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남자) 구미호라... 호기심이 동했다. 구미호 하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인간 되기를 갈구했던 암컷 구미호의 슬픈 서사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전설의 고향>에서 몇 명의 배우가 재현했던 그 무시무시한 구미호를 이른다.

무서운 구미호 분장에 그때마다 놀라며, 또 그때마다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무한 생을 누리며 갖은 도섭으로 인간을 거뜬히 제압하던 구미호가 대체 왜 한낱 인간이 되고자 저리도 애쓰는 걸까 하던 의구심 말이다. 아마도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지목한 세계관이 강력하게 작용했을 터인데, 2020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신실하지 못한 사내에 기대 인간이 되고자 했던 암컷 구미호의 전설에 코웃음이라도 치듯, <구미호뎐>의 수컷 구미호는 슈퍼휴먼 막강 초능력자로 등장한다. 그럼 그렇지. 강한 남자 영웅 서사를 지향하는 한국 드라마가 나약한 인간 따위에 믿음을 걸고 하 세월 인간되기를 승인받으려 고진감래하는 인내의 DNA를 수컷 구미호에게 장착시킬 리 만무할 테니 말이다.
 
드라마의 초반은 플래시백을 통해 구미호 이연(이동욱)이 전생의 연인 아음(조보아)을 구하기 위해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처절한 고난을 겪는 서사를 보여준다. 초반 서사는 드라마 주인공으로 왜 수컷 구미호가 등판해야 하는지를 강하게 암시하는데, 이 드라마가 결국 자신의 여자를 구해내기 위해 수컷(남자)이 자신의 모든 걸 거는 구원 서사로 나아갈 것임을 명백히 한다.

이로써 드라마는 처음엔 매우 독특한 듯싶던 수컷 구미호 캐릭터가 자칫 진부의 늪에 빠질 수도 있음을 예고한 셈이다.
 
 
 드라마 <구미효뎐>의 한 장면.

드라마 <구미효뎐>의 한 장면. ⓒ tvN

 
효녀 콤플렉스
 
색다른 수컷 구미호를 표방했으나 익숙한 구원 서사임이 분명한 드라마를 그럼에도 계속 보게 된 건, 아음 혹은 지아의 능동적 캐릭터 때문이었다. 지아는 이연이 비인간임을 눈치채고도 자신의 삶에 일어났던 불가사의한 사건(부모의 실종)의 단초를 캐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대담한 정면 승부를 걸어 절호의 찬스를 잡는다.

이연에게 "나는 너를 기다렸어"라며 비장한 일갈을 던지는 지아의 모습엔 자신의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는 도도함이 출렁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지아의 주체적 결연함은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변질되어 갔다.
 
9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가족사는 참혹하다. 이런 극단의 불행한 가족사는 살아남은 아이에게 매우 큰 상흔을 남긴다. 자신의 잘못으로 이런 불행이 닥친 것이 아님에도, 엄청난 상황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는다. 이렇게라도 자신을 책망하지 않고는 당도한 현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맹렬한 죄의식만이 그나마의 삶을 견인해내는 것이다. 지아 역시 혼자 살아남은 고통스러운 처지지만, 그의 죄의식은 과거형이 아니다. 자신의 부모가 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신념은 자신의 부모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길 누군가를 찾게 만든다. 전생 체험으로 부모를 잃는 경험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아챈 지아는 자신의 삶이 이미 운명에 굴레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그 운명에 일전을 불사할 기세다.
 
그런데 부모를 구하기 위해 신념을 행하는 지아의 결기가 점차 석연치 않아지고 있었다. 몇 백 년 전 왕인 아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뚱이를 거대 악인 이무기에게 내어준 과거의 아음과 현재 실종된 부모를 구하기 위해 또다시 기꺼이 이무기의 제물이 되겠다고 나선 지아는 강렬한 딸의 희생 신화를 불러낸다. 눈먼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제물이 되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그리고 딸이라 버려졌음에도 불가해한 효심을 내장하고 지옥을 능가하는 수난을 겪으며 결국 왕인 아비를 구한 바리데기 말이다.
 
고작 9살에 세상에 홀로 던져진 아이가 목전의 외로움과 슬픔과 공포를 걷어내고 부모를 구하겠다는 집념을 키워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불가해한 지아의 절치부심 집념은 극한 효심의 수난사로 대변되는 딸의 원형인 심청과 바리데기를 가슴 쓰리게 길어 올린다. 드라마는 기억의 결계를 해제한 지아가 무시무시한 앞날을 예고 받고도 부모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할 것임을 확신시킴으로써, 그 옛날 잔혹 동화 속 효녀 연대기의 계보를 지아에게로 잇고 있는 것이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나쁜 신화 속 주인공 딸을 현재로 소환해 내 드라마가 얘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효성 지극한 딸이 자신을 악의 제물로 바치고 부모를 구해내는 희생이 더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설득하려는 것일까.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드라마는 선과 악의 대결로 구미호와 이무기(이태리)의 대립 구도를 심어놓았지만, 결국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혈투에 지아의 몸이 대리전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선(善) 구미호와 악(惡) 이무기의 팽팽한 대립으로 충분히 영웅 서사를 견인할 수 있고, 인간이 탐욕과 위선이 넘실대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용되고 갈등하는가를 진지하게 펼쳐 보일 수도 있었지만, 드라마는 지아(로맨스)를 매개한 구미호와 이무기의 뜬금없는 삼각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선과 악이 팽팽히 대치하며 벌일 긴장감의 한 축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찜찜한 형제애
 
구미호 이연과 이랑(김범)이 전시하는 심리적 갈등 구도 또한 개운치 않다. 이랑의 캐릭터는 심리적 장애 그 자체다. 구미호라고는 하나 신의 격을 가지고 있는 아비와 하등한 인간 어미 사이에 태어난 반인반신 이랑은, 노르딕 신화 속 인물을 복원해 주조한 토르의 이복동생 로키를 대비시킨다.

출생의 열등감을 가지고는 있지만 왕좌를 넘보는 로키에겐 형 토르에게 선선히 밀려나지 않는 야망이 있다. 출생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로는 이랑 역시 로키와 마찬가지지만, 드라마는 이랑을 로키와 같은 욕망의 주체로 세우지 않고 고작 형의 사랑 따위나 갈구하며 영웅의 앞길을 막는 지질한 캐릭터로 전락시킨다.
 
형제인 토르와 로키의 구도가 왕인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왕좌를 놓고 벌이는 대결 구도라면, 이연과 이랑의 구도는 이랑이 질투심에 불타는 연인처럼 이연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좇는 비이성적 브로맨스로 나아가고 있다. 결국 이랑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대리자인 듯한 형 이연의 독점적 사랑이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몇 백 년 생의 대부분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랑이 이연에게 "너한테 난 뭐냐"라며 자신의 존재를 부단히 확인받으려는 심리를,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아이의 상실감이 그 사랑의 부재를 자신을 구해준 형에게로 옮겨 대신 채우려 한다고 우기고 있는 형국인데, 드라마는 과도한 집착 설정으로 이랑의 캐릭터를 싫증나게 만들었다.

로키가 결국 아버지와 형의 거대한 그늘을 벗어나야만 진정한 왕(리더)이 될 수 있듯이, 이랑 역시 아버지의 대리자인 이연을 극복해야만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애초부터 드라마는 이연의 우등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소한 복수심으로 마을을 몰살시킨 망나니 이랑을 대비시키며, 왜 이랑이 아버지의 대리자로 이연을 승인했는지, 어째서 평생을 못난 열등감에 사로잡혀 이연의 사랑을 구걸하는지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했다. 이로써 이랑은 형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묘한 동성애적 감상을 지닌 짜증 나는 캐릭터로 좌초되고, 드라마 초반 이랑이 이연과 대립각을 세우며 키운 긴장감은 허무하게 붕괴되었다.
 
막바지에 다다르며 드라마는 지아의 부모를 현실로 컴백시키고 악의 화신인 이무기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모두는 결국 이연의 연인 지아에 대한 무궁한 사랑과 보잘것없는 인류를 가긍하게 여기는 신의 자비를 내세운 구미호 이연의 영웅성으로 수렴될 전망인데, 이를 구현하기 위해 신 이연과 인간 지아의 사랑은 어떤 맥락으로 나아가 웅숭깊은 사랑을 견인해낼 것인가.
 
지아의 운명 또한 담대한 막바지 타결에 임박해 있다. 드라마는 이무기의 코어 비늘 조각이 지아에게 발현되는 것으로 과거 지아가 이연에게 죽게 된 이유가 반복될 것을 암시하는데, 지아는 어떤 전략으로 과거 무고한 자신의 희생을 복기하지 않고 스스로 다짐한 대로, "목소리와 왕자를 다 갖"는 인어공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지아가 이무기의 비늘을 벗어던지는 것이 단지, 효심을 다하고 이연에게 "내가 지켜줄게"라고 선언했던 책임을 다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애석하다. 이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을 초개처럼 던져 운명이 도발한 싸움에 정면 승부수를 띄운 대담한 주체적 캐릭터 지아를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내게 있어 이 드라마의 초미의 관심사는 무한 생을 누리는 산신 구미호의 '인간 되기' 욕망이다. 불로장생 슈퍼파워 구미호가 대체 왜 보잘것없는 유한한 인간의 삶에 기웃대는가. 종종 인간을 하등한 존재로 무시하기를 서슴지 않는 신 이연이 왜, "딱 한 번만 인간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들로 가득한" 인생을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무시로 휘둘리며 번번이 좌절하는 하찮은 인간 존재를 선망하는 것은 신의 존재방식이 될 수 없는데 말이다. 이연의 눈빛에서 번득, 소멸하지 않고 오래 살아야 하는 존재의 고독과 권태가 훅 끼쳐오기는 했다. 이것이 이유라는 것인가? 드라마는 어물쩍 흐지부지 넘어가지 말고, 이연의 가뭇없는 '인간 되기' 욕망을 납득시켜 주기 바란다. 무한함과 교환하고자 하는 이연의 '인간 되기' 거래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등가로 성립할 수 없는 거래이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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