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영화 속 배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이 다큐멘터리라면,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찍은 다큐멘터리라면 더욱 그렇다.

필리핀 다큐멘터리 <바다에서 마지막 날들>을 보고 나오는데 내 앞의 어느 관객이 곁에 선 친구에게 말했다. "필리핀 바닷가에 다녀온 것 같아" 하고.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영화다.

필리핀 바닷가라 했지만 다 같은 바다가 아니다. 부산 해운대와 인천 을왕리, 자갈이 깔린 보길도 외딴 바다와 원자력 발전소가 우뚝 솟은 울주군 바다가 다른 것처럼.

영화는 필리핀 카리하타그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필리핀 가장 남단의 민다나오섬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필리핀이라 한다면 대부분 마닐라와 세부를 떠올리겠지만 카리하타그는 그중 어느 곳과도 비슷하지 않다. 하지만 필리핀 사람이라면 마닐라와 세부보다 카리하타그가 더 필리핀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바다에서 마지막 날들 포스터

▲ 바다에서 마지막 날들 포스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12살 소년 레이보이의 마지막 며칠

영화는 베니체 아티엔자 감독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그녀는 카리하타그의 열두 살 난 소년 레이보이를 찍는다. 감독은 레이보이가 도시에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기 직전 며칠을 카메라에 담으려 한다. 천진한 아이가 놀고 뛰어다니며 생각하는 것들을 조개껍질을 줍듯 자연스럽게 주워 담는다.

영화엔 대단한 목적이 있는 것 같진 않다. 그저 자연스럽게 아이의 일상을 담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 마을을 떠나 도시에 내려 살아가게 된 아이는 다시는 이 시절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말이다.

어디 카리하타그의 레이보이만 그럴까. 도시에서 배운 모든 사람들은 제 옛 모습을 금세 잃어버린다. 흙바닥을 뛰어다니며 구슬치고 팽이치던 시절 같은 것들은 기억이 되고 추억속에만 남을 뿐이다. 영화는 가만히 레이보이의 일상을, 기억이며 추억이 되기 전의 그 일상을 담아낸다.

천진한 마을이지만 카리하타그의 오늘이 평화롭기만 한 건 아니다. 영화엔 위기감이 감돈다. 물고기는 잡히지 않고 날씨는 시시때때로 뒤바뀐다. 떠밀려온 쓰레기가 해변을 가득 메운다.
 
바다에서 마지막 날들 스틸컷

▲ 바다에서 마지막 날들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때로는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때로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 비판하는 영화가 있다. <바다에서 마지막 날들>도 그런 영화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매번 허탕치고 돌아오는 부오이 삼촌을 생각해보라. 그가 먼 바다까지 작은 배를 몰고 나아가는 건 가까운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가 가까운 바다를 지켜야 하는 건 쇠로 된 배를 타고 와 먼 바다 물고기를 죄다 쓸어가는 이들 때문이다.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아, 서아프리카의 세네갈 어부들도 같은 이유로 해적이 됐다. 그들을 해적으로 만든 쇠로 된 배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우리가 먹는 참치며 정어리는 그와 관련이 없는가.

뒤바뀌는 날씨와 해변 가득한 플라스틱이야 말해 무엇할까. 한국이 필리핀에 불법으로 보낸 쓰레기 6500t을 2019년 다시 가져온 뉴스를 떠올려보자.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이라며 수출한 컨테이너엔 처리 불가능한 유해물질과 온갖 잡쓰레기들이 플라스틱과 뒤섞여 있었다고 했다.

한국이 지속가능한 쓰레기 처리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란 점도 함께 알려졌다. 서울과 경기도 쓰레기를 도맡아 매립해왔던 인천이 2025년부터 쓰레기 매립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 그 쓰레기를 매립할 곳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유명한 얘기다. 그러면서도 한국은 1년에 약 700만t의 플라스틱을 소비한다. 1인당 소비로 따지면 세계 3위 수준이라고 한다.

<바다에서 마지막 날들>은 열두 살 난 레이보이의 진학 전 며칠을 그린 영화다. 이 다큐멘터리는 필리핀 사람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외진 바닷가 마을 카리하타그에서 찍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저 그 작은 마을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한국의 서울과 필리핀 카리하타그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생각보다 아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걸 느끼게끔 한다. 러닝타임 동안 필리핀 어느 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기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이다.
 
바다에서 마지막 날들 스틸컷

▲ 바다에서 마지막 날들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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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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