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세계>에서 골드문의 전무이사 정청(황정민 분)은 조직원으로 위장한 경찰 석무(김윤성 분)를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정청도 젊은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우정을 쌓아왔던 이자성(이정재 분) 만큼은 경찰이 심은 스파이임을 알게 됐음에도 끝까지 보호해준다. 자신이 함정에 빠져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도 이자성과의 '의리'를 지킨 것이다. 

그런데 이 '의리'는 서양보다는 동양인들에게 더 익숙한 정서인 것 같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8~9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가 크게 유행하면서 의리에 대한 정서가 더 가깝게 다가온 듯하다. 그 중에서도 누아르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우삼 감독이 연출하고 영원한 따거 주윤발이 주연한 영화 <첩혈쌍웅>은 <영웅본색>과 함께 의리를 주제로 한 누아르 영화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며 그 시절 많은 청소년들의 정서에 영향을 끼쳤다. 
 
 1989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25만 관객을 모았던 <첩혈쌍웅>은 2016년 27년 만에 국내에서 재개봉됐다.

1989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25만 관객을 모았던 <첩혈쌍웅>은 2016년 27년 만에 국내에서 재개봉됐다. ⓒ 조이앤시네마

 
80년대 아시아 지배했던 '누아르의 아버지'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나 4살 때 홍콩으로 건너온 오우삼 감독은 1970년대 초반 당대 최고의 무협영화 감독이었던 장철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연출과 현장을 공부했다. 1975년 성룡이 스턴트 배우로 참여한 무술영화 <철한유정>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한 오우삼 감독은 커리어 초기 다양한 장르를 연출하며 경력을 쌓았다. 80년대 초반 슬럼프로 3년의 공백을 가졌던 오우삼 감독은 1986년 홍콩 누아르의 걸작 <영웅본색>을 만들었다.

80년대 중·후반 홍콩영화의 황금콤비가 되는 서극 감독이 제작하고 오우삼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영웅본색>은 홍콩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큰 사랑을 받으며 '의리' 열풍을 몰고 왔다. 오우삼 감독은 이듬 해 개봉한 <영웅본색2>를 통해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날려 버렸고 1989년에는 또 하나의 누아르 걸작 <첩혈쌍웅>을 만들며 아시아 시장에서 누아르의 아버지로 군림했다.

하지만 오우삼 감독은 <첩혈쌍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작자 서극 감독과 충돌을 일으키며 결별했고 <영웅본색3>의 시나리오를 수정해 <첩혈가두>를 만들었다. 오우삼 감독은 <첩혈가두>는 만족스러운 흥행성적을 올리지 못하며 침체에 빠지는 듯 했지만 1991년 철치부심해서 만든 주윤발, 고 장국영, 종초홍 주연의 <종횡사해>를 통해 <영웅본색>에 버금가는 흥행성적을 올리며 건재를 과시했다.

<첩혈속집>을 끝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오우삼 감독은 장 끌로드 반담 주연의 <하드타겟>과 존 트라볼타, 크리스찬 슬레이터 주연의 <브로큰 애로우>로 명성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할리우드 도전도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97년 <페이스 오프>가 세계적으로 2억4500만 달러의 흥행성적(박스오피스 모조 기준)을 기록했고 <미션 임파서블2>, <윈드토커>, <페이첵> 등을 차례로 연출하며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감독이 됐다.

<페이첵>을 끝으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오우삼 감독은 2부작으로 만들어진 <적벽대전>을 연출했고 <적벽대전>은 국내에서 두 편 합쳐 400만이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12년 인후암 판정을 받아 수술과 투병으로 한동안 고생했던 오우삼 감독은 2014년 송혜교와 함께 <태평륜>, 2017년에는 하지원과 함께 <맨헌트>를 작업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쫓고 쫓기다 서로를 알아본 두 영웅
 
 오우삼 감독 영화에서 주인공이 흰옷을 입고 충격신을 벌이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오우삼 감독 영화에서 주인공이 흰옷을 입고 충격신을 벌이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 조이앤시네마

 
<첩혈쌍웅>은 당초 주윤발, 이수현, 엽천문의 삼각관계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멜로요소가 강한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가수와 배우를 겸업하던 엽천문이 스케줄 문제로 비중이 줄어들면서 두 남자 주인공의 의리가 부각되는 누아르 영화로 장르가 바뀌었다.

살인청부업자 아장(주윤발 분)은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던 중 사고로 클럽에서 노래를 하는 가수 제니(엽천문 분)의 눈을 멀게 한다. 아장은 제니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지켜주고 제니 역시 친절하게 다가오는 아장에게 마음을 연다. 한편 강력계 형사 이응(이수현 분)은 자신이 경호하는 VIP를 눈앞에서 살해한 아장을 쫓기 시작하고 감정이 풍부한 킬러 아장이 제니 앞에 나타날 거라 확신한다. 

아장과 이응은 서로 총을 겨누며 적대심을 나타내지만 서로에게 매료되면서 점점 가까워진다. 눈이 보이지 않는 제니를 위해 총을 겨누면서도 서로를 "덤보"와 "미키마우스"로 부르던 두 사람은 성당에 쳐들어온 '공공의 적' 왕해(고 성규안 분)를 해치우기 위해 힘을 합친다. 엄청난 총격전 끝에 왕해 일당을 일망타진한 이응은 경찰에 자수하며 신변보호를 요구하는 왕해를 응징한 후 자신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미키마우스' 아장을 그리워한다.

이응과의 합동작전으로 제니를 구한 아장은 왕해의 총에 맞고 눈을 다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장과 제니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어서 서로에게 다가가지만 코 앞에서 엇갈리며 끝내 재회하지 못한다. 결국 아장은 사랑하는 제니를 마지막으로 안아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숨을 거둔다. 킬러와 형사의 의리를 그린 누아르 영화 <첩혈쌍웅>이 잠시 처절한 멜로영화로 바뀌는 순간이다.

<첩혈쌍웅>은 오우삼 감독 영화의 상징이 된 비둘기가 처음 등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한 두 장면에서만 비둘기가 등장하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첩혈쌍웅>에서는 비둘기가 영화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특히 제니의 집 밖에서 이응이 아장을 쫓을 때는 비둘기떼가 나타나 이응의 동선을 가로 막는다. 이는 마치 두 주인공이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치라는 비둘기의 부탁(또는 지시)처럼 보인다.

홍콩경찰에게 감사패 받은 '경찰전문배우'
 
 이수현은 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무려 70여편의 영화에서 경찰 역할을 도맡아 했다.

이수현은 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무려 70여편의 영화에서 경찰 역할을 도맡아 했다. ⓒ 조이앤시네마

 
<첩혈쌍웅>에서 강력계 형사 이응을 연기한 이수현은 홍콩 영화의 대표적인 '경찰전문배우'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가 경찰을 연기한 작품은 무려 70여 편에 달하고 강력계 형사뿐 아니라 교통경찰, 수사반장, 경찰간부(총경,국장), 경찰학교 교관 등 경찰과 관련된 거의 모든 직책을 연기했다. 실제로 순직경찰 가족들을 위한 기부 활동을 하기도 한 이수현은 데뷔 20주년에 홍콩 경찰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이수현이 홍콩영화의 '희극지왕' 주성치를 데뷔시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주성치는 2002년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서 <소림축구>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시상식에서 이수현의 이름을 언급하며 옛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이수현은 <첩혈쌍웅>에도 함께 출연했던 악역전문배우 고 성규안도 배우로 발굴했는데 2008년 그가 비인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직접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첩혈쌍웅>에서 비련의 여주인공 제니 역은 대만 출신의 가수 겸 배우 엽천문이 연기했다. 제니가 영화 속에서 부른 노래 두 곡은 실제로 엽천문이 1989년에 발표한 광동어앨범에 수록되기도 했다. 주윤발에게서 멜로 감성을 끄집어내며 애절한 연기를 선보였던 엽천문은 80년대 초반부터 배우 활동을 시작했지만 1991년 <사사가가참기내>를 끝으로 배우 활동을 접었다.

아장의 암흑가 선배이자 아장에게 일감을 가져다 주는 풍강을 연기한 배우 주강은 아장을 배신하는 듯 했지만 나중엔 아장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의리 있는 선배로 나온다. 오우삼 감독이 연출하고 주윤발이 출연했던 <종횡사해>에서는 고아였던 세 주인공을 어린 시절부터 돌봐준 양아버지 경찰로 출연했다. 주로 선한 역할을 많이 맡았지만 가끔은 악역을 맡아 잔인한 연기를 소화하기도 했던 8~90년대 홍콩영화의 대표적인 신스틸러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첩혈쌍웅 오우삼 감독 주윤발 이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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