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같은 계급끼리 내무생활을 하는 등 군대 내 폭력이 과거보다 많이 줄었다곤 하지만 90년대 군번까지만 해도 군복무 시절 선임병의 폭력이나 가혹행위에 시달린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들로 트집을 잡아 폭력을 행사하는 선임병들을 보며 후임들은 대부분 속으로 이렇게 다짐한다. "내가 선임이 되면 지금 있는 부대 내 부조리들 싹 다 뜯어 고친다"고.

하지만 후임병들이 선임병이 된다 해도 부대의 환경은 그들이 당했던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선임병들이 폭력을 행사하며 군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 후임병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그토록 싫어했던 선임병들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당했던 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 감정을 더해 자신의 후임병들에게 똑같이 폭력을 행사하곤 한다.

이런 부조리는 비단 군대 뿐 아니라 학교나 운동부 등 선·후배 관계가 뚜렷한 단체일수록 긴 시간 동안 이어진다. 어제의 피해자들이 오늘의 가해자가 되면서 또 다른 '미래의 가해자'가 될 지도 모르는 피해자들을 만드는 것이다.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감초 연기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이문식이 주연으로 출연한 몇 안 되는 영화 <구타유발자들> 역시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풍자한 작품이다.
 
 <구타유발자들>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잘 짜여진 이야기 구도에도 흥행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구타유발자들>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잘 짜여진 이야기 구도에도 흥행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 프라임엔터테인먼트

 
충무로 대표 감초배우의 짧았던 주연 나들이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이문식은 대학졸업 후 극단 '한양 레퍼토리'에서 연극배우 생활을 이어 나갔다. 1995년 박중훈 주연의 <돈을 갖고 튀어라>로 영화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이문식은 여러 영화에서 조·단역을 전전하다가 2002년 <공공의 적>에서 잔인하고도 코믹한 불법주류업자 역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당시 이문식의 극중 이름은 이안수였지만 강철중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를 '산수'로 기억한다).

이후 <일단 뛰어>와 <라이터를 켜라>, <오 브라더스>, <황산벌> 등으로 얼굴을 알린 이문식은 2004년 <범죄의 재구성>에서 마약중독자 얼매를 연기하며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유해진과 함께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조연배우로 화동하던 이문식은 코믹하면서도 연민이 느껴지는 연기로 오직 이문식만 가능한 연기 영역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문식의 캐릭터를 이용해 영화를 만들려는 제작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문식은 첫 주연작인 <마파도>가 전국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주연으로 가능성을 인정 받았다. 그리고 드라마 <101번째 프로포즈>와 영화 <공필두>, <구타 유발자들>, <플라이 대디>, <마을금고 연쇄습격사건>에 잇따라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하지만 이문식이 주연을 맡은 영화들은 하나같이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고 드라마는 조기종영의 아픔을 남겼다. 그리고 이문식의 짧았던 주연배우 생활도 그렇게 마무리됐다.

비록 주연배우로는 경쟁력이 약해졌지만 배우 이문식의 가치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이문식은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죽방 역을 맡아 고도를 연기한 류담과 함께 개그콤비를 결성해 많은 사랑을 받았고 2010년에는 <자이언트>에서 이강모(이범수 분)의 친구 박소태 역으로 열연을 펼쳤다. <기황후>의 환관 방신우와 <미스터백>의 수행비서 성경배도 빼놓을 수 없는 이문식의 대표캐릭터다. 

이문식은 지난 2019년 <열혈사제>에서 사이비종교 매각교 교주이자 지역 카르텔 일원인 기용문을 연기하며 특유의 능청스런 악역 연기를 선보였다. 지난 9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낙원의 밤>에서는 조직 폭력배들을 중재하는 비리 공무원을 연기하며 평소 소탈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선보이기도 했다. 배역을 위해 생니발치까지 마다하지 않는 이문식은 여전히 뜨거운 연기열정을 가진 '천상 배우'다.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는 따로 있지 않았다
 
 <구타유발자들>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선역과 악역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구타유발자들>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선역과 악역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 프라임엔터테인먼트

 
<구타유발자들>은 2004년 영화 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수상작을 각색해 제작한 작품이다. 영진위는 매년 영화발전과 작가발굴을 위해 시나리오 공모전을 개최하는데 이 중 몇몇 작품들은 실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박해일, 강혜정 주연의 <연애의 목적>과 김하늘, 강동원 주연의 <그녀를 믿지 마세요>, 900만 관객을 모은 <관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야기가 좋으면 관객들의 몰입이 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구타유발자들> 역시 여러 제작사에서 탐내던 시나리오였지만 안타깝게도 전국 16만 관객에 그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불편한 주제와 신인 감독의 여물지 않은 연출, 흥행에서 검증되지 않은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것이 흥행에 방해요소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타유발자들>은 115분을 투자하기에 아깝지 않은 영화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은 배우들의 호연과 날카로운 주제의식으로 풍부한 영화적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순박한 시골청년과 무서운 동네 형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봉연 역을 맡은 이문식의 연기는 놀랍기 그지 없다. 교수(이병준 분)의 추행을 뿌리치고 도망 나온 인정(차예련 분)을 스쿠터에 태우고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온 봉연은 교수와 인정을 원치 않은 삼겹살 파티에 합류시킨다. 특히 혼자서 오근(오달수 분)이 돼지 잡는 얘기를 꺼내며 낄낄거리다가 한 순간 표정이 돌변하며 주위를 압도하는 연기는 관객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하다.

출연분량은 30분 정도에 불과하지만 문재를 연기한 한석규도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며 명불허전의 연기력을 과시했다. 초반에 교수와 잠시 마찰을 보인 뒤 1시간 넘게 등장하지 않던 문재는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재등장해 엄청난 아우라를 발산한다. 특히 봉연을 마구 구타하면서 "때린 사람은 경찰이 됐어요 흐흐흐~~ 근데 맞던 놈은 아직도 또 맞지"라며 야만인의 본색을 드러내는 장면이 단연 압권이다.

<구타유발자들>은 폭력의 대물림에 관한 영화다. 학창시절 문재에게 괴롭힘을 당한 봉연은 그의 동생 현재(김시후 분)를 괴롭힘으로써 과거의 한(?)을 풀려 했다. 하지만 봉연은 뒤늦게 등장한 문재에게 똑같이 당하고 폭력의 근원인 문재 역시 오근의 쥐약을 마약인줄 알고 먹었다가 허무한 최후를 맞는다. 다만 <구타유발자들>은 관객들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내용을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하면서 흥행에서는 썩 재미를 보지 못했다.

<구타유발자들>의 발견, 다재다능 이병준
 
 이병준(오른쪽)은 제자를 노리는 변태성악교수 역을 통해 10여 년 만에 영화계로 복귀해 호연을 펼쳤다.

이병준(오른쪽)은 제자를 노리는 변태성악교수 역을 통해 10여 년 만에 영화계로 복귀해 호연을 펼쳤다. ⓒ 프라임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의 인지도 순서로 엔딩 크래딧에는 한석규와 이문식, 오달수의 순서로 이름이 올라가지만 <구타유발자들>은 시골로 야외수업(?)을 온 교수와 제자가 독특한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따라서 영화는 마치 불륜처럼 보이는 교수와 젊은 제자가 외제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해 소란이나 에피소드라 하기엔 너무나 큰 일을 겪은 두 사람이 견인차에 끌린 채 반파된 외제차를 타고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국가대표 축구경기에서 애국가를 부를 정도로 명망 높은 성악과 교수는 사실 어린 제자를 겁탈하려는 검은 속내를 가진 인물이다. 교수는 인정을 으쓱한 곳으로 데려와 나쁜 짓을 하려 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오근에게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얻어 맞으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진짜 성악가라 해도 믿을 만큼 중저음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폭력 앞에서는 쉽게 꼬리를 내린다.

이병준은 주로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다가 <구타유발자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렸다. 이후 영화 <복면달호>의 나태송과 드라마 <공부의 신>의 앤써니 양, <시크릿가든>의 박봉호 이사 등을 연기하며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구타유발자들>에서 변태교수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한 이병준은 실제로도 백제예술대학 뮤지컬학과 겸임교수와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외래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여고괴담4>에서 초아 역을 맡았던 차예련은 <구타 유발자들>에서 교수님 말씀 잘 들었다가 험한 꼴을 당하는 뮤지컬 배우 지망생 인정 역을 맡았다. <여고괴담> 동기인 김옥빈이나 서지혜가 활동이 뜸할 때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차예련은 <로열패밀리>와 <화려한 유혹>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지난 2017년 <화려한 유혹>을 통해 만난 배우 주상욱과 결혼한 차예련은 현재 슬하에 딸 한 명을 두고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구타유발자들 이문식 한석규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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