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수입 경로가 다양하지 않았던 90년대까지만 해도 극장에서 접할 수 있는 영화는 한국, 미국, 홍콩 정도로 한정돼 있었다. 가끔 유럽 영화가 소개되기도 했지만 <레옹>이나 <시네마천국>, <인생은 아름다워>같은 소수의 영화들 외에는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 일쑤였다. 특히 2부에 걸쳐 제작된 프랑스 영화 <마농의 샘>은 4시간에 육박하는 런닝 타임 때문에 관객들이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그럼에도 서울관객 24만을 동원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물리적인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대만에서 만들어지는 영화 역시 국내 관객들에게는 정서적으로 낯설게 다가왔다. 스타들이 많고 볼거리 가득한 홍콩 영화에 비해 대만 영화는 지루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실제로 왕조현, 금성무 등 대만 출신 배우들은 주로 홍콩에서 활동했다). 물론 이안 감독 같은 세계적인 거장이 배출되기도 했지만 한국 관객들이 이안 감독의 영화에 주목한 것은 그가 할리우드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든 후부터였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면서 대만 영화들이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영원한 여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같은 대만표 멜로 영화들이 대중들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특히 지난 2016년 5월에 개봉한 <나의 소녀시대>는 40만 관객을 돌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한국 관객들이 대만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만영화 최초로 재개봉까지 된 판타지 멜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그 시작이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대만 영화로는 최초로 7년 만에 국내에서 재개봉되기도 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대만 영화로는 최초로 7년 만에 국내에서 재개봉되기도 했다. ⓒ (주)엔케이컨텐츠

 
대만이 낳은 중화권 최고의 슈퍼스타 

주걸륜이 금성무나 왕조현, 임청하를 능가하는 대만 출신 최고의 배우는 아닐지 몰라도 대만이 낳은 최고의 엔터테이너인 것은 분명하다. 중화권에서 A급 가수와 배우로 사랑 받은 주걸륜은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에도 진출해 태평양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했다. 주걸륜이 더욱 대단한 부분은 그가 우연히 작품 하나 잘 만나서 하루 아침에 스타덤에 오른 것이 아니라 탄탄한 기본기와 실력을 갖춘 준비된 엔터테이너라는 점이다.

3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주걸륜은 예술 중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던 클래식 학도였다(이미 중학 시절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고교 시절 우연히 장학우의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아 대중음악에 입문한 주걸륜은 20살을 갓 넘은 나이부터 유덕화, 곽부성 등 유명 스타들의 작곡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2000년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한 주걸륜은 4장의 앨범으로 아시아에서 천 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대만의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2005년 <이니셜D>를 통해 영화에 뛰어든 주걸륜은 2006년 장예모 감독의 <황후화>에서 원설 왕자를 연기하며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까지는 여느 중화권 스타들의 행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주걸륜은 2007년 만28세의 젊은 나이에 자신이 직접 주연과 연출, 각본, 음악을 맡은 영화 한 편을 공개했다. 국내에서 많은 관객들을 대만영화에 입문하게 한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뮤지션의 외도 정도로 여겨진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애틋한 스토리와 감미로운 음악, 그리고 의외의 영상미까지 선보이며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2008년 1월에 개봉해 전국 15만 관객을 모았다. 얼핏 대단치 않은 스코어 같지만 국내에서 크게 유명하지 않았던 주걸륜의 인지도와 대만영화에 대한 편견, 그리고 그에 따른 적은 상영관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흥행성적은 결코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이후 <쿵푸덩크>, <소걸아 : 취권의 창시자>등에 출연하며 중화권 스타로 탄탄대로를 걷던 주걸륜은 2011년 할리우드 메이저영화 <그린호넷>에 출연해 화려한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2015년 1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14세 연하의 혼혈 모델 쿤링과 결혼해 슬하에 딸을 하나 두고 있는 주걸륜은 2016년 또 한 편의 할리우드 영화 <나우 유 씨 미2>에 출연했다. 주걸륜은 2018년 신곡을 발표하며 가수 활동도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다.

오글거림과 설렘의 경계를 극복하라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관객들의 연령대나 성별에 따라 호불호가 비교적 크게 나뉘는 작품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관객들의 연령대나 성별에 따라 호불호가 비교적 크게 나뉘는 작품이다. ⓒ (주)엔케이컨텐츠

 
슈퍼 히어로 영화를 볼 때 통쾌함과 유치함 사이에서 오는 간극을 극복해야 하는 것처럼 대만의 멜로 영화를 볼 때도 오글거림과 설레는 감정 사이에서 오는 간극을 잘 견뎌야 한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치한 사랑타령 영화와 첫사랑의 설렘이 가득한 애틋한 영화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역시 오글거림을 이겨내고 이야기에 빠져든다면 달달한 대만 멜로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피아노를 전공하는 전학생 샹륜(주걸륜 분)이 신비로운 피아노 연주가 들려오는 철거 직전의 음악실에서 만난 여학생 샤오위(계륜미 분)와 나누는 풋풋한 사랑이야기다. 한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샹륜을 보며 "한 손으로 치는 걸 좋아하나 봐?"라고 묻는 샤오위의 질문에 지긋이 미소를 지으며 "다른 손으로는 네 손을 잡아야 하니까"라고 대답하는 샹륜의 대사가 거슬리지 않는다면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볼 자격은 충분하다.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두 주인공을 이어주고 멜로 감성을 더욱 극대화해 주는 장치는 바로 음악이다. 특히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피아노 배틀'은 영화 내용과 별개로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타임루프 멜로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판타지 요소가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샹륜과 샤오위의 수정액 대화 장면이다. 샤오위가 남긴 "난 널 사랑해. 너도 날 사랑하니?"라는 대사도 극적이지만 무엇보다 샹륜이 말라버린 수정액을 흔들어가며 힘겹게 하트를 그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샹륜이 사는 세상에서 샤오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개봉 당시 국내에서 큰 흥행을 하지 못했던 <말할 수 없는 비밀>은 훗날 명작으로 재평가 받으며 다시 보기 열풍이 불었다. 모 네티즌은 '하늘에 있는 별을 전부 따다가 평점으로 주고 싶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결국 <말할 수 없는 비밀>은 2015년 5월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됐고 같은 해 블루레이도 발매됐다. DVD와 블루레이에는 OST '시크릿'의 악보가 들어 있으니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라면 '시크릿'을 빨리 연주해 시간여행에 도전해 보자.

대만의 국민 첫사랑 '원조 단발좌' 계륜미
 
 계륜미(왼쪽)는 매력적인 단발머리와 청순하고도 귀여운 이미지로 대만의 '국민첫사랑'으로 등극했다.

계륜미(왼쪽)는 매력적인 단발머리와 청순하고도 귀여운 이미지로 대만의 '국민첫사랑'으로 등극했다. ⓒ (주)엔케이컨텐츠

 
지난 2012년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가 전국 400만 관객을 모으며 크게 히트했을 때 가장 이익을 본 곳은 제작사도 배급사도 아닌 주인공 수지의 소속사 JYP 엔터테인먼트였다. 걸그룹 미스에이의 예쁜 막내에 불과했던 수지는 <건축학개론>을 통해 일약 '국민 첫사랑'으로 떠올랐고 예능과 CF, 드라마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건축학개론>에 수지가 있었다면 <말할 수 없는 비밀>에는 '원조 단발좌' 계륜미가 있었다.

지난 2000년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해 드라마와 CF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계륜미는 2002년 <남색대문>을 통해 영화에 데뷔했다. 이후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음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계륜미는 2007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통해 일약 대만의 청순여신으로 떠올랐다.

특히 샤오위가 '시크릿' 악보 뒷장에 "다신 널 만나지 못할지라도 혹은 네가 날 잊게 될지라도 한가지 비밀만은 말해주고 싶어 난 널 사랑해"라고 쓴 편지는 많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통해 스타로 떠오른 계륜미는 2012년 서극감독의 <용문비갑>으로 홍콩금장상과 아시아 필름 어워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2013년에는 <여친남친>으로 금마장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계륜미 외에도 소녀 칭이 역의 증개현은 서브 주인공 역할로 스토리에 결정적인 개입을 하진 못했지만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데뷔작이었던 증개현은 대만과 홍콩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2012년 <제삼개원망>을 끝으로 활동 소식이 없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대만영화 주걸륜 계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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