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종영한 이선균 주연의 애플TV 드라마 < DR.브레인 >의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김지운 감독은 공포, 코미디, 누아르, 사극, SF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드는 한국영화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충무로에서 연출력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인정받는 몇 안 되는 감독이면서도 유명 감독이 된 후에도 꾸준히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그만큼 실험정신이 투철한 감독이기도 하다.

장편 데뷔작 <조용한 가족>부터 최민식, 송강호라는 미래의 대배우들과 함께 했던 김지운 감독은 염정아, 임수정(<장화, 홍련>), 정우성(<놈놈놈>), 아놀드 슈왈제네거(<라스트 스탠드>),  공유, 한지민(<밀정>), 강동원(<인랑>) 등 다양한 배우들과 작업했다. 그중에서도 원톱배우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 김지운 감독과 여러 작품을 함께 하며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김지운의 페르소나'로 불렸던 배우는 단연 이병헌이다.

이병헌은 2005년 <달콤한 인생>을 시작으로 2008년 <놈놈놈>, 2010년 <악마를 보았다>까지 세 작품 연속으로 김지운 감독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2016년 <밀정>에서는 카메오로 출연하며 김지운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영화마다 워낙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관객들마다 크게 나뉘지만 이병헌이 연기했던 캐릭터 중 가장 멋있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달콤한 인생>의 선우는 언제나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달콤한 인생>은 <놈놈놈> <악마를 보았다>까지 세 편을 연속으로 함께 한 김지운 감독과 이병헌이 처음 만난 작품이다.

<달콤한 인생>은 <놈놈놈> <악마를 보았다>까지 세 편을 연속으로 함께 한 김지운 감독과 이병헌이 처음 만난 작품이다. ⓒ CJ ENM

 
연기력과 흥행파워를 겸비한 최고의 배우

1991년 KBS 공채 탤런트 14기로 데뷔한 이병헌은 <내일은 사랑>과 <해 뜰 날> <사랑의 향기> 등 드라마 위주로 활동했다. 1995년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로 영화에 데뷔한 이병헌은 드라마와 영화에서의 평가가 다른 대표적인 배우였다. <아스팔트 사나이> <바람의 아들> <아름다운 그녀> 등 드라마에서는 시청률과 연기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런 어 웨이> <그들만의 세상> <지상만가> 등 영화에서는 영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1999년 <내 마음의 풍금>을 통해 영화에서 가능성을 보인 이병헌은 병역의무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 공동경비구역 JSA >와 <번지점프를 하다> <중독> 등 출연하는 영화마다 흥행은 물론 평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물론 <아름다운 날들> <올인>같은 드라마에서도 변함없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리고 이병헌은 2005년 김지운 감독을 만나 누아르 영화 <달콤한 인생>에 출연했다.

당시 이병헌은 가장 화려한 곳에서 낮은 곳으로 추락하는 폭력 조직의 2인자 선우 역을 멋지게 소화했다. <달콤한 인생>은 비수기인 4월에 개봉했고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와 관객들을 양분하면서 전국 127만의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달콤한 인생>은 개봉 1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한국 누아르 영화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8년 또 한 번 김지운 감독과 손을 잡고 <놈놈놈>에서 나쁜 놈 박창이를 연기하며 카리스마를 발산한 이병헌은 2009년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에서 스톰 쉐도우 역으로 할리우드 메이저 시장에 진출했다. <지.아이.조>는 세계적으로 3억2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올렸고 이병헌은 꾸준히 할리우드 영화에 캐스팅됐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2012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찍은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전국 12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병헌은 전도연과의 재회로 기대를 모았던 <협녀, 칼의 기억>이 흥행에 실패하고 스캔들에 휘말리며 위기에 빠지는 듯 했다. 하지만 2015년 <내부자들>이 청불 영화 최초로 9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여전한 흥행파워를 과시했다. <마스터> <남한산성> <백두산> <남산의 부장들>에 잇따라 출연하며 최고의 배우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이병헌은 올해 세계를 강타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카메오로 출연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자에게 한 눈 팔다 인생 망치는 이야기?
 
 단순히 '멋'으로만 보면 <달콤한 인생>의 선우는 이병헌의 '인생캐릭터'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단순히 '멋'으로만 보면 <달콤한 인생>의 선우는 이병헌의 '인생캐릭터'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 CJ ENM

 
<달콤한 인생>을 선우(이병헌 분)의 시선에서 보면 보스의 여자에게 한 눈 팔다가 인생 망치는 이야기다. 강사장(김영철 분)의 시선에서 보면 어린 여자를 좋아하다가 충신을 내치고 애써 키운 조직을 날리는 이야기다. 어떤 시선에서 보든 모든 불행의 원인은 선우와 강사장을 흔드는 매력적인 첼리스트 희수(신민아 분)였다. 하지만 정작 희수는 선우에게 불륜(?) 현장을 들킨 후 "지워지는 거 아니잖아요"라는 묘한 한 마디만 남기고 스토리에서 제외된다.

김지운 감독은 자칫 '막장 불륜극'이 될 수 있었던 <달콤한 인생>을 누아르라는 장르로 멋지게 포장했다. 김지운 감독의 전작이 코믹 잔혹극(<조용한 가족>), 생활 밀착형 코미디(<반칙왕>), 공포 스릴러(<장화, 홍련>)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장르 영화에 대한 김지운 감독의 이해도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실제로 <달콤한 인생>은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와 멋진 화면 구성, 그리고 유머코드를 적절히 조화시키며 관객들을 몰입시켰다.

선우의 배신(?)을 알게 된 강사장은 선우를 폐창고로 끌고 와 왼손을 망가트린 후 생매장한다. 강사장은 7년을 함께 한 마지막 정으로 선우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는데 선우는 끝까지 해명을 거부한다. 그리고 선우는 문석(김뢰하 분)의 방심을 틈 타 휴대폰 배터리를 이용해 탈출을 감행하는데 폐창고에서의 액션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실제로 이병헌은 데뷔 후 지금까지 찍은 모든 영화보다 <달콤한 인생>을 찍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달콤한 인생>의 백미는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난 선우와 강사장의 긴장남 넘치는 대면이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워낙 많이 패러디돼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익숙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병헌과 김영철은 2009년 드라마 <아이리스>에서도 "우리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이유가 뭡니까?"라는 대사를 통해 <달콤한 인생>과의 묘한 연결고리를 만들기도 했다.

<달콤한 인생>은 강사장과 오무성(이기영 분) 일당을 죽이고 복수를 끝낸 선우가 뒤늦게 찾아온 태구(에릭 분)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영화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할 때 뜬금없이 말끔하게 수트를 차려 입은 선우가 쉐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으로 등장해 관객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김지운 감독은 DVD 코멘터리를 통해 죽음을 앞둔 선우와 가장 화려하던 시절의 선우를 비교해 보여주면서 달콤 씁쓸한 영화의 주제를 강조한 것이라고 밝혔다.

악역 연기도 찰떡같이 소화했던 황정민
 
 <달콤한 인생>에서 악역 백사장을 연기했던 황정민은 5개월 후 지고지순한 시골총각으로 변신해 관객들을 경악시켰다.

<달콤한 인생>에서 악역 백사장을 연기했던 황정민은 5개월 후 지고지순한 시골총각으로 변신해 관객들을 경악시켰다. ⓒ CJ ENM

 
2005년 9월에는 에이즈에 걸린 다방 종업원과 사랑에 빠진 순수한 농촌 총각이 300만 관객을 울렸다. <너는 내 운명>을 통해 포텐이 폭발한 배우 황정민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황정민이라는 '국민 순정남'의 등장을 썩 반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황정민은 <달콤한 인생>에서 소름 끼치는 악역 연기를 선보였던 백사장의 인상이 강하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황정민이 <달콤한 인생>에서 보여준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미 <로드무비>와 <바람난 가족> <마지막 늑대> 등에서 주연으로 출연했던 황정민은 <달콤한 인생>에서 특별출연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황정민은 백사장 캐릭터를 연구하는 데 열정을 다했고 독특한 걸음걸이나 억양 등을 직접 고안했다. 황정민은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와 함께 <달콤한 인생> 최고의 명대사로 꼽히는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라는 대사를 남겼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서대영 상사 역으로 주목 받은 후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진구 역시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의 오른팔 민기 역으로 출연했다. 드라마 <올인>에서 이병헌의 아역으로 데뷔했던 진구는 <달콤한 인생>에서도 분량은 많지 않지만 생매장 위기에서 탈출한 선우에게 옷을 가져다 주는 등 선우를 뒤에서 서포트 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물론 마지막엔 강사장에게 걸려 험한 꼴을 당한다).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 배우로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김해곤도 <달콤한 인생>에서 무기 밀매상 태웅을 연기했다. 선우에게 총기 분해, 조립 요령을 알려주다가 선우가 한사장의 심부름꾼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갑자기 총기조립대결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패해 최후를 맞는다. 영화 막판 태구가 나타나 선우를 죽인 것은 바로 태웅의 복수를 한 것이다. 김해곤은 특유의 독특한 발성으로 영화 중반부 관객들에게 많은 웃음을 안겨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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