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바리움>은 삶의 공간을 찾던 커플이 미스터리한 마을의 9호 집에 입주하면서 기이한 경험을 겪고 점점 공포에 빠져들게 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판타지, 공상, 풍자 등이 어우러진 매혹적이고 독특한 비주얼이 영화적 표현의 특징이다. '비바리움'은 관찰, 연구를 목적으로 테라리엄 속에 소동물을 함께 넣어 감상하는 원예 활동을 뜻하는데, 라틴어 원래 의미는 '삶의 공간'이다.

삶이라는 감옥에 갇히다
 
 영화 <비바리움> 스틸 컷.

영화 <비바리움> 스틸 컷.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영화 제목이 중의적이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주제의식이 우러난다. 비바리움은 관찰과 감상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폐쇄회로로 구성되어야 하고, 관찰대상 생명체의 생존이 가능한 조건이 비바리움 안에 만들어져야 한다.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 젬마(이모겐 푸츠)와 톰(제시 아이젠버그)은 비바리움 안에, 인간이 다람쥐나 장수풍뎅이 같은 생명체를 어떤 공간에 넣듯 사실상 동일하게 넣어진다.

젬마와 톰은 비바리움 안에 넣어졌고, 넣어졌다는 사실을 알지만 무슨 이유로 누가 넣었는지는 모른다. 이러한 설정은 오래 전 유행한 실존주의자들의 인식에 맞닿아 있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던져진 존재'로 이해했고 알베르 카뮈 등을 통해 표현되었듯 삶을 던져짐 안에서 감내해야 하는 불가해한 버팀으로 받아들였다. 영화 <비바리움>에 동일한 인식이 전형적으로 반복되었다고 하여도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에게 9호 집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배당되었고, 죽음 말고는 탈출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 결국 영화 <비바리움>의 한 줄 요약이다.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감금되어 관찰되고 사육되며 더군다나 9호 집을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다. 장수풍뎅이나 다람쥐와 같은 운명이지만, 장수풍뎅이나 다람쥐가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그들은 적어도 인식은 할 수 있다는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인식이 결코 운명을 바꿔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차이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실존주의 모델과 영화 <비바리움>이 다른 점은 비바리움이 작동하는 나름의 설명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영화 시작과 함께 새 둥지를 보여주었다면 당연히 영화의 핵심단서가 그 장면에 담겼다고 봐야 한다. 다른 새의 둥지에서 뻐꾸기 부모가 아닌 다른 새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는 '뻐꾸기 새끼'가 단서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뻐꾸기 새끼'는 '보이'에, 뻐꾸기 둥지는 9호 가옥에 해당한다.

젬마와 톰에게 주어진 '보이'는 아들이 아니다. 게다가 '보이'의 성장속도는 어마어마하다. 외계인처럼 느껴지는 이 '보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비바리움과 마찬가지로 '보이'를 어떻게 이해해도 무방하다. 다만 창작자와 수용자가 모두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기 위해선 먼저 창작자의 의도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창작자의 의도가 텍스트의 자기진술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불일치에서도 종종 흥미로운 독법이 생긴다고 할 때 불일치에 대한 과도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행히도 이 영화에서는 창작자의 의도에서 영화 이해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비바리움>이 제시한 기이한 세계관

배급사의 설명에 따르면 <비바리움>이 제시한 기이한 세계관은 감독 로칸 피네건과 각본가 가렛 샌리의 재기발랄한 상상에서 비롯했다. 두 사람은 2008년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작된 부동산 시장 침체가 야기한 아일랜드의 유령 부동산에 주목하였고, "비슷한 모양의 주택 개발이 양자 현상처럼 영원히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호기심을 발동시키게 된다.

이 호기심은 2011년, 아무도 없는 주택 단지에 갇힌 젊은 커플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 영화 <여우들>로 이어진다. 피네건 감독은 여기에다 사회학적이고 철학적인 통찰과 풍자를 결합하면 흥미로운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여 이후 8년에 걸쳐 조금 더 영화적 개연성을 갖춰 마침내 <비바리움>으로 업그레이드한다.

피네건 감독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한다. 나의 판단으로는 이렇게 사실적이면서 황당하고, 흡입력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탄생한 영화 <비바리움>은 피네건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의 질문을 넘어섰다고 본다.

<비바리움>은 현대인이 살아가는 이 사회의 두려운 실상을 조명하지, 현대인의 두려움을 질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미 오래전에 두려워할 능력 혹은 의지 자체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두려워할 능력 또는 의지 자체를 상실한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워할 일이다.
 

영화는 인간이 아니라 사회를 그린다. 물론 그 사회가 인간으로 구성되지만 초점이 인간 너머에 맞춰진다. 비유적으로 죄수가 아니라 감옥을 그린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이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도달하여 탈출하지 못한 마을의 이름 '욘더(yonder)'는 'over there'를 뜻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매우 사실(寫實)적으로 느껴지면서 동시에 비사실적으로도 느껴지는 까닭은 이 'over there'라는 필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화 <비바리움>은 정신착란자의 중얼거림이 아니라 논리적 왜곡이란 정연함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논리적 왜곡이 사실(事實)을, 영화 속의 구름처럼 선명하게 보여주지만, 왜곡은 이질감을 산출한다. 이 이질감은 거리감으로 이어져서 통찰의 여유 혹은 깊이를 도출할 역량을 부여하게 된다.

<비바리움>의 삶은 <시지프의 신화>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결연함으로 무장한 실존의 사투가 아니다. <비바리움>의 삶은 무기력하게 순응하며 꾸역꾸역 '보이'를 키워내는 쾌적한 현대식 감옥이다.

이쯤에서 '보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생각해보자. 당연히 정답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근사치는 있다. 단순무식하게 '보이'와 그의 아버지(?)를 외계인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영화는 밍밍한 스릴로 가득 찬 볼품없는 SF스릴러로 전락하게 된다. 감독의 생각까지 고려한, 문맥상 가장 그럴 듯 하게 보이는 답은 자본 혹은 시장사회이다. 현대인은, 집을 가진 현대인은 거의 대부분 '보이'를 키운다. 영화의 설정처럼 '보이'를 다 키우면 '욘더' 마을에서 탈출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극중 톰처럼 땅이나 파다가 그 집 마당에 묻힐 처지이다. '보이'의 놀라운 성장속도는 자본의 탐욕을 분명하게 은유한다.

'보이'가 소리 지르는 장면에서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떠올리게 되는데, <양철북>의 오스카가 성장을 중단한 것과 정반대로 <비바리움>의 '보이'는 급속성장한다. 이 대비에서도 <비바리움>의 논점은 확실해진다고 하겠다.

"탈출할 수 없는 정신 미로"(Cinematismo), "데이빗 린치 작품보다 구조적이다"(Planet S Magazine), "새로운 SF 공포 하이브리드"(RogerEbert.com) 등 해외 언론의 찬사는 응당 이 영화가 받을 만한 것이지만 약간씩 맥락을 놓친 칭찬 같기는 하다.

<비바리움>은 작가가 본능적으로 이 세계의 비극을, 자본(주의)과 시장사회 시스템에 의한 전면적 인간정복과 지배 혹은 대구(對句)로 인간소멸을 감각적이고 담담하게 표현한 수작이다. 영화 곳곳에 명백하게 또는 은밀하게 넘쳐나는 이야깃거리는 관객의 찾는 재미로 남겨두자.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