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극장'에선 처음 또는 다시 볼 만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작품부터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까지 다양하게 다루려고 합니다.[기자말]
 
<시실리 2km> 영화 포스터

▲ <시실리 2km> 영화 포스터 ⓒ ㈜한맥영화,(주)먼데이 엔터테인먼트


수백억에 달하는 조직의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도주하던 석태(권오중 분)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해 시골 마을 시실리에 숨어들었다가 그만 화장실에서 넘어지며 사망한다. 석태의 콧구멍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변 노인(변희봉 분), 학규(김윤석 분) 등 마을 주민들은 탐욕을 드러내며 시체를 벽에 묻어버린다.

조직의 명령을 받고 석태를 뒤쫓던 양이(임창정 분)와 그의 부하들이 휴대폰 위치추적으로 시실리에 도착한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를 차지한 마을 주민들이 석태를 목격한 적 없다고 부인하면서 사건은 점차 미궁에 빠져든다. 조용했던 마을은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양이 일당과 마을 주민들 사이에 한바탕 소란에 휩싸이게 되고 여기에 양이에게 사랑을 느낀 처녀귀신 송이(임은경 분)까지 끼어든다.

2004년은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해다. 2003년 12월 24일 개봉한 <실미도>가 2004년 2월 29일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고 곧이어 공개한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실미도>의 기록을 갱신하며 흥행사를 다시 썼다. 이 외에도 여전히 회자하는 멜로물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늑대의 유혹>이 흥행했고 두 편의 코믹 호러물 <귀신이 산다>와 <시실리 2km>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귀신이 산다>와 <시실리 2km>는 각각 당시 코미디 연기로 주가를 올리던 차승원과 임창정을 앞세웠다. 하지만 화법은 사뭇 달랐다. <투캅스 3>(1998), <주유소 습격사건>(1999), <신라의 달밤>(2001), <광복절 특사>(2002) 등을 잇달아 성공시킨 김상진 감독이 연출한 <귀신이 산다>는 지박령을 소재로 삼아 전반부의 웃음, 후반부의 눈물이란 검증된 전개에 충실했다.

반면에 여러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색즉시공>(2002), <낭만자객>(2003)의 비주얼 수퍼바이저를 담당했던 신예 신정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시실리 2km>는 블랙코미디, 조폭물, 호러, 코미디, 멜로를 뒤섞은 '미친 장르비빔밥(왓챠피디아의 Jay Oh님)'을 선보였다. 그런 탓인지 지금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네이버의 엄지언님)' 영화란 평가마저 받는다.
 
<시실리 2km> 영화의 한 장면

▲ <시실리 2km> 영화의 한 장면 ⓒ ㈜한맥영화,(주)먼데이 엔터테인먼트


<시실리 2km>가 개봉할 무렵에 씨네21에선 두 명의 평자가 20자평을 주었다. 이성욱씨는 "<조용한 가족>만 아니었다면 훨씬 대우받을 깜찍한 호러코미디"라고 평가했다. 황진미씨는 "조폭보다 귀신보다 양민(?)이 더 무섭다는 천기누설"이라고 적었다. 두 개의 20자평은 <시실리 2km>를 단순히 임창정만의 코미디가 아닌, '장르의 혼합'과 '시대의 공기'로 읽는 바로미터가 아닐까 싶다.

신정원 감독은 당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던 황인호 감독이 쓴 <시실리 2km>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코믹 같은데 호러도 있고, 감동적인 부분도 있는 엄청난 '짬뽕'"으로 느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석태의 다이아몬드를 빼앗아 시체를 묻어버리는 초반부는 블랙코미디 영화의 대명사인 <조용한 가족>(1998)에 가깝다. 이후 양이 일당이 마을에 나타나서 벌이는 촌극은 그즈음 유행하던 <달마야 놀자>(2001), <두사부일체>(2001), <가문의 영광>(2002)류 조폭 코미디가 구축한 웃음 공식을 따른다.

그런데 처녀귀신 송이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실리 2km>엔 그 시절 유행하던 <여고괴담>(1998)스러운 호러의 색채가 입혀진다. 2004년엔 <시실리 2km>를 비롯하여 <령>, <인형사>, <분신사바>, <알포인트> 등 귀신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쏟아졌다. 이는 <여고괴담>과 일본 영화 <링>(1998)과 <주온>(2000)이 일으킨 호러 열풍에 기인한다.

<시실리 2km>는 송이와 양이의 로맨스까지 집어넣어 멜로드라마까지 욕심을 부린다. 호러, 코미디, 액션, 판타지, 시대극, 멜로를 거대한 스케일 속에 수렴했던 <이블데드 3- 암흑의 군단>(1992)을 연상케 하는 장르의 혼합이다.
 
<시실리 2km> 영화의 한 장면

▲ <시실리 2km> 영화의 한 장면 ⓒ ㈜한맥영화,(주)먼데이 엔터테인먼트


<시실리 2km>는 <카리스마 탈출기>(2006), <도마뱀>(2006), <두 얼굴의 여친>(2007)의 각본을 쓰고 <오싹한 연애>(2011)와 <몬스터>(2014)의 시나리오, 연출을 맡은 황인호 감독이 썼다. 그는 2014년 씨네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시실리 2km>가 "유치한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라고 밝혔다.

"내가 남양주 외진 데에 산 적이 있다. 살던 동네가 딱 영화 속 시실리 같은 느낌이었다. 어둑어둑한 밤길을 걷는데 문득 호러물을 써야겠단 생각이 들더라. 한국형 귀신을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냥 귀신은 너무 밋밋하지 않나. 만약 그 귀신이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충청도 사람이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다음으론 왜 귀신이 그렇게 됐을까 역으로 생각하니 주변 인물들도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인물들의 사연과 성격도 잡혔다."

<시실리 2km>는 공간과 인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처음엔 평화스럽기만 보이던 마을 시실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공간으로 변한다. 시실리에 처음 도착한 석태가 바라보던 마을 풍경과 마을 사람들에 쫓기던 양이가 본 아득한 낭떠러지는 시실리의 양면성을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時失里)'이며 이탈리아의 마피아로 유명한 '시칠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시실리'는 결국 인간의 내면에 있는 욕망으로 끓어오르는 지옥도를 의미한다.

<시실리 2km>는 인간, 선악, 여귀에 대한 익숙한 관습도 뒤집어버린다. 순수하게만 보이던 마을 사람들은 점차 본색을 드러내며 곡괭이, 낫, 농약분무기 같은 농사기구로 무장해 조폭의 칼과 총을 제압한다. 나쁘리라 여겼던 조폭 양이가 마을 사람들의 욕망에 희생된 귀신 송이의 사연을 이해하고 함께 분노하는 면모를 지녔다. 귀신 송이는 사투리를 쓰는데다 겁까지 많은 존재다. 영화는 마을 사람들, 조폭 양이, 귀신 송이를 통해 조폭과 귀신보다 무서운 건 인간의 탐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와 달리, 황금만능주의를 쫓는 시실리 마을 주민들에겐 IMF 이후 한국 사회가 투영되어 있다. 다이아몬드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마을 주민들과 양이 일당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따른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이란 살벌한 양육강식의 풍경을 오롯이 담았다. 다이아몬드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살육이 자행되는 농촌과 군상은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공동체와 가치관이 송두리째 무너졌음을 반영한 결과다.
 
<시실리 2km> 영화의 한 장면

▲ <시실리 2km> 영화의 한 장면 ⓒ ㈜한맥영화,(주)먼데이 엔터테인먼트


<시실리 2km>는 임창정의 개인기, B무비스러운 재미를 넘어 장르의 혼합과 시대의 공기가 담긴 흥미로운 영화다. 안타깝게도 이젠 <시실리 2km> 같은 영화를 만나기 힘들다. 신정원 감독은 신작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2020)의 개봉을 앞두고 자신이 데뷔했던 15년 전만 하더라도 영화의 다양성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모니터링해서 점수를 매기는 통에 천편일률적인 영화만 나온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자유로운 창작을 무시하는 한국 영화의 제작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이런 시스템 하에선 더는 <시실리 2km>, <지구를 지켜라>(2003), <구타유발자들>(2006)처럼 시대를 앞서간 영화가 나오기가 어렵다. 그저 시대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기획 영화만 쏟아질 뿐이다. "한국 영화는 지금 어느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까?" <시실리 2km>가 남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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