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3일 <킹덤: 아신전>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작년 3월 <킹덤 시즌2>가 공개된 이후 1년이 넘도록 <킹덤>의 새 시즌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은 <킹덤: 아신전>을 <킹덤 시즌3>로 착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킹덤: 아신전>은 조선에 귀화해 살던 여진족의 후예인 성저야인의 소녀가 조선에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한다는 <킹덤> 본편 이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프리퀄'이다.

런닝타임 94분에 불과한 <킹덤-아신전>이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시즌3라는 오해(?)를 받았음에도 하나의 스페셜 에피소드로서 충분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아신을 연기한 전지현의 열연 덕분이었다. 영화로는 2015년 <암살>, 드라마로는 2016년 <푸른 바다의 전설> 이후 꽤 오랜 기간 동안 작품 활동이 없었던 전지현은 <킹덤: 아신전>을 통해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킹덤> 특유의 음침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지금이야 전지현이 멜로부터 액션, 코미디, 판타지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만능배우'로 거듭났지만 전지현 역시 '발연기 논란'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전지현에게 커리어 첫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주며 전지현이라는 배우를  청춘스타에서 시대를 이끌어가는 아이콘으로 성장시켜 준 작품이 있었다. 바로 차태현과의 찰떡 연기호흡이 돋보였던 전지현의 첫 번째 대표작 <엽기적인 그녀>였다.
 
 전지현과 차태현의 연기호흡이 돋보였던 <엽기적인 그녀>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지현과 차태현의 연기호흡이 돋보였던 <엽기적인 그녀>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 아이엠픽처스

 
광고, 영화, 드라마 섭렵한 시대의 아이콘

그 시절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그렇듯 전지현 역시 1990년대 후반 10~20대 여성들을 타깃으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던 패션잡지의 모델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잡지모델로 활동하던 전지현을 싸이더스의 정훈탁 대표가 발탁하며 광고모델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1998년 SBS 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에 출연하면서 연기자 활동을 시작했다(물론 그 시절의 전지현은 지금처럼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는 아니었다). 

영화 <화이트 발렌타인>과 드라마 <해피 투게더>에 출연하며 청순한 매력을 뽐내던 전지현은 한 프린터 광고에서 현란한 테크노 댄스를 선보이면서 단숨에 '밀레니엄 요정'으로 떠올랐다. 2000년 이정재와 함께 영화 <시월애>에 출연한 전지현은 2001년 차태현과 함께 출연한 <엽기적인 그녀>로 서울에서만 170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전지현은 <엽기적인 그녀>로 최연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전지현은 <엽기적인 그녀>로 최고의 스타로 등극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엽기적인 그녀>가 만든 이미지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전지현은 차기작 <4인용식탁>과 <데이지> <슈퍼맨이었던 사나이>가 나란히 흥행 실패하며 배우로서 슬럼프에 빠졌다(물론 해외에서 성공을 거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도 있었지만 애초에 이 영화는 108분 짜리 초대형 PPL 같은 영화였다). 해외 진출작이었던 <블러드> 역시 실망스러웠던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전지현은 2012년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에서 '줄타기의 달인' 예니콜을 연기하며 무려 1298만 관객을 동원했고 <엽기적인 그녀> 이후 11년 만에 흥행작을 만들었다. 2013년 <베를린>에서도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인 전지현은 그해 연말 15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를 통해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과 SBS 연기대상을 휩쓸었다. 아시아 전역에서 사랑 받는 대스타가 됐음은 물론이다.

전지현은 2015년 <암살>을 통해 '쌍천만 배우'에 등극했고 2016년에는 박지은 작가의 신작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 인어공주를 연기했다. 올해 <킹덤: 아신전>에서 또 한 번 명불허전의 연기를 선보인 전지현은 오는 10월 tvN 1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지리산>에 출연할 예정이다. <지리산>은 <킹덤: 아신전>에서 전지현과 한 차례 좋은 호흡을 선보였던 김은희 작가가 집필한 작품이다.

견우는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2000년대 인터넷에는 '전지현의 하루'라는 유머글이 올라왔을 정도로 전지현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2000년대 인터넷에는 '전지현의 하루'라는 유머글이 올라왔을 정도로 전지현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 아이엠픽처스

 
<엽기적인 그녀>는 지난 1999년 '견우74'라는 아이디를 가진 네티즌이 PC통신 나우누리의 유머 게시판에 올려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PC통신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물론 각색과정에서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기 때문에 원작에 있지만 영화엔 없거나 원작에 없는 내용이 영화에 추가로 들어간 장면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애초에 원작소설과 영화는 결말부터 전혀 다르다).

지하철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노인의 머리에 구토를 한 그녀(전지현 분)는 당황해 자리를 피하려는 견우(차태현 분)를 지긋이 바라보며 "자기야"라고 부른 후 그 자리에서 실신한다. 졸지에 처음 보는 그녀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된 견우는 인사불성의 그녀를 업고 여관으로 가지만 샤워 도중 경찰이 들이닥치며 유치장에 갇힌다. 이를 인연으로 '엽기적인 그녀'와 견우의 지독한 인연(또는 악연)이 시작된다.

견우는 내레이션을 통해 시종일관 그녀에게 끌려 다니는 자신이 괴롭다거나 '저런 여자는 딱 질색'이라고 한탄하지만 사실 견우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무리 그녀가 억지를 부리고 견우를 압도할 수 있는 완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위해 여러 희생을 감수할 남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견우는 자신의 진심을 숨기고 그녀의 엽기적인 행동들을 받아줬을 것이다.

노골적인 코미디로 흘러가는 전반전에 비해 후반전은 멜로감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물론 후반전에서도 '지하철 뺨 때리기 게임' 같은 코믹한 장면도 있지만 코 끝이 찡할 만큼 감성적인 장면들도 적지 않다. 수많은 매체에서 패러디된 "견우야 미안해" 장면을 비롯해 그녀와 소개팅남(임호 분)의 소개팅 장면이 대표적이다. 특히 견우가 당부한 '그녀를 상대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지침들'은 견우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엽기적인 그녀>는 중화권에서 <나의 야만적인 여자친구>라는 제목으로 개봉돼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 My Sassy Girl >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미국에서는 극장개봉도 되지 못한 채 DVD로만 출시됐다. 국내에서는 지난 2016년 차태현, 빅토리아 주연의 속편이 개봉됐지만 전국 10만 관객도 동원하지 못했다. 주원과 오연서가 출연한 드라마 버전은 11.4%의 시청률(닐슨 코리아 기준)을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영화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전지현이 '오빠'라고 불러준 행운(?)의 탈영병
 
 고 김일우 배우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다섯 쌍둥이로 출연해 유쾌한 감초 연기를 선보였다.

고 김일우 배우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다섯 쌍둥이로 출연해 유쾌한 감초 연기를 선보였다. ⓒ 아이엠픽처스

 
<엽기적인 그녀>는 주인공 그녀와 견우가 런닝타임의 대부분을 끌어가는 영화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주인공들을 갈라놓는 연적도 나오지 않고 주인공들이 갑자기 큰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후반전에 임호가 그녀의 소개팅남으로 특별 출연하지만 그녀는 소개팅남의 좋은 기억력에 대한 칭찬 한마디 없이 견우를 찾으러 나가 버린다). 하지만 영화의 재미를 극대화 해주는 조연들은 영화 곳곳에서 <엽기적인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해줬다.

1980년대부터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개성 있는 조연으로 활약하던 고 김일우 배우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여관 주인과 종업원, 유치장에서 만난 자해공갈단 대장, 부평역 역장, 그녀가 다니는 대학의 수위 아저씨까지 총 1인 5역을 소화하며 열연을 펼쳤다. <엽기적인 그녀> 이후에도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하던 김일우 배우는 지난 2004년 52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별세했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가장 재미 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바로 탈영병이 등장하는 놀이공원 장면이다. 자신을 보러 면회를 왔다가 위병소 하사와 눈이 맞은 여자친구에게 버림 받고 부대를 뛰쳐 나온 탈영병은 견우를 총으로 위협하다가 "오빠라는 말 처음 들어 봐"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자수를 한다. 탈영병을 연기한 배우 서동원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드라마 <신입사원> <육룡이 나르샤> 등에 출연했다.

소주 3잔만 마시면 그대로 기절하는 주사를 가지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 역은 TBC 시절부터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해 좋은 연기를 선보였던 1970~1980년대 대표 미남배우 한진희가 맡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견우를 볼 때마다 언제나 그녀와 헤어질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견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후 괴로워하는 딸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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