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마우스>의 한 장면

드라마 <마우스>의 한 장면 ⓒ tvN

 
이승기에게는 이른바 '엄친아', '바른생활 청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는 10대 시절 연예계에 뛰어들어 가수, 배우, 예능을 넘나들며 큰 성공을 거둔 만능 엔터테이너로 자리잡았다. 스타가 된 이후에도 항상 몸을 사리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적극성과 밝고 겸손한 이미지는 크게 바뀌지 않았고, 이제껏 개인사를 둘러싼 그 어떠한 구설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연예인 자기관리의 표본으로도 꼽힌다.

그런데 이렇게 항상 반듯한 이미지가 '배우로서의 이승기'에게도 마냥 장점으로서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이승기의 드라마-영화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작품의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극중 캐릭터로서 강렬하게 기억되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싸가지 없는 부잣집 2세(찬란한 유산)부터 감당하기 힘든 여자친구를 둔 덕분에 고생길이 열린 순진남(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오늘의 연애), 판타지물의 히어로(화유기, 구가의서), 고독한 첩보원(배가본드)에 이르기까지, 각기 성격도 배경도 장르도 다른 여러 인물들을 연기했음에도, 대중들은 극중 캐릭터보다 자연인 이승기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이승기가 아무리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나쁜 남자인 척하고, 화려한 액션을 선보여도 대중들은 < 1박2일 >, <집사부일체> 등의 예능에서 보여준 '바르고 선한 청년', '귀여운 허당' 이승기의 이미지를 완전히 떼어내고 극중 인물만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tvN 수목드라마 <마우스>(극본 최란/연출 최준배)에 이승기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이러한 고정관념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연쇄살인을 둘러싼 인간헌터 추적극을 표방한 <마우스>는 지금까지 이승기의 출연작을 통틀어 가장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사이코패스, 살인, 반전 등 강렬하고 자극적인 19금 소재가 넘쳐나는 이 작품에 이승기가 주연으로 출연하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배우의 이미지와는 다소 맞지 않는 미스 캐스팅이라는 의구심도 있었다.

<마우스>의 초반부, 정의감 넘치고 친절한 모범 순경 정바름의 모습은 배우 이승기가 그동안 쌓아왔던 반듯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하게 착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던 정바름은 어느 날 사이코패스를 쫓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수상한 일을 잇달아 겪게 되고, 그의 인생 자체가 송두리째 바뀐다.

드라마 중반까지 정바름은 뇌수술을 받은 이후 범죄자의 전두엽을 이식받고 점차 살인 본능에 눈을 뜨는 것처럼 묘사된다. 정바름은 자신의 위험하고 특별한 능력을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뒤쫓는데 이용하면서 전형적인 히어로의 행보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우스>의 반전은 정바름이 원래부터 진짜 사이코패스이자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인 '프레데터'였다는 것이다. 정바름이 불현듯 떠오른 살인의 기억 모두가 자신의 과거 행각이었음을 각성하며 충격에 휩싸이던 그 순간은, '이승기한테 사이코패스 살인마같은 역할이 어울릴 리가 없잖아'라고 생각했을 시청자들의 허를 찌른 순간이기도 했다. 
 
 tvN 드라마 '마우스'의 한 장면.

tvN 드라마 '마우스'의 한 장면. ⓒ CJ ENM

 
정바름은 뒤늦게 '인간의 감정을 찾게 된 사이코패스'라는 이른바 연쇄살인마의 클리셰를 깨는 캐릭터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다중적인 인격은 물론 선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심경의 변화까지 드러내야하는 캐릭터이기에 연기 난이도가 높다. 만일 이승기가 처음부터 눈에 잔뜩 힘을 주고 프레데터로의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면 오히려 시청자들이 몰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 종영한 범죄스릴러 <괴물>은 의도적으로 주인공 이동식(신하균)을 초반 진짜 살인범인지 아니면 피해자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게 설정했다. 조커처럼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의심하는 이들을 농락하는 이동식의 모습은 광기어린 연기에 능한 배우 신하균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마우스>는 이와 비슷하지만 정반대로 대중들이 생각하는 이승기의 선한 이미지를 영리하게 역이용했다는 게 차이점이다.

누구보다 모범적인 이미지와 선한 눈빛을 지닌 이승기였기에, 그가 연기하는 정바름의 입장에 몰입해 스토리를 따라가던 시청자들은 중후반부 정바름의 진실이 드러나는 반전에 덩달아 강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처럼, 잔혹한 살인마도 어쩌면 우리 일상에서는 정바름같은 선한 표정을 짓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을 일깨워주며 더욱 현실적인 공포감을 선사한 것이다. 

이승기는 정바름 캐릭터를 통하여 자신이 배우로서 한 단계 진화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전반부의 순경 정바름과 후반부의 프레데터 정바름은 같은 배우가 연기하고 있음에도 눈빛과 발성, 호흡 등에서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단지 급격한 반전 하나에만 기댄 것이 아니라 극중 서사에 따라 정바름이 보여주는 감정의 변화를 통하여 치밀하고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선한 미소를 드리운 초반부의 착한 순경에서, 뇌 이식 후 이상 증세를 겪으며 혼란을 느끼는 모습,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잔혹한 프레데터로서의 본색이 드러난 회상 장면, 그리고 모든 기억을 되찾고 보통 사람의 감정을 깨닫게 된 후 죄책감과 고통, 후회를 느끼며 번민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승기의 열연은 정바름이라는 캐릭터에 입체성과 몰입감을 더하는 데 일조한다.
 
 드라마 <마우스>의 한 장면

드라마 <마우스>의 한 장면 ⓒ tvN

 
이승기에게 <마우스>는 연기 경력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로맨스, 액션, 코믹 등 여러 장르에 도전했던 이승기지만, 그간 맡았던 배역 중 가장 이미지상의 괴리가 큰 사이코패스 역할에 도전하면서도 기존의 살인마 캐릭터와는 또 다르게 선악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자신만의 '다크 히어로' 캐릭터로 해석해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다. <마우스> 제작발표회에서 보여준 "내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독보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는 이승기의 자신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배우가 무조건 기존의 이미지와 다른 연기를 한다고 해서 변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기존의 이미지를 활용하면서도 대중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모습도 개연성 있게 살려내야 한다. 이승기는 <마우스>를 통해 영리한 이미지 전복의 모범사례를 보여주며 배우로서 한 단계 더 진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우스 이승기 프레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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