그걸 알았으면 피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교육에 세뇌 당한 공비들이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초고속 배달서비스로 맛본 광어회를 시작으로 한국의 진실을 깨닫게 된 이광수는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광수가 밝힌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정찰 임무를 띄고 하루 전날 침투했던 잠수함이 암초에 걸리면서 좌초하여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 잠수함에 탑승한 공비는 총 26명이었다. 11명이 사망하고 이광수가 생포되며 남은 공비는 아직도 14명이었다.
 
추격에 나선 군은 곳곳에서 공비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9월 19일 군은 공비들을 포위하고 투항을 권유했지만 투항하는 공비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하루 만에 7명의 공비가 사살되었지만 아군도 1명 전사, 2명이 부상당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무장공비 침투 4일째인 9월 21일, 권오택(당시 23세)-강정영 상병(21세)은 원래 추석을 앞두고 휴가를 갈 예정이었지만 공비가 침투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작전에 투입됐다. 훈련은 받았지만 실전 경험은 없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기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산에서 매복하던 중 갑작스럽게 무장공비를 만나 강정영 상병이 총상을 입었고, 권오택 상병이 수류탄으로 반격하여 무장공비를 제거했다. 해당 공비는 잠수함의 함장으로 밝혀졌다. 공비가 사복으로 변장한 상태였고 공비들의 나이가 젊다는 정보만 알고 있었기에, 주민으로 생각하고 순간적으로 방심하여 접근했던 것이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졌다.
 
권오택 상병은 곧바로 강정영 상병을 업고 내려와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강 상병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강 상병은 생전에 꾸준히 일기를 남겼는데 "이 글이 나의 생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부모형제가 그립고 친구가 그립다', '주여 나를 지켜주소서, 적과 지금 대면한다. 모두 상기된 얼굴, 생환을 빈다'는 내용들은 당시 현장에서 강 상병이 느꼈을 두려움과 긴박감을 절절이 드러내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강 상병의 부모님은 자식을 못지켰다는 죄책감과 회한을 드러내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군의 계속된 추격작전으로 대부분의 공비를 제거했지만 아직도 살아남은 공비들은 저항을 계속했다. 군은 귀순한 이광수의 육성 녹음을 헬기를 통하여 공중에서 방송하고 전단지를 뿌리며 투항을 권유하는 심리전을 펼쳤다. 하지만 공비들은 끝내 투항을 거부하고 잇달아 사살됐다.
 
어느덧 10월로 접어들며 약 열흘째 새로운 공비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긴장감이 느슨해지고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나 싶은 찰나, 강릉시에서 약 70km 떨어진 평창군 탑동리에서 총성소리가 들렸다는 신고가 접수된다. 군은 산을 수색한 끝에 공비에서 살해 당한 할머니의 시신을 발견한다. 

다시 시간이 흘러 어느덧 11월 4일로 접어들며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서 무려 28일 만에 무장공비에 대한 제보가 접수됐다. 어느새 북한과의 경계선인 휴전선 인근까지 무장공비가 북상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확인된 것. 그리고 11월 5일, 무장공비 침투 49일째에 연화동 계곡 인근 초소에서 마침내 나타난 공비들이 초병들과 교전을 벌이고 도주한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현장에 투입된 703 특공연대는 수색 도중 공비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박경상 대대장이 얼굴에 부상을 입고 당시 동행했던 오영안 기무부대장과 서형원 대위, 강민성 병장이 교전 중에 전사한다. 공비와의 교전으로 고위급 장교들까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지원병력이 도착하며 대대적인 추격전 끝에 군은 4시간 만에 강원도 향로봉 부근에서 공비 2명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사살된 공비들은 침투한 공비들 가운데 가장 잘 훈련된 공작조였음이 드러났다.
 
한편 실종된 표종욱 일병들의 가족들은 TV뉴스를 보던 중 공비들에게 노획한 유류품에서 노란 시계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바로 표 일병의 누나가 동생에게 선물해준 시계였다. 그리고 다음날 표 일병이 실종되었던 곳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표 일병의 시신이 발견된다. 시신은 낙엽에 덮여 있었고 속옷만 입은 채였다. 공비들이 표 일병을 살해하고 군복과 물건을 빼앗아간 것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표 일병의 수첩에는 '밤새워 고향 찾아가는 철새들 사랑한다 전해주어라. 해뜨는 고지에서 바라본 하늘, 어머님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며 가족을 그리워하는 표 일병의 마음이 담겨서 애틋함을 자아냈다.
 
군은 표 일병의 시신이 발견되고 나서야 '탈영으로 몰아서 죄송하다'며 뒤늦은 사과를 전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 다음날 헌병대에서 또다시 가족들에게 표 일병의 행적을 물으며 '숨겨도 소용없다. 자수시켜라'는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공분을 자아냈다.

최후의 잔당 공비 1인의 행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도주 중에 사망했거나 북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공비들의 침투 목적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현재로서는 정보수집 정찰을 위하여 왔다가 사고로 잠수함이 좌초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된 사살된 공비들이 남긴 카메라에는 군부대나 주요 시설들을 찍은 사진이 담겨있었다.
 
북한은 처음에는 우발적인 사고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잠수항과 승조원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적반하장의 협박을 일삼았다. 하지만 사건이 종결된 12월에 접어들며 미국의 중재를 통하여 결국 한국에 공식사과했고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우리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사실상 무장공비 24명의 유해를 북으로 송환해줬다. 유일한 생존자 이광수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대한민국 귀순을 선택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하지만 약 21년이 흘러 2017년, 북한은 자체 제작한 <위대한 동지>라는 선전 영화를 통하여 강릉에 침투했다가 사망한 무장공비들을 '자폭영웅'으로 칭송하며 또 한번 뒤통수를 쳤다. 그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어 무의미한 전투 끝에 죽어가야했던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49일간의 전쟁은 대한민국에서 18명의 안타까운 희생자를 남겼다. 그리고 그 가족과 동료, 지인 등 살아남은 이들은 아직도 그날의 고통을 간직하며 삶의 무게를 감당해나가고 있다. 박경상 특공연대 대대장은 "매년 10월이 되면 꿈에 나타난다. 총알이 날아오는데 피할 수가 없다. 꿈속에서 서형원 대위가 아무말 없이 나를 쳐다본다. 꿈에서 깨어나도 너무 힘들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표 일병의 누나는 "차라리 탈영이었다면 어디 가서 우리 연락하지 말고 너 잘살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생의 빈 자리가 너무 크다"며 괴로워했다. 강상영 상병의 부모님은 지금도 아들의 사진을 집에 걸어놓고 외출할 때 들어오면 인사를 한다고 밝혔다. 부친은 "미칠 것 같다. 계절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너무나 생각이 떠오른다. 죽어야 잊겠구나라고 생각했다"라며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절절한 마음을 드러냈다.

남과 북이 여전히 대립하는 한 강릉 무장공비 사태의 비극은 누구에게든 다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오랜 분단에 익숙해져서 전쟁이 잠시 멈춰져있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순간도 우리의 평화를 지켜주기 위하여 희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이 존재한다. 평화의 가치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한 일상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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