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속에서 이렇게 힘든 때가 없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 일부는 더 내려갈 곳 없는 절망의 끝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 정면으로 맞서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내 힘든 순간들을 극복해낸다.

하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극히 일부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의 모든 흔적을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뉴스나 다큐 프로그램을 보면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다른 신분으로 위장해 숨어 지내다가 작은 실수 때문에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 또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신분세탁'을 현실에서 자행해 가까운 주변 사람을 속이는 일들이 현실에서도 일어나곤 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신분세탁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해 2012년 3월에 개봉했던 변영주 감독의 <화차> 역시 생존을 위해 자신의 신분을 위장했던 여성의 삶을 그린 미스터리 영화다.
 
 <화차>는 전국 240만 관객을 동원하며 변영주 감독의 연출작 중 유일하게 흥행에 성공했다.

<화차>는 전국 240만 관객을 동원하며 변영주 감독의 연출작 중 유일하게 흥행에 성공했다. ⓒ 필라멘트 픽쳐스

 
세계 3대 영화제 여자연기자상에 빛나는 배우

고등학교 1학년 때 모델로 캐스팅돼 화장품과 패션잡지 모델로 활동하던 김민희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카피로 유명했던 PCS폰 CF를 통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드라마 <학교2>에서 반항기 있는 아웃사이더 신혜원 역을 통해 연자기로 데뷔했다. 김민희가 연기한 신혜원은 장세진 역의 하지원과 함께 학생 팬들을 중심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사실 연기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김민희는 <학교2>에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드라마 <줄리엣의 남자>와 <순수의 시대>, 영화 <순애보>, <서프라이즈> 등에 출연했지만 여전히 연기력 논란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던 중 김민희는 각고의 노력 끝에 2006년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에 출연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2008년에 출연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로는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 <연애결혼>을 끝으로 드라마보다는 영화 활동에 주력한 김민희는 2009년 <여배우들>, 2011년 <모비딕>에 이어 2012년 이선균과 함께 변영주 감독의 <화차>에 출연했다. 혼자서 두 사람의 인생을 연기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역할이었지만 김민희는 눈부신 열연을 통해 강선영과 차경선의 삶을 표현했고 <화차>는 전국 24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김민희는 <화차> 이후 로맨틱 코미디 <연애의 온도>와 액션 드라마 <우는 남자> 등에 출연하며 안정된 연기를 뽐내다가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서 이즈미 히데코 역을 맡아 또 한 번 '인생연기'를 선보였다. 김민희는 <아가씨>를 통해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고 청룡영화제에서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민희는 2017년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출연해 베를린영화제 여자연기자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한국은 1987년 베니스 영화제의 강수연(<씨받이>), 2007년 칸영화제의 전도연(<말양>)에 이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여우주연상을 배출한 나라가 됐다. 홍상수 감독과의 불륜 인정 이후 이미지가 추락하면서 사실상 상업영화 출연이 힘들어진 김민희는 현재 홍상수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에만 집중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비참한 현실 피하기 위해 신분위장
 
 <화차>에서 엄청난 열연을 펼친 김민희는 2012년 부일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화차>에서 엄청난 열연을 펼친 김민희는 2012년 부일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필라멘트 픽쳐스

 
결혼 한 달을 앞두고 부모님 댁에 내려가던 문호(이선균 분)와 선영(김민희 분)은 커피를 사기 위해 휴게소에 들른다. 하지만 커피를 사온 문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문이 열린 빈 자동차와 휴대폰도 꺼놓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예비신부 선영이었다. 문호는 곧바로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러 갔지만 비슷한 신고접수를 많이 받았던 경찰은 선영의 실종을 단순한 연인들 간의 다툼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결국 문호는 전직 강력계 형사였던 사촌형 종근(조성하 분)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종근은 문호에게 추후 사례를 받을 것을 약속 받고 선영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하지만 선영은 가족도 친구도 없는 가짜 신분이었고 그녀는 실종 당일, 은행잔고를 모두 인출하고 살던 곳의 지문까지 지워 버렸다. 종근의 추적 결과 선영의 본명은 차경선이었고 아버지의 사채 빚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 사람을 죽이고 그의 신분을 훔친 사실이 밝혀진다.

문호는 가까스로 경선을 찾아내지만 경선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자기는 쓰레기이며 원래 이런 여자라고 또박또박 말한다. 그리고 "너, 나 사랑은 했니?"라는 문호의 마지막 물음에 경선은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눈물을 흘린다. 경선은 애써 평정심을 찾는 듯 했지만 경찰의 추격에 기차역 주차장으로 올라갔고 문호의 품에 포근하게 안겼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철로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실 <화차>에서는 영화 시작과 동시에 김민희가 사라졌다가 중반부에 다시 등장하기 때문에 출연분량은 이선균은 물론이고 조성하와 비교해도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화차>가 '김민희의 영화'로 불리는 이유는 그녀가 보여준 엄청난 열연 때문이었다. 특히 처음으로 신분을 훔치면서 선보인 광기 어린 연기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도도한 이미지의 CF스타 김민희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화차>를 연출한 변영주 감독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를 연출하며 주목 받았다. 2002년 김윤진, 이종원 주연의 <밀애>를 통해 상업영화에 데뷔한 변영주 감독은 2004년 윤계상, 김민정, 이준기 등이 출연했던 <발레교습소>를 연출했고 3번째 상업영화 <화차>를 통해 처음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지난 2019년엔 강풀웹툰 원작의 <조명가게>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촬영 및 개봉시기는 아직 미정이다.

이희준-박해준-진선규, <화차> 속 인기배우 찾기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박해준은 <화차>의 악덕 사채업자로 강렬하게 스크린에 데뷔했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박해준은 <화차>의 악덕 사채업자로 강렬하게 스크린에 데뷔했다. ⓒ 필라멘트 픽쳐스

 
오는 3월 8일이 되면 개봉 10주년을 맞는 <화차>에서는 세월이 지난 후에 보면 이름이 널리 알려진 반가운 배우들이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다. 드라마 <전우치>와 <직장의 신>, 영화 <1987>, <미쓰백>, <남산의 부장들>에 출연했던 이희준은 <화차>에서 차경선의 전 남편으로 출연했다. 힘들게 사는 경선에게 연민을 느껴 결혼까지 했지만 사채업자의 행패를 못 이겨 이혼을 결심했다.

경선의 '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채업자 역할은 <부부의 세계>에서 이태오를 연기하며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날린 배우 박해준이 맡았다. <화차>에서는 본명 박상우로 출연했던 박해준은 밤중에 경선의 신혼집 문을 열고 들어오고 경선부부의 식당에서 행패를 부리는 악랄한 사채업자를 연기했다. <화차>는 당시 연극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박해준의 영화 데뷔작이었다.

배우 송하윤은 <화차>에서 문호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의 수의테크니션 한나를 연기했다. 뛰어난 검색능력과 추리력을 통해 선영이 다녔다는 학교의 정보를 찾아내는 등 선영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나름의 활약을 선보였다. 송하윤은 2018년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이서진의 아내를 연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완벽한 타인>에서의 직업 역시 수의사였다.

<화차>에 단역으로 나오는 배우 중에는 오늘날 대중들에게 대단히 유명한 인기배우가 된 인물도 있다. 바로 영화 <범죄도시>와 <극한직업>, 드라마<킹덤> 등을 통해 악역과 코믹 연기, 진중한 연기를 넘나들며 흥행배우로 떠오르고 있는 진선규가 그 주인공이다. <화차>에 출연할 당시만 해도 조·단역을 전전하던 무명배우였던 진선규는 영화 초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으로 출연해 안경을 쓰고 지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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