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가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기 위해 보다 많은 기록들을 메이저리그 공식 기록으로 반영하기로 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6일(현지시간) 니그로리그의 선수 기록들을 공식 기록으로 인정해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리그는 1876년에 출범한 내셔널리그와 1901년에 출범한 아메리칸리그다. 두 리그가 메이저리그로 합쳐지고 각 리그의 챔피언들이 대결하는 월드 시리즈를 시작한 시점은 1903년이었다. 흑인 선수가 메이저리그 경기에 공식 출전한 것은 1947년이 처음이었다.

물론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도 서로를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1904년에는 내셔널리그 챔피언이었던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아메리칸리그 팀과 대결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열렸던 월드 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던 시즌은 바로 이 때와 선수노조의 총파업이 있었던 1994년뿐이다.

메이저리그에 가지 못했던 흑인들의 니그로리그

베이브 루스, 월터 존슨, 사이 영, 조 디마지오, 루 게릭 등 미국 야구의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은 대부분 백인 선수들이었다. 재키 로빈슨이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 경기에 데뷔하기 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흑인 선수가 풀 타임 시즌을 치르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가 생기기 전에도 흑인 사회에서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팀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생겼다. 메이저리그에서 정식으로 풀 타임을 치른 최초의 흑인 선수는 로빈슨이었지만, 로빈슨 전에도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려던 흑인 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 팀인 톨리도 블루스타킹스에서 1883년 흑인 선수인 플리트 워커와 웰디 워커를 영입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의 혼혈이었던 두 형제는 각각 미시간 대학교 포수와 오벌린 대학 야수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팀에 합류하여 형인 플리트가 처음으로 연습 경기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예상대로 이 날부터 백인 선수들은 흑인 선수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상대 팀인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에서 플리트가 포수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 경기 보이콧을 선언한 것이다. 결국 플리트는 이 연습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1884년 5월 1일이 되어서야 형인 플리트가 데뷔 경기를 치렀고, 7월 15일에는 동생 웰디도 데뷔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웰디는 5경기만 출전했고, 플리트도 시즌을 마친 뒤 방출됐다. 플리트가 포수 마스크를 쓰는 날 의도적으로 사인을 무시하고 던진 백인 투수들이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결국 흑인들은 1920년 8팀을 시작으로 니그로 내셔널리그를 결성했다. 이후 니그로리그에는 니그로 내셔널리그, 이스턴 컬러드리그(1923년 출범), 니그로 아메리칸리그(1937년 출범) 등이 참여해 무려 7대 리그가 경쟁하는 리그로 그 규모가 커졌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팀들과의 경기는 정식 경기로 인정받지 못했고 순회 경기로만 치러야 했다.

니그로리그 팀들은 각자의 팀들이 독자적으로 쓸 수 있는 야구장도 없어서 큰 도시의 팀들은 메이저리그 팀의 스케줄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야 했을 정도였다. 경기장 대여료는 비쌌고, 경기장에서 판매했던 음식 수익들은 모두 메이저리그 구단으로 돌아갔으니 흥행 대비 수익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비싼 대여료를 지불하면서도 니그로리그 선수들은 메이저리그 경기장의 탈의실이나 샤워 시설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은 임대료와 부수 수익을 챙기고자 니그로리그를 유지하길 원했다. 흑인 차별이 심했던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니그로리그 선수들은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했던 것이다.

물꼬 튼 로빈슨, 메이저리그에 정착한 흑인 선수들

그러다 1945년 여름 당시 다저스의 단장이었던 브랜치 리키가 로빈슨을 영입했다. 로빈슨은 일단 1946년 시즌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뒤 1947년 4월 메이저리그 데뷔 경기를 치렀다. 물론 로빈슨은 풀 타임 메이저리그 선수로 자리잡기 위해 다른 선수들의 노골적인 차별 행위들을 견뎌내야 했다.

내셔널리그에서 로빈슨이 처음으로 풀 타임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었다면, 아메리칸리그 팀으로는 래리 도비가 1947년 7월 데뷔 경기를 치르며 메이저리그 풀 타임 선수로 자리 잡았다. 도비가 데뷔했던 팀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는데, 인디언스는 이후 니그로리그의 에이스였던 사첼 페이지까지 영입하며 1948년 월드 시리즈 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로빈슨과 돈 뉴컴을 영입했던 다저스도 1955년 월드 시리즈 챔피언에 올랐다. 이렇듯 니그로리그 출신의 뛰어난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뉴컴은 투수 최고의 상인 사이 영 상이 처음 제정된 1956년 역사상 첫 사이 영 상의 주인공이 되었다(당시에는 양대 리그 통합으로 1명 수상).

니그로리그에서 주로 뛰던 흑인 선수들이 하나 둘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면서 반대로 니그로리그는 점점 그 규모가 줄었다. 니그로리그는 1951년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고, 이후에도 일부 흑인들만의 팀이 존재하긴 했지만 리그가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팀들도 해체됐다. 니그로리그 출신의 선수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활약하고 은퇴한 선수는 역대 홈런 2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행크 애런(755홈런)이었다.

인정받지 못했던 기록들, 메이저리그의 역사로 인정받다

이후 메이저리그는 1969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 이외의 소규모 리그들에 대한 기록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도 니그로리그의 기록은 정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메이저리그 인종 차별 흑역사로 남았다.

그러나 이후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니그로리그에 대한 연구도 점차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페이지는 1971년 니그로리그 출신으로는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에 따라 메이저리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상징적인 기록들의 주인공도 바뀌게 됐다. 그동안 메이저리그에서는 테드 윌리엄스가 마지막 규정 타석 4할의 주인공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윌리엄스는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1941년 143경기 606타석에 서면서 0.406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마지막 규정 타석 4할의 기록은 조시 깁슨에게 넘어가게 됐다. 깁슨은 니그로리그 소속 팀이었던 홈스테드 그레이스에서 뛰었던 1943년 타율 0.441을 기록했는데, 선수로서의 수명이 짧아질 수 있는 포수로 풀 타임 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 더 놀라웠다.

깁슨은 규정 타석 최고 타율 기록에서도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전까지의 기록은 휴 더피의 1849년 0.440였는데, 깁슨의 1943년 타율 기록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깁슨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메이저리그 데뷔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1947년 1월 20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이후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포수 타이틀은 로이 캄파넬라에게 돌아갔다. 깁슨은 메이저리그에서 1경기도 뛰지 못했음에도 죽은 뒤 1972년 니그로리그 위원회의 추천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깁슨의 후배 포수 캄파넬라 역시 3번의 리그 MVP를 차지하는 등 이름을 남기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유색 인종 인권, 아직 가야 할 길 멀다

이렇게 니그로리그의 기록들은 출범 100년이 되어서야 정식 기록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서 백인이 아닌 유색 인종 선수들에 대한 인권 문제는 아직 많은 숙제가 있다.

현 시대에는 박찬호(은퇴), 노모 히데오(은퇴), 스즈키 이치로(은퇴),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 등 KBO리그나 NPB 출신의 뛰어난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미국 출신 선수들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한국인 선수들도 좋지 않은 사건을 겪은 적이 있다. 1999년 6월 6일 애너하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내야 번트 후 주루 과정에서 에인절스의 투수였던 팀 벨처가 지나치게 강한 태그와 함께 박찬호(당시 다저스)를 도발하는 발언을 했고, 결국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장면으로 남은 난투극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당시 박찬호 7경기 징계 및 벌금).

인종 차별의 색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팀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팀은 니그로리그 출신 투수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다. 인디언스는 팀 이름과 로고(와후 추장) 등에서 인종 차별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인디언스는 2019년부터 유니폼과 팀 로고에서 와후 추장의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이후 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으로 인해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미국 사회에서 더 커졌고, 인디언스는 2020년 12월 공식 발표를 통해 팀 이름도 바꾸기로 했다.

클리블랜드를 연고로한 이 팀이 2021년부터 새롭게 사용할 팀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서 마지막으로 팀 이름을 바꾼 사례로는 2008년 탬파베이 데블레이스가 있다. 

메이저리그가 니그로리그의 기록들을 인정하기로 한 것은 프로 스포츠 사회에서 흑인들을 배제했던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더불어 뒤늦게나마 메이저리그에 참여하게 된 니그로리그 선수들의 본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물론 니그로리그의 기록들은 메이저리그의 기록들과 비교했을 때 체계가 불안정하여 그 기록의 정확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기록 발굴과 연구가 필요하며, 이는 메이저리그에서 차별 요소들을 없애가는 발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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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브랜더/서양사학자/기자/작가/강사/1987.07.24, O/DKU/가톨릭 청년성서모임/지리/교통/야구분석(MLB,KBO)/산업 여러분야/각종 토론회, 전시회/글쓰기/당류/블로거/커피 1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있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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