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일본 마쿠하리 메세 A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남자 태권도 68㎏급 경기. 연장 승부 끝에 우즈베키스탄의 라시토프에게 패배한 이대훈이 아쉬워하고 있다.

25일 일본 마쿠하리 메세 A홀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남자 태권도 68㎏급 경기. 연장 승부 끝에 우즈베키스탄의 라시토프에게 패배한 이대훈이 아쉬워하고 있다. ⓒ 연합뉴스

 
'태권도 종주국' 대한민국이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 없이 대회 일정을 마쳤다. 한국 태권도 대표팀은 '2020 도쿄올림픽' 태권도 종목에 남녀 6명의 선수가 출전하여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획득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항상 최강자의 면모를 자부하던 대한민국 태권도로서는 충격적인 성적이었다.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히던 이대훈(대전시청)의 부진이 뼈아팠다. 남자 68kg 세계랭킹 1위 이대훈은 16강에서 조기 탈락하며 충격을 안겼다. 이대훈은 체급 최강자로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대회 등 모든 대회를 석권하며 올림픽에서만 금메달을 따내면 그랜드슬램을 이룰 수 있었지만 번번이 고비를 넘지 못했다. 이대훈은 58kg급에 첫 출전한 런던 대회에서는 은메달을, 68kg급으로 나섰던 리우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땄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도쿄에서는 한을 풀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이번에도 올림픽 징크스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대훈은 울루그벡 라시토프(우즈베키스탄)와 16강 전에서 연장 접전 끝에 분패했다. 2라운드 초반까지만 해도 12-3으로 점수차를 벌리며 여유있는 승리가 예상되었으나. 우즈베키스탄의 고의적인 경기 지연과 심판의 뜬금없는 비디오판독 등 석연치 않은 경기운영이 더해지며 흐름이 끊겼고 결국 역전의 빌미가 됐다.

이대훈은 패자부활전을 거쳐 동메달 결정전에 나섰지만, 이번에도 중국의 자오슈이에게 15-17로 패하며 끝내 메달 획득에 실패한 채 대회를 마쳤다. 선수 은퇴를 선언한 이대훈은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지도자의 길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기에 더욱 아쉬운 무대가 됐다.

여자 48kg급 심재영(춘천시청)과 여자 57kg급 이아름(고양시청)도 각각 8강과 16강에서 탈락했다. 그나마 24일에는 남자 58kg급에서 장준(한국체대)에 이어 27일 남자 80kg 초과급에서 인교돈(한국가스공사)이 각각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남자 태권도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다빈(서울시청)은 대회 마지막 날 여자 67㎏ 초과급 결승에 출전하여 마지막 금메달에 기대한 희망을 높였으나 밀리차 만디치(세르비아)에게 7-10으로 패해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이다빈은 준결승에서 세계랭킹 1위 비안카 워크던(영국) 종료 직전까지 22대 24로 끌려갔으나 막판에 3점짜리 발차기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결승에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결승에서는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며 내내 끌려가는 모습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이다빈도 이대훈과 마찬가지로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선수권대회를 모두 석권했으나 올림픽에서만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태권도는 양궁, 펜싱, 사격 등과 함께 하계올림픽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효자종목으로 꼽혀왔다. 특히 태권도는 다른 종목과 달리 한국이 종주국이라는 역사적 자존심까지 관련되어 있기에 우리 국민들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 종목이다.

사상 첫 '노골드', 각국 선수들 약진 눈에 띄어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도입된 2000년 시드니 대회 이래 한국이 금메달을 하나도 따내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로 지난 2016년 리우 대회만 해도 한국은 금메달 2개 포함, 출전 전 종목 메달을 따내며 강세를 이어왔던 것과 비교하면 기대 이하의 성적표다. 올림픽에서 한국스포츠를 대표하는 또다른 강세 종목인 양궁의 경우, 최근 여자 단체전에서 '올림픽 사상 첫 9연패'라는 위업을 세우는 등 장기집권에도 흔들림없는 위상을 지켜가고 있기에 더욱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코로나19라는 특별한 변수가 한국 태권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태권도 대표팀은 지난해 1월 이후 제대로 된 실전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다. 유럽 선수들이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지역 대회를 거치며 실전감각을 유지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선수촌에서 자체 훈련을 소화했다고 하지만 정식 대회보다 체력과 경기감각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올림픽이 1년이나 연기되면서 선수들이 집중력과 동기부여를 유지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실제로 한국 태권도 대표팀은 이번 올림픽에서 기술적인 측면보다도 경기 운영과 체력에서 문제를 드러낸 경우가 많았다. 이대훈은 16강전에서 경기 초반 크게 앞서고도 여유있게 경기를 풀어가지 못했고 우즈베키스탄의 심리전에 휘말려 페이스가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장준은 대회 초반부터 수비에서 아쉬운 모습을 여러 차례 드러내며 실력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다빈도 4강과 결승전에서 경기력의 기복이 심했다. 여기에 세계 최강국 한국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상대국들과 심판진의 묘한 견제 분위기도 한국 선수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측면이 있다.

물론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선수들이 직접 고백한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다. 이대훈은 16강 패배 후 인터뷰에서 "경기를 뛴 지 오래 되어서인지 넉넉한 점수차에도 이상하게 조급함과 불안감이 있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58kg 세계랭킹 1위인 장준 역시 동메달을 획득하고 난 후 "대회 내내 중압감이 심했다. 4강에서 탈락하고 나서야 부담감이 사라지며 경기력이 올라왔다"고 자평하며 아쉬워했다. 심지어 장준과 이다빈은 올림픽은 이번이 첫 출전이었다.

선수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이처럼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닌 선수들에게도, 메달에 대한 주변의 높은 기대치와 실전 공백이라는 변수를 극복하고 최상의 마인드 컨트롤을 유지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준 장면이다.

한편으로 이번 도쿄올림픽은 비록 한국 대표팀에게는 성적상 뼈아픈 대회가 되었지만, 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한국만의 독주체제에서 벗어나 태권도의 매력과 세계적 확장성을 증명했다는 점에서는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6일 "메달 획득이 어려운 나라들에게 태권도는 메달을 딸 수 있는 길이다"라고 평가하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이 된 이후 선수단이 작은 국가들에 12개 이상의 메달을 선사했다"라고 분석했다.

그동안 올림픽 메달과 인연이 없었던 스포츠 변방국들에게 태권도는 희망이 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동메달을 수확한 것을 비롯하여, 2016 리우 대회에서는 코트디부아르와 요르단이 태권도로 사상 첫 금메달을 차지했다. 니제르, 베트남, 가봉도 첫 은메달을 따냈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우즈베키스탄과 태국이 첫 올림픽 메달의 기쁨을 태권도에서 누렸다. 남자 68kg급 금메달 주인공은 이대훈을 이긴 라시토프로 아직 19세의 신성이다. 여자 49kg급 금메달을 차지한 태국의 파니파크 옹파타나키트 역시 조국에 사상 첫 태권도 금메달을 안겼다. 이 밖에도 여자 58㎏급 은메달은 튀니지의 모하메드 칼릴 젠두비, 여자 57kg급 동메달의 주인공은 대만의 로 차이링이었다.

NYT가 분석한 태권도의 장점은 다른 종목과 달리 비싼 장비나 넓은 시설같은 고급 인프라 없이도 접근성이 뛰어난 운동이라는 데 있다. 유럽이나 북미같은 스포츠 강국들은 물론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같은 상대적으로 경제력과 스포츠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에서도 누구나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다. 특히 한국 출신의 지도자들이 해외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코치로 영입되어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경우도 더 활발해지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이 노골드에 그치는 동안 태권도 판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꾸준히 실전감각을 유지한 유럽이 남녀 금메달 8개 가운데 5개(러시아 2개, 이탈리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각1개)를 가져가며 강세를 보였지만 미국, 우즈베키스탄, 태국도 각각 금메달을 수확하며 경쟁구도가 다원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태권도의 상향평준화는 우리에게도 더 치열한 노력과 동기부여를 요구하는 좋은 자극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이번 대회 '노골드'라는 결과에 지나치게 연연하기보다는,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각오로 새롭게 시작하는 분발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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