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루마니아 뉴웨이브의 한 정점, 마침내 소개되다
 
 영화 <배드 럭 뱅잉> 스틸

영화 <배드 럭 뱅잉> 스틸 ⓒ 알토미디어(주)

 
루마니아. 도나우(다뉴브)강과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펼쳐진 땅. 고대에는 다키아 왕국을 건설해 전성기 로마제국의 숙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나 정복되어 로마인과 토착민의 혼혈로 오늘날의 루마니아 인이 탄생한 나라. 한반도보다 조금 더 큰 면적에 2천만 조금 안 되는 인구를 가진 동유럽의 구 사회주의권 국가다. 우리에겐 그리 접점이 없는 나라이다 보니 브람 스토커의 소설로 유명해진 드라큘라 백작의 고향으로 오히려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보는 것 같지만 실은 극도로 편중된 영화만을 접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아니면 한국 상업영화, 여기에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일본 작품 좀 더 추가하면 아마 9할은 족히 될 테다. 일부 유럽영화가 가뭄에 콩 나듯 라인업에 추가되는 정도만 해도 꽤 다양성을 추구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루마니아 영화를 한국 관객이 극장에서 접할 상황은 지극히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작품 수가 많지는 않더라도 루마니아 영화는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편이다. 특히 예술영화 영역에선 작지만 확실한 브랜드 가치가 있다고 봐도 좋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극장 개봉은 잘 못하지만 영화제에선 상대적으로 자주 접하게 되는 편이다.
 
이쯤 되면 아마 눈썰미 있는 이들이라면 몇몇 루마니아 감독과 대표작들을 떠올리기 시작할 테다. 독재자 차우셰스쿠 시절의 어두운 유산인 강제 낙태금지 정책 때문에 발생한 사회적 참상을 소재로 한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크리스티앙 문지우, 동구 사회주의 블록 해체 이후 혼란기에 공공의료가 무너진 실상을 블랙코미디로 표현한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의 크리스티 푸이우, 싱글맘이 열악한 경제적 상황에서 자녀의 수학여행 경비 마련 때문에 고뇌하는 <그르바비차>를 연출한 야스밀라 즈바닉 등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만만치 않은 명성을 자랑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본격적으로 영화를 전공할 수 있는 대학이 수도 부쿠레슈티에 단 한 곳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강소'영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쿠레슈티 대학 영화학과의 전통은 사회적 리얼리즘 경향, 롱테이크 활용, 감성적인 배경음악과 사운드의 인위적 개입 자제 등으로 요약된다. 인력 풀이 좁은 게 아쉬움으로 제기되기는 하지만 동 시기에 뛰어난 재능들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임과 동시에 '루마니아 뉴웨이브'라는 일군의 흐름으로 작품들을 묶을 수 있게 하는 이런 공통분모는 세계적으로 루마니아 영화 하면 떠올리는 표상처럼 기능하고 있다. 그래서 정통파 드라마건 풍자 코미디이건 간에 루마니아 뉴웨이브 계열 영화를 소화하려면 당대 루마니아 사회상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게 된다.
 
여기에 또 다른 이름이 근래 곳곳에서 떠오르는 중이다. 1977년생 라두 주데 감독은 20대 시절부터 여러 영화제에서 재기 넘치는 단편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2007년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당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어느 일요일>로 국제경쟁 대상을, 2008년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에서 <알렉산드라>로 국제경쟁 작품상을 수상해 일찍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장편으로 범위를 확장해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아페림!>으로 은곰상(감독상)을 수상했고, 2016년 <상처입은 마음>으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과 마르 델 플라타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2018년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에서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2021년 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최고상인 금곰상으로 경력의 절정을 맞이하려는 중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국내 몇몇 영화제에서 꾸준히 소개되어 왔지만 극장 개봉까지는 추진력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 3대 영화제 최고상까지 수상해 작품성을 인정받은 마당에 마침내 공식 개봉이 이뤄지게 될 상황이다. 작년 세계 영화계를 충격에 빠지게 한 문제작 <배드 럭 뱅잉>은 블랙코미디와 날카로운 정치사회적 통찰이 어우러진 라두 주데 감독 스타일의 극한을 본격적으로 국내 관객에게 선보이려 한다.
 
2_루마니아와 서구 현대사를 물감으로 뿌려댄 거대한 스케치
 
<배드 럭 뱅잉>은 '대중영화를 위한 스케치'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영화가 탄생하기 전 저잣거리의 극장공연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은 3부로 이뤄진다. 심지어 결말도 3가지 경우의 수를 제시한다. 세계 3대 영화제 최고상 수상작이라는 단편적 정보만 갖고 호기심에 영화를 선택한 이들이라면 혼돈의 카오스로 떨어질 만한 파격이 기다린다. 갈 데까지 치닫는 지독한 블랙 코미디와 실험영화 형식의 조화가 돋보이는 <배드 럭 뱅잉>은 하나의 거대한 풍자극 스케치 그 자체이다. 언뜻 봐서는 1-2-3부 사이는 전혀 연속성이 없다. 뜬금없이 거대한 광고가 영화 보는 중간에 쐐기를 박는 셈이다. 하지만 약간의 예습과 복습을 병행한다면 감독의 의도는 물론, 영화라는 대중예술이 어디까지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가에 대한 현재적 첨단을 체험할 기회가 될 테다.
 
2_1. 제1부 <일방통행>
 
아마 비위가 약한 이들은 이 영화의 시작부터 당혹스러울 게 분명하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한 명품 예술영화 감상하려 근엄하게 자세를 잡고 있는데 갑자기 포르노 영상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성행위 셀프 동영상이 등장한다. 하지만 강요에 의하거나 약물의 힘을 업은 범죄적 현장은 아니다. 명문 사립중학교 역사교사 '에미'는 남편과 합의하에 권태로운 성생활을 탈피하기 위해 성행위 도중 섹스동영상을 촬영했고 영화의 도입부는 바로 그 동영상 촬영현장인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 터진다. 동영상이 유출되는 바람에 에미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 물론 주인공은 대가를 받고 포르노를 찍지 않았다. 에미에게 동영상은 부부생활의 내밀한 부분인 사적 영역일 뿐이다. 게다가 부부 중 일방이라도 고의로 유포한 것도 아니다. 에미는 그저 프라이버시 정보를 해킹당한 피해자일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교사로서의 자질을 도마 위에 올리며 비난하는데 바쁘다. 동영상이 여기저기 올라가면서 학교는 가마솥 끓듯 난리가 난 상황이다. 에미는 학교 임원진의 호출을 받고 학교로 향한다.
 
에미는 이제 학교로 가 학부모들이 참석한 청문회에 참석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그녀는 학교로 향하는 길에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급한 볼일을 치르고 조언을 청한다. 카메라는 그런 주인공을 마치 미행하듯 쫓으며 파파라치 영상처럼 기록한다. 에미는 끊임 없이 예정된 편도로 걷고 또 걷는다. 1부는 그 과정을 소개하는 게 전부다.
 
2_2. 제2부 <일화, 기호, 경이에 관한 소사전>
 
 영화 <배드 럭 뱅잉> 스틸

영화 <배드 럭 뱅잉> 스틸 ⓒ 알토미디어(주)

 
35분 간 펼쳐진 짧고 강렬한 섹스 동영상과 이후 에미의 당혹스러운 상황이 끝나면 2부가 시작된다. 이제 도입부에 이어 다시 한 번 관객을 대혼란으로 이끌 시간이다. 25분 동안 지독히 현학적이고 신랄한 냉소가 일종의 백과사전 키워드 형태로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주로 현대사회와 역사의 이면을 꼬집고 풍자하는 내용들이다. 물론 규격화된 위키 백과 같은 서술과는 거리가 아득히 멀다. 2부의 항목별 내용은 마치 남미의 대문호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나 프랑스의 인기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보듯 자유롭고 신랄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워진 판도라의 상자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흥분과 당혹감으로 버무려진 질감이다. 키워드 항목은 다음과 같다.
 
* 8월 23일 * 원주민 * 진실 * 군대 * 금발 여성에 관한 농담
* 돈 * 책장 * 루마니아 정교회 * 인민 궁전 * 차우셰스쿠
* 영화 * 경쟁 * 어린이 * 부엌 * 성탄절
* 문화 * 명품 * 치아 * 사회적 거리두기 * 효율성
* 에미네스쿠 * 가족 * 5페이지의 소녀 * 픽션 * 민속
* 취향 * 지구 온난화 * 무의식 * 지식인 * 내밀한 것
* 역사 * 예수 * 사랑 * 합리화 * 수학
* 은유 * 몽타주 * 오럴 섹스 * 자연 * 각주
* 도시 * 애국심 * 펭귄 * 여성 성기 * 정치성
* 포르노그래피 * 클로즈업 * 시선 * 남성 성기 * 주먹
* 힘 * 인종 차별 * 전쟁 * 리얼리즘 * 존중
* 프랑스 혁명 * 루마니아 혁명 * 로봇 * 페허 * 급료
* 변화 * 셀카 * 감정 * 학예회 * 인도
* 부질없음 * 인터넷 방송 * 미래 * 강간 * 판매, 구매
* 참선
 
71개의 키워드는 내용도 방향도 제각각이다. 어떤 항목은 그저 이미지로만 추상화처럼 표현되고 어떤 항목은 인용구 한줄 달랑이다. 관객은 각자의 기호나 지적 관심에 따라 취사선택해 어떤 항목은 흘리고 어떤 항목은 '유레카'를 외치게 될 테다. 물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대체 언제까지 이 막간 부록 같은 2부가 끝날지 초조하게 기다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끝나겠지 하는 기대는 사뿐히 배반당한다. 실험영화라 선언한 작품을 제외하고 이런 파격적인 돌출적 삽입은 근래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감독의 풍부한 지적 토대와 허위에 대한 냉소적 태도가 조화를 이룬 개별 키워드 설명은 넓게는 인류 지성사 전반에 대한 재해석이지만 범위를 좁힌다면 근현대 유럽역사의 어두운 이면과 사회적 범죄에 대한 비판적 독해로 요약된다. 여기에서 더 압축하면 감독의 고국인 루마니아 역사의 치부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꼬는데 집약된다. 물론 2부에서 몇몇 항목은 말 그대로 '농담'에 가까운 큰 의미는 찾기 힘든 내용도 포함되지만 그것마저 너무 진지하게 연속되면 관객이 지쳐 뻗어버릴까 염려한 감독의 배려(?)에 가깝다고 해몽해본다.
 
'혁명'은 상품화되어버렸고 '종교'는 독재와 결탁했으며 여러 도덕적 가치는 알고 보면 온갖 배덕과 위선으로 얼룩져 있는데다 국민을 동원하는 숭고한 정치적 구호는 대개 혐오와 차별을 보기 좋게 포장해놓은 것뿐이었다. 왜 이리도 감독은 지독한 냉소를 뿌리는 걸까? 그런 감독의 얼핏 이해하기 힘든 태도는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그리고 동시대의 영화동료들이 공유하는 루마니아의 과거와 현재를 예술가의 예리한 시선으로 투영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2_3. 제3부 <실천과 빈정거림 (시트콤)>
 
이제 대망의 3부다. 1부와 2부만으로도 머리를 싸매고 있을 관객에게 이제 충격과 공포의 대 환장 난리법석이 벌어질 차례다. 이제 에미는 학교에 도착했다. 영화가 제작되던 당대 현실을 반영하듯 코로나19 거리두기 조치가 안 그래도 짜증나는 에미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생생하게 체험했던 불편과 혼란의 경험이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셈이다. 루마니아도 저랬구나 하는 동시대적 공감도 잠시, 이제 주인공을 '심판'하기 위해 기세등등한 학부모들이 그녀를 포위한 채 청문회가 시작된다.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사랑스러운 자녀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한 천인공로할 '죄인'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한 학부모들의 청문회 자리는 21세기에 유럽 한복판에서 재현된 '마녀사냥'의 현장 그 자체다. 3부는 말 그대로 난장의 군상 극 그 자체다. 학부모들의 입에서 차마 듣기도 민망한 온갖 선정적인 묘사와 모욕적 발언이 난무한다. 처음에는 이 극단적인 상황이 도무지 무엇을 의도하는지 혼이 쏙 빠져나간 상태라 생각할 겨를도 없을 테다.
 
조금 정신을 가다듬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이 난잡한 청문회가 곧 거대한 역사풍자화 스케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대 루마니아의 어두운 치부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쌓인 채 산적한 문제들을 남김없이 폭로하는 고발의 기능을 이 우스꽝스러운 청문회는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청문회 자리에서 오가는 언어폭력을 온전히 해석 가능하다면 루마니아가 안고 있는 사회적 모순을 거지반 소화한 셈이다.
 
영화 속 청문회 참석자들도, 스크린 바깥 관객들도 이제 어지간히 진이 다 빠진 상황, 이제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전통적 서사 구조를 확 비틀어버린 변주로서의 결말이 기다린다.
 
2_4. <세 가지 가능한 결말>

1 이 영화는 그냥 농담이었다
2 잠시, 아주 잠시 당신의 시간을 빼앗았다
3 이 영화는 그냥 농담이며 여기서 끝이 난다
 
그리고 3개로 나뉜 결론이 기다린다. 앞의 둘은 예상 가능한 경우의 수다. 어느 상황이 되건 한쪽은 승복하지 않을 것이고 논란은 진영논리로 남아 계속될 테다. 반면에 마지막 세 번째 결말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전복적이다. 허무맹랑하지만 통쾌한 판타지는 지독한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에 지칠 대로 지친 관객들에게 어이없거나 통쾌하거나 둘 중 하나로 받아들여질 법하다.
 
나머지는 관객이 직접 체험하시라.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3개의 열린 결말은 감독이 정해놓은 결말로 편하게 연착륙할 것을 당연히 예상하는 관객을 낙하산 하나 달랑 주고 비상탈출을 시키는 거처럼 강하게 조련한다. 그 극한체험을 거치고 나면 각자의 뇌리에 <배드 럭 뱅잉>은 좋건 싫건 잊지 못할 악몽으로 남게 될 게 분명하다. 감독은 모든 걸 계획하고 계산에 넣으며 의도적으로 작가 개인의 완성된 예술품이 아니라 거대한 쌍방향 논쟁의 무대로 자유자재로 휘갈긴 듯 촘촘하게 짜인 태피스트리 같은 작업을 활짝 펼쳐놓았다.
 
3_영화에 잔뜩 감춰진 숨은 그림 찾기
 
 영화 <배드 럭 뱅잉> 스틸

영화 <배드 럭 뱅잉> 스틸 ⓒ 알토미디어(주)

 
<배드 럭 뱅잉>은 보기 드문 극한의 영화적 체험을 선사하는 작업이다. 개별 파트만 떼어놓고 보면 그냥 뜬금없는데 1-2-3부 조합을 연속해서 보면 각자가 역할을 담당해 조화가 맞아떨어진다. 참으로 신기한 체험이다. 영화는 현대사의 온갖 상흔이 온전히 청산되지 않은 채 사회주의 붕괴 이후 우경화된 루마니아 현실의 퇴행을 폭로하고 조롱하며 갈 데까지 나아간다. 감독이 선보이는 지독한 냉소에 불편하거나 현학적 과시에 질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감독이 리얼리즘적 기반을 놓지 않으면서 거대한 실험을 변주한다는 것과, 본 작품이 쉽게 보기 드문 문제작이라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다만 루마니아 역사와 20세기 유럽 지성사에 대한 기초가 없다면 이 작품이 선보이는 현란한 분량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노릇일 것이다. 감이 예민한 이들이라면 대충 어떤 정서인지는 간파할 수 있을지 모라도 <배드 럭 뱅잉>은 화장실 농담이 아니라 고도의 지적 토대 하에서 펼쳐지는 계획된 난장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감독의 역사적 키워드들은 본 작품에서만 돌출된 게 아니다. 감독은 초창기 작업부터 일관되게 몇 가지 루마니아 역사와 사회의 금기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이면을 끄집어내는 전투를 거듭해왔고 그 지점들이 고스란히 <배드 럭 뱅잉>에도 반영되어 있다.
 
라두 주데 감독이 보는 자신의 조국 루마니아는 어떤 나라일까?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면 예상외로 쉽게 파악 가능하다. 루마니아는 중세에서 근대 초입으로 들어설 시기, 유럽 국가들이 경험한 시민혁명과 근대국가를 경험하지 못한 채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전근대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발칸반도의 국가들이 독립하는 와중에 신생국으로 탄생했지만 민주적 체제와는 거리가 먼 봉건적 왕조국가로 출발했고, 그나마 계몽군주의 토지개혁 시도를 기득권층이 쿠데타로 내쫓는 막장이 이어지던 루마니아다. 루마니아 인이 다수이지만 민족의 용광로 같은 동네라 소수민족 문제가 끊이질 않았고 전근대적 지주가 주류이던 상태라 농민반란도 빗발쳤다. 이때마다 군대가 강경진압에 나서며 신생 루마니아는 권위주의 군사독재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양차 세계대전 동안 루마니아에선 전체주의가 득세했다. 국민의 90%가 루마니아 정교회 신도였던 나라에서 보수적 종단과 민족주의 극우세력이 결합해 '교권 파시즘'이란 특이한 개념이 등장했다. 2부 키워드 중 <루마니아 정교회> 항목은 당시 교회의 막장 분위기가 현재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지독한 냉소와 조롱의 파노라마다. 사제들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성가대가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가사가 좀 이상하다. 루마니아의 파시즘 세력을 찬양하는 노래가 성가 대신 흘러나오는 중이다.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에 이르는 시기 동안 루마니아는 '국민군단국가'라는 유사 파시즘 형태로 치달았고 나치 독일과 동맹해 전쟁에 참전했다. 루마니아의 전사자는 독일과 일본에 이어 3번째로 많았다.(이탈리아가 3번째가 아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이온 안토네스쿠의 군사독재정권은 히틀러가 흡족해할 만큼 철저하게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는데 앞장섰다. 이탈리아나 불가리아 같은 추축국 동료들이 미온적으로 적당히 움직인 것과는 딴판으로 루마니아 내 반유대주의와 소수민족 차별은 이미 히틀러가 아니라도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과 학살은 범국가적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독일의 패망과 함께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자 여기에 현실사회주의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더해졌다.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이 일부 본보기만 제거된 후 정략적으로 처리된 데다 집권한 공산당 세력조차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기에 루마니아는 어정쩡한 봉합으로 모든 걸 은폐해버린 셈이다.
 
라두 주데 감독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병행하는 중인데 그의 다큐멘터리 중 상당수가 2차 대전 전후 루마니아의 유대인과 집시 학살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의 작업 중 2017년 작품 <데드 네이션>은 1930년대 파시즘에 국민 다수가 경도된 채 벼랑으로 질주한 국가가 2차 대전으로 패망하는 과정을 냉소적으로 담았고, 2020년 작품 <열차의 출구>는 루마니아 군대에 의해 참혹하게 진행된 유대인 학살의 기록을 재연한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2018년 영화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의식 있는 작가가 도시의 기념행사에서 2차 대전 당시 루마니아의 전쟁범죄를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화를 담아내고 있다.
 
라두 주데의 작품세계 속에서 루마니아는 파시즘 청산도, 반유대주의 반성도 형식적일 뿐 온전히 이뤄진 적이 없는 적폐 천국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 역시 세계적으로 악명 높았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비참한 최후와 함께 부정적 유산만을 남겼다. 독재자는 비명에 갔지만 나머지 부패한 공산당 체제는 건재했고 그들이 간판만 바꿔 오랜 기간 권력을 유지하면서 (긍정적 의미의) '서구화'를 가로막았다.

이후 야권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동유럽을 휩쓰는 우경화 속에서 국수적 민족주의가 발호하는 현상이 우려된다. 그의 2018년 만들어진 단편 <원수의 두 처형>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2006년 복권된 파시스트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를 미화한 영화와 실제 처형 장면을 교차해 관객에게 프로파간다와 실제를 비교하게 만드는 고찰이었다. 감독은 고약해 보이는 농담 속에 이렇게 비장한 각오로 예술가의 사회적 책무를 비수처럼 감춰놓고 있는 것이다.
 
4_새로운 영화, 현실의 토양에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다
 
 영화 <배드 럭 뱅잉> 스틸

영화 <배드 럭 뱅잉> 스틸 ⓒ 알토미디어(주)

 
이렇듯 감독의 이전 작업들과 연속성을 강하게 띤 <배드 럭 뱅잉>은 라두 주데의 20년 가까운 영화경력에서 하나의 결정판 버전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테다. 이 영화를 소화하기 위해선 감독의 조국 루마니아의 근현대사와 당대 유럽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지적 훈련이 수반되어야 한다. 당대 예술영화의 최전선에 선 작가들이 유독 현재 유럽의 사회분위기를 우려하고 각국이 처한 우울한 지형을 녹여내는 작업에 매진하는 건 시사되는 바가 결코 작지 않다.
 
언뜻 보면 예술가연 하는 괴짜 감독의 현란한 장난처럼만 보이는 이 영화는 아는 만큼 보이고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며 의외로 친절하게 감독이 가이드 노릇을 하는 문제작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길들여진 현대 영화를 제공하는 대신, 빈자리를 관객의 몫으로 채워 넣도록 안내하는 야심 가득한 이 영화가 라두 주데의 공식적인 국내 첫 개봉영화라는 점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루마니아 뉴웨이브의 거대한 첨단 중 하나이자 유럽을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 중 한명으로 우뚝 선 그의 작품세계가 이후 지속적으로 소개되는 첫 주자가 되길 바란다.
 
아울러 복잡다단한 당대 역사를 풀어내는 방법론 측면에서 국내 창작자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기괴한 매력이 폭발하듯 넘치는 영화를 텍스트로 온전히 풀어낸다는 건 필자의 능력치 바깥이니 극장에서 꼭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강력히 권한다.
배드 럭 뱅잉 라두 주데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루마니아 뉴웨이브 카티아 파스칼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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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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