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편집자말]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모름지기 노래라 하면 밖으로 끄집어내 어떻게든 내질러야 부르는 맛이 살아난다.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내포하고 있는 것을 외부로 갖고 와야 노래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래는 혼자 부를 때보다, 여럿이 함께 부르며 듣고 나눌 때 더 가치가 상승하기도 한다. 아, 물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부르지 않고 그저 듣는 것만으로 노래를 대한다면 그 쓰임새가 달라지는 것이 또 노래이기도 하다. 이런 연장선에서 생각해보니 노래는 들어서 좋을 노래, 불러서 좋을 노래로 나뉠 수도 있겠다 싶다.

얼마 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드라마를 우연히 접하게 됐는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군상과 이야기들을 심도 있게 그려내기로 유명한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였다. 꼭 본방을 사수하지 않더라도 OTT로 시간이 날 때마다 볼 수 있는 요즘의 시청환경이 몰아보기를 선호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무척 고맙다. 아무튼.

이 드라마가 지향하는 '어우러지는 삶의 향기'에 대한 성찰을 잘 드러내 준 '영옥과 영옥의 다운증후군 언니 영희'를 다룬 회차에서 운 좋게도 불러서 보다는 들어서 좋을 노래를 만나게 됐다. 다름 아닌 김현식(혹은 신촌 블루스)의 '골목길'이었다.

'골목길'은 극 중에서 다운증후군을 가진 영희가 즐겨 부르는 노래로 표현된다. 실제로 영희가 불렀을 땐 음정과 박자가 살짝 어긋나는 노래가 되지만 아주 즐겁고 흥겹게 이 노래 '골목길'을 부르는 영희의 모습이 몇 차례 비친다. 일단은 이렇게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발표됐고, 지금은 잘 불리지 않는 노래를 극 중 나이 38살의 영희가 자신의 최고 애창곡으로 사랑해마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웠고, 분명 그녀 영희는 이 노래를 즐겁게 부르고 있는 것이 분명함인데, 청자인 나는 노래를 들으며 깊은 슬픔에 가까워지고 있음에 또 한 번 흠칫했다.  

김현식의 거칠지만 따듯한 목소리로 불린 이 노래를 여태껏 부르기 좋은 노래, 특히 마음이 심란하거나 괴로울 때 내질러 위안을 받는 노래로 인식하고 있던 내 생각이 틀렸음을 극 중의 영희는 그 짤막한 순간에도 노래로 얘기해 주고 있었다. 이 노래는 부르기보다는 마음을 다해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들으면 더 좋을 노래'인 것이라고.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수줍은 너의 얼굴이 창을 열고 볼 것만 같아
마음을 조이면서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만나면 아무 말 못 하고서 헤어지면 아쉬워 가슴 태우네
바보처럼 한마디 못하고서 뒤돌아 가면서 후회를 하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 김현식 '골목길' 가사 중에서.


'골목길' 이 세상에 나온 게 된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매번 놀랍다. 1980년대 초 소울과 블루스를 지향하던 한 무리의 가수들이 고 김현식의 자취방에 모여서 이런저런 음악에 관한 얘기, 인생 이야기들을 나누며 하루를 보내던 중 그중 한 명이 실연의 상처와 아픔을 토로했는데, 이야기를 기반 삼아 단숨에 엄인호가 이 명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신들린 듯, 그러나 편안하게. 그렇게 이 곡은 후에 가수 지망생에게 데뷔곡으로 주어졌다가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방미가 다시 부르기도 했지만 그리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었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그러다가 바로 김현식의 목소리로 불려져 세간의 주목을 모으게 된 것이었다. 신촌블루스 2집에서는 김현식 외에도 멤버들이 함께 목소리를 보탰고, 후에 다시 김현식의 독집 앨범에도 수록되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노래에도 주인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떤 숨은 이야기를 가지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는지도 몹시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건 노래가 비로소 자신과 꼭 맞는 사람을 만나 꽃 피우는 일이다.

엄인호의 손에서 만들어졌고 여러 가수를 지나왔지만, 김현식의 정제되지 않았으나 무한한 결을 지닌 목소리를 통해, 비로소 골목의 숱한 이야기를 응축한 노래, '골목길'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아마 원작자인 엄인호도 이 사실을 알지 않았을까.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후, 노래는 다시 새 주인을 만났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영희, 순수한 영혼을 지니고 놀라운 그림으로 자신의 그리움을 표현해내는, 노래의 가장 투명한 속내를 목소리로 드러낼 줄 아는 바로 그 사람.

김현식의 '골목길'을 듣고 있으면 노래가 목울대에 걸려, 차마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걸 느끼게 된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김현식의 성치 않았던 몸이 가져오는 어떤 반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세상의 온갖 슬픔과 아픔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그걸 노래로 부르려는 사람 같아서 듣고 있으면 온 몸이 아리고 또 아프다. 그래서 김현식이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이 노래를 듣기보다는 차라리 불러서 산화시켜버리자는 심산으로 노래방에만 갔다 하면 가장 첫 곡으로 이 곡을 선곡하고는 했었다.

전주가 흘러나오기 전부터 지그시 눈을 감고 가로등이 깜빡 거리는 어느 어두운 골목길로 나를 먼저 보내 놓는다. 익숙한 듯, 어딘가는 낯설기도 한 노래 속 골목은 매우 내밀하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마저 깜빡이며 졸고 있는 시간엔, 내가 아는 혹은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켜놓은 등 하나가 오롯이 갈 길을 밝혀준다. 그래서 골목엔 무언의 약속이 늘 존재하는 듯 보인다. 흐느적거리는 음률에 몸을 싣고 가사에 심취하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그리움에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노래 '골목길'은 이렇게 오랫동안 불러서 좋을 노래로 내 안에 각인돼 있었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그리고 얼마 전 <우리들의 블루스> 속 영희의 목소리로 '골목길'을 다시 만난 순간, 노래는 들어서 좋을 노래로 바뀌어 버렸다. '골목길'을 처음 들었던 그 순간 김현식의 불안하고도 애틋한 목소리에서 그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깊고 푸른빛이 나오고 있다는 생각을 한 이후 처음이었던 거 같다. 영희의 원초적 몸짓에 실려 퍼지는 가사 하나하나는 슬픔이 아닌, 그 슬픔을 넘어선 근원적 통증의 노래로 자꾸만 듣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들,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나요?"라고.

왜 작가는 영희의 노래로 골목길을 택했을까? 한참을 생각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그리움이었다. 헤어져 사는 쌍둥이 동생 영옥에 대한 그리움, 자신을 냉대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그리움,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 끝에 다다르면 기다리고 있을 편견 없는 시선에 대한 그리움.

노래 하나가 도무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을 흔들기도 하고, 사람들은 노래를 들으며 잃어가던 서정성에 긴급 수혈을 하기도 한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옥의 쌍둥이 언니 영희가 부르는 노래 '골목길'을 듣는 이 모두, 골목길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리움의 정체와 본질을 다시금 깨달았으면 좋겠다. 영희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들의 손길과 눈길에 힘 하나 보태 주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언제 들어도 좋을 노래'로 가슴 깊이 저장해 놓고, 들을 때마다 서로에게 그리움의 이름으로 기꺼이 호명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혜원 작가의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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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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