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와 이방원의 부자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복동생 이방석이 세자가 되면서 이방원은 아버지와 멀어졌고, 이방원은 1398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냈다.
 
부자의 좋았던 추억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1

 
그런데 이 부자의 좋았던 추억은 1392년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있었다. 부자관계에 금이 생긴 뒤에도 '그래도 역시 핏줄이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에피소드들이 생겨났다.
 
이방원은 정몽주 암살에서 나타난 과격성과 더불어 작은어머니인 신덕왕후의 견제 등으로 인해 개국공신 반열에 끼지 못했다. 하지만, 일정 부분의 군사권은 부여받았다.
 
음력으로 태조 7년 8월 26일자(양력 1398년 10월 6일자) <태조실록>은 이성계가 정안군 이방원에게 부여한 권한과 관련해 "처음에 주상께서는 정안군의 건국 공로를 다른 아들들과 견줄 수 없다면서 특별히 동북면 가별치(加別赤) 5백여 호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이성계 가문의 영향력 하에 있던 5백여 가구를 병력으로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상징성이 있을 뿐 아니라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그런 병력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 이성계'가 아닌 '주상 이성계'를 만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신덕왕후의 인척인 정희계(1348~1396)의 견제로 대궐 출입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이방원이 아버지를 만날 기회가 여간해서 생겨나지 않았다.
 
이방원(1367년 생)보다 19세 많은 이 인물 때문에 부자 상봉이 힘들던 상황에서,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들였다. 이성계는 오랜 만에 만난 아들을 보며 '왜 이렇게 뜸했냐?'는 식으로 말했다. 내가 맡긴 일도 있는데 왜 보고하러 들어오지 않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훗날 이방원은 왕이 되고 3년 뒤인 태종 3년 6월 5일(1403년 6월 24일) 신하들과 회의하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를 신하들 앞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이 날짜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이런 시기를 만났는데, 국가적인 이해관계를 어째서 보고하지 않는 것이냐?"고 질문했다. 이런 긴박한 시기에 국가 중대사를 보고하러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물은 것이다. 이방원은 "들어와서 고하고 싶었습니다만, 문 지키는 사람이 곤란케 해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작은어머니 측이 출입을 막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 것이다.
 
이성계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뻔히 알면서도 질문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나타난 아들이 그 점을 환기시키자, 그는 난처함을 느꼈던 듯하다. 그것이 얼굴 표정에 드러났다. 그런 표정 변화가 있었다는 점은 이방원의 언급에서 나타난다. "부끄러워하시는 기색이 있었다(有慙色)"고 그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아들의 눈에 '아버지가 부끄러워하시는구나'라는 느낌을 줄 만한 표정을 지은 뒤에 이성계는 도리어 꾸짖는 듯이 말했다. "꼭 사람을 시켜서 앉으라고 청해야 하는 것이냐?(必使人請坐乎)"라는 말이 나왔다. 문지기가 막더라도 네가 어떻게든 찾아왔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나무란 것이다.
 
이방원의 입에서 이런 추억담이 나온 것은 그날 아버지가 했던 말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세자 책봉 문제로 부자관계가 틀어진 뒤에도 이들 사이에는 이런 '좋은 추억'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한양으로 천도했지만, 건국 직후에 이성계는 계룡산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했었다. 신도시 건설에 착수했을 정도로 계룡산 수도 이전 계획은 상당부분 진척됐다.
 
이 계획을 좌절시킨 인물이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배우 남성진이 연기하는 하륜이다. 1393년에 하륜은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거늘,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동북면과도 막혀 있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좋지 못하다"는 주장을 내놓아 결국 관철시켰다.
 
계룡산 천도가 좌절되기 전에, 또 신도시 건설이 착공되기 전에, 이성계는 두 눈으로 관찰하기 위해 이곳을 직접 둘러봤다. 이때 그가 동행시킨 아들이 바로 이방원이다. 이 사실은 위 날짜 <태종실록>에 실린 이방원의 회고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이 헬기 타고 지방순시 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계룡산까지 왕복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한양 천도는 1394년에 있었으므로, 도읍이 한양 북쪽에 있었던 그 시기에 계룡산을 다녀가려면 시간이 더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기회에 이방원을 동행시킨 것은 천도 작업과 관련해 이방원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여행 시간을 이용해 이방원과 함께 있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다. 큰부인인 신의왕후의 소생들 중에서 가장 크게 소외시킨 이방원을 동행시켰다는 것은 이방원에 대한 이성계의 마음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아들이자 유능한 측근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1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1

 
이성계는 이방원을 아들뿐 아니라 유능한 측근으로도 인정했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뒤에도 그랬다. 이성계가 여전히 이방원의 능력을 신임했다는 점은,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도 묘사됐듯이 명나라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이방원을 파견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 일을 계기로 이방원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고, 이는 훗날 정도전과의 대결에서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됐다. 이런 사례들은 이성계가 이방원을 후계 구도에서 밀어낸 뒤에도 어느 정도는 그의 능력을 활용하고자 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성계는 서둘지 않고 단계적 방법으로 건국을 진행시켰다. 임금이 된 뒤에도 점진적 방법을 선택했다. 고려왕조 절차에 따라 임금이 되고, 국호도 처음에는 고려를 유지했다.
 
즉위 11일 뒤인 태조 원년 7월 28일(1392년 8월 16일) 발표한 즉위교서에서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하고, 격식과 법률도 고려 것을 그대로 쓴다'고 천명했다. 혁명이 아닌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전면 부정할 역량이 없어서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이는 이성계의 신중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급히 서두른 것이 있다. 신덕왕후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이었다.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들이 자신을 더 많이 도왔고 정도전·조준 같은 핵심 측근들도 나이와 공로를 감안하시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신덕왕후 소생들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이방번을 추천했다가 여의치 않자, 그 친동생인 이방석을 내세워 결국 관철시켰다.
 
이런 식으로 이성계는 큰부인 소생들을 후계 구도에서 신속히 배제했다. 이 때문에 이방원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 이방원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방원 앞에서 '부끄러워하시는 기색'도 보여주고, 계룡산 땅 보러 갈 때도 동행시켰다. 명나라와의 외교분쟁 같은 굵직한 현안도 맡겼다.
 
이성계는 이방원을 세자가 아닌 왕자로 요긴하게 활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방원은 왕자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배신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미안해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들의 길'이 아닌 '이방원의 길'을 끝내 선택했다. 비정한 아들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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