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기자말]
 영화 <69세> 메인포스터

영화 <69세> 메인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01.

영화의 시작과 함께 계속되는 암전. 아무런 장면도 뜨지 않는 스크린 너머로 한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뜻 듣기에는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대화 같지만, 여자의 목소리에는 어디엔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고 남자의 음성 속에는 그런 여자에게 추근대는 느낌이 있다. 상영관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 오래 지속되는 검은 화면. 무거운 마음 뒤로 수척한 모습의 한 여성이 등장한다.

69세의 효정(예수정 분)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간호조무사 중호(김준경 분)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자신에게 가해진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전의 일상을 그대로 따르고자 노력해 보지만 그 날의 추악한 기억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마다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물리치료실의 붉은 온열등, 젊은 남자의 낯선 손길. 일상의 어떤 순간에도 떠오르는 기억에 손이 떨려오자 효정은 책방 주인이자 동거하고 있는 시인 동인(기주봉 분)에게 용기를 내어 사실을 털어놓는다.

"선생님, 아무래도 간호사를 경찰에 신고해야겠어요."

함께 경찰서로 향한 효정과 동인. 하지만 두 사람 앞에 놓인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고소장을 접수하기 위해서 그 끔찍한 기억을 다시금 떠올려야 한다는 사실도 막막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세상이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년에 접어든 두 사람이 사실혼이 아닌 상태로 동거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웃음을 당하고, 60대의 여성이 20대의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스갯거리가 되고 만다. 게다가 경찰에 불려온 중호가 자신의 행동이 폭력이 아닌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자, 담당 형사는 그녀를 치매 환자로까지 의심한다.
 
 영화 <69세> 스틸컷

영화 <69세>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02.

임선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영화 < 69세 >는 성폭행을 당한 노년의 여성이 자신의 존엄을 지켜나가기 위한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전부터 인간의 명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는 감독은 기획 단계에서 우연한 기회에 이 영화의 소재와 관련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존에 성폭행을 다룬 작품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노인 성폭행에 대한 주제를 가진 영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고. 이 작품 < 69세 >를 통해서 한 '여성'에게 '노인'이라는 또 다른 잣대가 드리워진 시기에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통해 자신의 명예와 권리를 회복하는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 셈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 69세 >는 사건의 발생이나 폭행의 과정을 그리기보다는 주인공인 효정이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과 고통을 전달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반응'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과 세상의 편견과 무지로부터 비롯된 시선에 대한 반응, 그리고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나가기 위한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목소리에 대한 반응. 영화는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런 '효정'의 반응을 들여다 본다.

03.

소재가 소재인 만큼 이 영화 < 69세 >는 전체적으로 담담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지만 극의 진행이 늘어지는 편은 아니다. 극을 구성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활용에서 의외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가령, 고소인인 효정의 치매 여부를 묻는 형사의 이야기를 듣고 동인은 최근 그녀의 이상했던 행동들을 떠올린다. 실제로 병원에서 퇴원하고 난 뒤에 효정은 전에 하지 않던 행동들, 치매와 연관 지어 생각할 법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기에 동인 역시 잠시 효정의 기억을 의심한다. 고령인 효정의 나이와 피해자의 트라우마가 결합하며 두 요인이 기억과 맺게 되는 일반적인 상관관계가 이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는 장치에 의한 유도된 방향일 뿐, 같은 시점에서 효정의 행동에는 기억 능력에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는 지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자신의 치약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와 같은 사소한 기억은 물론, 자신이 증거물인 병원복을 어디에 두었는지, 동인이 언제 주례를 맡으러 가야 하는지 같은 특정한 기억까지도 말이다. 두 지점의 단서를 모두 보여주면서도 하나의 방향으로만 이야기를 이끌며 관객들 역시 간접적으로 곡해하는 경험을 잠깐 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다시 활용되며 기억의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영화에 더욱 깊게 뿌리내리게 하는 요소가 된다. 이는 등장시킨 이야기를 중도에 누락시키는 일 없이 잘 매듭짓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속의 거의 모든 장면들이 그렇다.
 
 영화 <69세> 스틸컷

영화 <69세>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04.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무래도 역시 '69세'에 있다. 왜 그녀의 나이가 예순도 아니고 일흔도 아닌, 69세였을까 하는 물음이 아니라, 왜 그냥 '효정'이 아니라 '69세 효정'이어야만 했는가 하는 것. 물론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법원은 젋은 남자가 늙은 여자를 그럴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중호에 대한 구속 영장을 기각하고 만다. 피해자가 '69세 효정'이 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문제는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는 셈이다. 그래서 효정은 이렇게 묻는다. '젊은 여자가 고소인이었으면 그 사람이 잡혀 들어 갔을까요?'라고.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더 등장한다. 효정의 정신과 주치의가 자신을 찾아온 동인에게 물리치료실에 CCTV가 있다고 해도 성폭행 당한 사실을 증명 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 참고로, 이 영화의 배경은 2012년경이다. 성폭력에 대한 매뉴얼이 지금보다 훨씬 미흡했다고 한다. – 이 장면이 끝나자 마자 효정이 자신의 오른손을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훑어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두 장면의 연결은 '69세 효정' 역시 작고 연약한 노인이 아니라 하나의 여성임을 항변한다. 비록, 효정의 손 위에는 세월을 이기지 못한 주름만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녀라고 처음부터 주름이 가득한 손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효정의 물음이 다시 떠오른다. 젊은 여자가 고소인이었다면 가해자가 정말 잡혀 들어갔을까?

05.

영화가 줄곧 따르는 것은 효정의 현재이지만, 이를 떠받치는 주변 인물과 그들의 과거는 이야기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인과 현수(김태훈 분)의 관계는 과거에 자신이 걸어온 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노인 세대의 또다른 현실적 문제를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나이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순간에 대한 선택과 판단이 젊을 때와는 달리 과거의 행적에 따라 판단되고 평가받게 되고 마는 것. 이는 효정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현재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상대적으로 젊은 이들의 행동이 그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 가늠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보는 것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이와 성별, 돈과 명예, 직업과 지위. 살아가면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편견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요소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가해자의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일상에서 무심하게 던져지는 폭력 앞에 피해자들이 매 순간 좌절하게 되는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 영화 속 효정은 그런 모든 종류의 폭력 앞에 무방비한 상태로 던져진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다만,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나아가고자 한다. 처음에는 그런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그녀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며 자신의 모든 순간을 지켜나가는 일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먹먹한 마음으로 따르는 것, 관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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