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세뇰 귀네슈-딕 아드보카트... 한국 축구팬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과거 한국축구와 인연을 맺었던 '추억의 명장'들의 근황이 최근 축구팬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도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백전노장들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영광 재현을 꿈꿨지만, 동시에 세월의 흐름도 절감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히딩크 감독은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축구의 영웅이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축구의 4강 신화를 이끌었던 그는 19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한국축구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46년생으로 어느덧 칠순을 훌쩍 넘긴 히딩크 감독은 은퇴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2020년 8월 네덜란드령 퀴라소 축구대표팀의 사령탑 겸 기술위원장에 부임하며 다시금 현장으로 복귀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76위의 퀴라소는 카리브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로 히딩크 감독의 모국이기도 한 네덜란드의 구성국이자 자치령이다. 과거에는 안틸레스 제도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네덜란드의 일부지만 지역적으로는 카리브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국제축구연맹에는 북중미카리브 축구 연맹(CONCACAF)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다. 인구는 16만에 불과하지만 본토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를 비롯하여 유럽 리그에서 활약하는 인재들이 다수 포진해 있어서 잠재력 있는 팀으로 꼽혔다. 퀴라소 축구협회는 풍부한 경험을 지닌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며 2022 카타르월드컵 본선 진출에 도전장을 던졌다.

히딩크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퀴라소는 카타르 월드컵 북중미 1차 예선 C조에서
3승 1무(승점 10)의 무패행진으로 조 1위를 차지하며 2차 예선에 진출했다. 히딩크 감독 부임당시 80위였던 퀴라소의 피파랭킹도 네 계단이나 뛰어올랐다.

하지만 2차 예선의 벽을 넘지 못했다. 카타르 월드컵 북중미 지역 예선에서는 먼저 6개 조로 나눠 치른 1차 예선에서 각 조 1위를 차지한 6개 팀이 2차 예선에서 홈앤드 어웨이를 치른다. 승자 3개 팀은 3차 예선에 직행한 5개국(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자메이카, 멕시코, 미국)과 합쳐서 다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의 풀리그를 벌여 상위 3개 팀에 월드컵 본선행을, 4위팀은 대륙 간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퀴라소는 2차 예선에서 파나마를 만났다. 퀴라소는 1차전 원정에서 1-2로 패한데 이어 마지막 반전을 꿈꿨던 2차전 홈경기에서도 0-0에 그치며 2경기 합계 1-2로 밀려 3차 예선 진출에 실패했다.

설상가상 히딩크 감독은 2차예선에서 퀴라소 지휘봉을 잡지 못했다. 지난 5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고국에서 치료를 받으며 현재는 다행히 완치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히딩크의 네덜란드 대표팀 제자였던 파트릭 클루이베르트(45) FC바르셀로나(스페인) 유소년 디렉터가 임시로 퀴라소의 감독대행을 맡았지만 결과를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히딩크 감독의 지도자 커리어는 2010년대 이후로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러시아 대표팀 감독이었던 2010년 남아공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하며 사임한 것을 시작으로 터키 대표팀, 네덜란드 대표팀 2기, 첼시 임시 감독 2기 등을 맡았지만 잇단 성적 부진으로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낙마했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서는 본선 진출에 성공한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직 복귀설이 나왔으나 논란만 남기고 무산됐다.

2019년에는 중국 23세 이하(U-23) 올림픽팀 감독을 맡았다가 무리한 성적을 요구하는 중국축구협회와 갈등을 빚으며 AFC U-23 챔피언십을 불과 4개월 앞두고 경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중국 올림픽팀이나 퀴라소 대표팀은 히딩크의 전성기 시절 이름값을 감안하면 어울리지 않는 팀들이다. 히딩크 감독의 지도자 커리어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귀네슈 감독은 모국 터키 대표팀의 지휘봉을 다시 한 번 잡아 유로2020에 도전했다. 그는 지난 한일월드컵에서 터키를 본선 최고성적인 3위로 이끌었고 당시 히딩크가 이끌었던 한국을 3, 4위전에서 제압하기도 했다. 그해 2002년 유럽축구연맹 올해의 감독상까지 수상했다. 이후에는 K리그 FC서울의 감독직(2007-09)을 맡아 기성용-이청용-박주영 등을 지도하면서 한국축구와 인연을 이어갔다. 한국축구 국가대표팀의 사령탑 후보로도 몇 차례 거론된 바 있다.

한국을 떠난 후에도 부르사스포르-베식타슈 등 자국 클럽들의 지휘봉을 잡으며 성공적인 지도자 경력을 이어가던 귀네슈 감독은 지난 2019년 무려 17년 만에 다시 한번 조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귀네슈 감독이 이끄는 터키는 유럽선수권 대회 예선에서 월드컵 우승국인 강호 프랑스에 1승 1무로 선전하며 본선진출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터키는 이번 대회에서 이탈리아-웨일스-스위스에 함께 A조에 편성되며 가장 주목할 만한 다크호스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본선 결과는 처참했다. 귀네슈의 터키는 이탈리아에 0-3, 웨일스에 0-2, 스위스에 1-3으로 무너며 3전 전패 1득점 8실점, 조 최하위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유로 본선 역사상 전패로 승점 없이 대회를 마친 경우는 총 11차례가 있었고 이중 터키는 2020 덴마크(0득점 8실점), 유로 2004 불가리아(1득점 9실점), 유로 2012 아일랜드(1득점 9실점), 유로 1984 유고슬라비아(2득점 10실점)에 이어 5번째로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터키는 젊은 팀의 한계를 드러냈다. 귀네슈 감독은 터키 지휘봉을 잡은 이후 과감한 세대교체를 단행했지만 본선에서는 경험 부족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조별리그 최다골을 넣은 센크 토순이 부상으로 낙마하며 공격력이 급락했고, 유로 최종엔트리를 발표를 코앞에 두고 A매치 데뷔전을 치른 4명의 선수가 새롭게 합류하는 등 선수단 구성도 크게 변했다.

결과적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유로2020 본선이 1년 밀린 게 터키에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 터키는 조별리그 내내 전반에 그런대로 잘버티다가 후반에 집중력 저하와 감정조절 실패로 자멸하는 양상을 반복했다. 하지만 귀네슈 감독은 "성적에 대한 비판을 인정한다"면서도 사퇴 여론을 일축하며 카타르월드컵 본선행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이다.

또한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을 이끈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최근 자국 네덜란드리그 페예노르트 감독직에 사임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위트레흐트와 유럽클럽대항전 플레이오프에서 2-0 승리로 팀에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티켓을 안긴 뒤 예정된 대로 지휘봉을 내려놨다. 지난 시즌 네덜란드리그 최고령 지도자였던 아드보카트 감독은 페예노르트를 떠나며 지도자 경력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동안 몇 차례 은퇴와 복귀를 거듭 번복해왔던 그였던 만큼 향후 행보는 더 지켜봐야한다.

고령의 나이에도 현장에서 축구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백전노장들의 모습은 국내 축구팬들에게도 추억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비록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데는 실패했지만, 결과를 떠나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 자체가 승부사들에게는 가장 큰 축복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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