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미국영화 직배반대시위 현장

1988년 미국영화 직배반대시위 현장 ⓒ 이수정 제공

 
제도권 내의 주류 영화를 상징하는 충무로는 한국영화운동에서 애증의 공간이었다. 1970년대 후반의 초기 영화운동 성격은 외국영화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는 한국영화에 대한 실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새로운 한국영화를 갈망하는 젊은 감독과 청년영화인들은 기존의 충무로를 바꾸고 싶어했다.
 
새로운 영화를 추구하는 흐름이나 변혁운동 성격의 영화운동의 공통점은 반 충무로였다. 영화운동의 시선에서 충무로는 개혁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8mm/16mm로 만들어진 대부분 영화가 탈 충무로영화를 지향했고, 충무로와의 거리두기는 기본이었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중심이자 주류인 충무로는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충무로를 바꾸기 위해 충무로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피했다. 연대의 대상으로 궤도가 수정된 것은 영화운동의 영역이 확장될 필요성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1990년 계간지 <민족영화> 대담에서 민족영화연구소 이정하(전 영화평론가)는 "충무로는 성찰의 대상이자 연대의 대상이다"라고 선언하며, 한국 주류영화를 상징하는 충무로와의 연대를 강조했다.
 
할리우드 영화 직배반대 투쟁 과정에서 영화운동 진영이 충무로와 연대한 것이었지만, 충무로에 먼저 자리 잡은 젊은 영화인들은 영화운동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을 전후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흐름 속에, 충무로라는 제도권 안의 영화인들과 영화운동 출신들은 하나둘 손을 맞잡게 된다.
 
변재란(영화평론가, 순천향대 교수)의 정의처럼 '한국 영화운동이 충무로를 통해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85년 충무로에 발디딘 영화운동
 
영화운동이 충무로라는 주류 공간으로 전선을 확대할 수 있었던 데는 1980년대 초부터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의식 있는 청년영화인들의 역할이 발판이 됐다. 1970년대 마당극운동을 하다 영화 쪽으로 방향을 바꾼 장선우(감독)가 대표적이었다.
 
1983년 개봉한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솔은> 제작에 참여한 장선우는 1985년 선우완 감독과 <서울황제>(1986)를 공동 연출하는데, 여기에 당시 영화운동에 참여했던 청년영화인들이 연출부로 여럿 함께 한다. 임종재(감독), 김동원(다큐멘터리 감독), 황규덕(감독), 김의석(감독), 정병각(감독), 안동규(제작자) 등이었다.
 
1985년은 영화운동 출신들이 충무로라는 제도권 안에 하나둘 발을 딘던 시기였다. 서울의 각 대학에서 영화서클이 대거 생겨나던 때였고, 서울영화집단이 재편을 통해 운동성이 강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84년 개원한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생들이 졸업하던 때로, 충무로 바깥에 자리했던 영화운동 전선이 제도권 안으로 넓혀지기 시작했다. <서울황제> 제작에 참여했던 임종재(감독), 황규덕(감독), 김의석(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였다. 이들은 졸업과 함께 충무로 현장에서 기획과 조연출 등으로 활동했다.
 
경희대 영화서클 '그림자놀이'를 만든 안동규는 당시 대학 4학년으로 졸업에 앞서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고려대 돌빛 초기 회원이었던 정병각은 "임종재와 함께 장길수 감독 <밤의 열기 속으로> 연출부에 참여한 후, 바로 <서울황제>에 합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황규덕 감독

황규덕 감독 ⓒ 고명욱 촬영감독 제공

 
황규덕(감독, 명지대 교수)은 1980년 한국 영화운동의 출발이었던 서울대 얄라셩 회원 중 처음으로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울대 얄라셩 출신의 경우 송능한(감독)이 형인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의 작업을 돕고 있었기에 비공식적으로는 충무로 활동하던 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시나리오 작가로 처음 이름을 올렸던 영화는 김호선 감독이 연출한 <수렁에서 건진 내 딸 2>(1986)로, 시기적으로 황규덕이 조금 빨랐다.
 
이에 대해 황규덕(감독)은 "당시 분위기에선 충무로 활동을 하는 것이 일종의 변절 혹은 수정주의자 같은 질책감이었다"며 "송능한(감독)의 경우는 형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것이라 전혀 그렇지 않았고, 일종의 자랑거리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얄라셩은 대학 4학년 2학기 끝 무렵에 너무 늦게 노크했었고, 그때 나를 받아주었던 이들은 '우리가 바로 졸업해서 나가는데 뭔가 모임을 만들 테니 너도 같이 해볼래?' 하는 분위기였다"면서 "얄라셩 중 충무로에 제일 먼저 들어갔다기보다 서울영화집단 창립회원 중에서 충무로에 제일 먼저 들어간 것이 맞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충무로에서 밖으로 나간 김동원
 
이들 중 김동원(다큐멘터리 감독)은 결이 조금 달랐다. 재야에서 활동하던 청년영화인들이 충무로라는 제도권으로 영역을 확장 시킬 때, 그는 반대로 충무로에서 경험을 쌓은 후 제도권 밖으로 나가 비디오 독립다큐멘터리를 개척한 특이한 사례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독립다큐멘터리의 대부로 불리기 시작했지만, 첫 출발은 상업영화였다. 1980년대 초반부터 충무로 연출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동원의 전공은 신문방송학이었다. 1978년 서강대학교 졸업 후 군에 입대했던 그는 광주민중항쟁 직후인 1980년 6월 제대한다. 군에 복무하던 시기에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김동원은 "제대할 때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정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약했던 때였다.
 
하지만 1980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입학 후에는 학생운동이 주도하는 학내 시위에 종종 참여하게 된다. 그렇다고 의식 있는 운동권 대학생은 아니었다. "당시 대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군사독재 치하의 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정도였다"는 것이 스스로의 평가다.
 
영화운동과의 연결은 대학원 시기 서울대 얄라셩 출신들이 중심이었던 서울영화집단과 교류하게 되면서였다. 김동원(감독)은 "당시 김홍준(감독)이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센터에 영화를 보러 오면서 서로 아는 사이가 됐고, 이를 통해 서울영화집단을 알게 돼 남영동 사무실에 가기도 했었다"고 회상했다.
 
1989년 홍기선(감독)이 '장산곶매'에서 <오! 꿈의 나라>를 만들 때 단역으로 출연한 것은, 이때 시작된 인연이 바탕이 됐다.
 
 장산곶매의 광주항쟁 영화 <오! 꿈의 나라>에 출연한 김동원 감독

장산곶매의 광주항쟁 영화 <오! 꿈의 나라>에 출연한 김동원 감독 ⓒ 장산곶매 제공

 
1981년 이장호 감독 <바보선언> 연출부 참여는 충무로 상업영화 현장과의 첫 만남이었다. 김동원은 "제대 직후인 1980년 7월 연출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며 "당시 2년 동안의 연봉이 50만 원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학원을 4년 동안 길게 다녔는데, 영화를 계속해야 할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신촌 신선소극장 매니저, 충무로 연출부 등을 오갔다"고 덧붙였다.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 이장호 감독님께 당시 '왜 나를 왜 뽑았냐?'고 물었더니, 감독님이 '대학원생이라고 해서 뽑았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1983년 서강대 영화동아리 영화공동체가 만들어질 때는 대학원생으로서 창립회원으로 동참하게 된다. 반 상근으로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센터 내 미디어 교육센터 연구원으로 일하던 때였는데, 김동원은 "대학원 졸업 후에는 유학을 가기 위해 준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4년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 발표회'(일명 작은영화제) 참석은 전환점이 됐다. 젊은 영화인들을 만나면서 인맥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여기서 알게 된 게 황규덕(감독), 임종재(감독), 김의석(감독, 전 영진위원장), 정성일(감독. 평론가) 등이었다.
 
김동원에 따르면 1984년 한국영화아카데미가 개원할 당시 유현목 감독님으로부터 지원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대학 후배인 김소영(감독)에게 대신 권유해 김소영이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로 입학하게 된다.
 
김동원은 "1985년 충무로로 들어가 하명중 감독의 영화 <태>(1986) 연출부에 참여했고, 여기서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을 처음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장선우 감독의 <서울황제>에도 참여하면서 김동원의 주무대는 충무로가 됐다.
 
김동원이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해 눈을 뜬 것은 고등학교 선배인 임진택과 가까이 지내며 교류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임진택(판소리 명창), 김민기(가수), 장선우(감독) 등과 대학 시절 문화운동을 해 이른바 서울대 딴따라로 불리고 있었다. 김동원은 "이들 중 김민기는 고등학교 때 만난 사이였고, 임진택은 1982년 이후 만나 1985년 대학원 졸업 때까지 어울렸다"고 회상했다.
 
또한 "당시 이들 중 장선우가 막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신촌 신선소극장 매니저일 하는 과정에서 문화패를 끌어들이면 극장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교류하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김동원에 따르면 장선우는 1982년 현진영화사 기획실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흥행영화였던 < ET >를 수입해 배급했는데, 당시 현진영화사는 장선우에게 영화가 흥행하면 감독으로 입봉 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 ET >가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연출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김동원은 "장만철(장선우 본명)이 기획작업에 활용하던 운당여관을 오갔고, 나도 이를 도우러 운당여관을 오가게 됐다"면서 "당시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 구속됐던 재야인사 김지하(시인)가 석방돼 운당여관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고 말했다. 이어 "김지하를 만나러 임진택 등이 자주 찾아왔고, 함께 술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됐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충무로 상업영화를 오가던 그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전환하게된 것은 상계동 철거민들의 현장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김동원은 "당시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센터 소장인 커스틴 신부님이 내게 상계동의 정일우 신부님을 찾아가 가보라고 해서 만났고, 커스틴 신부가 철거민 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아르바이트를 준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때 상계동에 뛰어들게 되면서 김동원의 진로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바뀌게 된다. 그는 1986년 상계동 철거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불후의 명작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했다. 1987년 상계동 철거민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할 때도 함께 지내면서 1987년 6월항쟁 상징이었던 명동성당의 농성을 카메라에 담게 된다.
 
연극에서 영화로 옮겨온 이춘연
 
영화운동이 충무로 활동을 시작했던 1985년~1986년의 또 다른 특징은 영화계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충무로 2.0의 시작이었다. 1986년 영화법 개정이 전환점이 됐다. 제작 자율화가 되면서 기획력을 앞세운 젊은 영화인들이 충무로 변화의 주축으로 떠오른 것이다.
 
한국영화에서 기획자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젊은 기획자들은 기존 충무로라는 구조 안에서 새로운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충무로 세대교체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70년대 영상시대 동인으로 새로운 영화를 추구했던 이장호 감독과 문화운동 출신 장선우 감독이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영화운동 출신들을 품는 역할을 했다면, 젊은 기획자들은 영화운동 출신들과 힘을 합쳐 한국영화의 개혁을 추동했다.
 
 한국영화기획실모임에서 함께 활동했던 안동규(오른쪽) 권영락(왼쪽 두번째) 등 후배들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 이춘연(오른쪽 두번째)

한국영화기획실모임에서 함께 활동했던 안동규(오른쪽) 권영락(왼쪽 두번째) 등 후배들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 이춘연(오른쪽 두번째) ⓒ 이춘연 제공

 
여기서 등장하는 대표적 인물이 이춘연(제작자, 2021년 작고)이다. 1970년대 대학을 졸업한 이춘연은 연극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기획자였다. 대학 졸업 후 1976년 극단 동인무대 창립 공연 <문밖에서>를 연출했고, 같은 해 현대극단이 창단됐을 때 연극 기획과 배우로 활동했다.
 
이춘연은 "1970년대 워크숍을 안 하고 방학 때 공연을 만들어서 소극장과 다방에서도 공연을 했다"면서, "이때 공연한 작품들이 <빠담빠담빠담>, <햄릿>,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이었다"고 말했다. 큰 틀에서 문화운동으로서 소극장 운동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연극에서 영화 쪽으로 옮긴 계기는 당시 현대극단과 영화제작사인 화천공사 대표의 부인이 경기여고 동창으로 연결고리가 된 덕분이었다. 화천공사 대표의 제안을 받아 1983년 연극판을 떠나 화천공사에 입사한다. 이때 기획한 작품이 이장호 감독의 <과부춤>과 <바보선언>이다.
 
화천공사 사장의 후원으로 이춘연의 친구인 장영일(감독)은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과 <과부춤>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장영일 감독은 이후 <왜 불러>를 연출했는데, 황규덕(감독)은 기획으로 김의석(감독, 전 영진위원장)은 조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다만 황규덕(감독)은 "이름은 그렇게 올랐으나 기획을 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자발적 의사로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화천공사가 이미 벌여놓은 프로젝트들 중 하나였고, 커다랗게 역할을 발휘할 상황도 아니었다"면서 "김의석(감독)이 당시 연출부 막내로 참여한 것은 맞다"고 덧붙였다.
 
1985년 이춘연은 1년 5개월의 화천공사 생활을 끝내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동문인 김유진 김덕남 등과 함께 대진엔터프라이즈를 창립해 김유진이 연출한 <영웅연가>를 제작한다. 영화법 개정을 통한 제작 자율화 덕에 새로운 제작사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대진엔터프라이즈는 황기성사단과 하명중영화제작소에 이은 3번째 신생 제작사였다.
 
이때 이춘연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황규덕(감독)이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과 함께 화천공사 기획실장을 맡은 것인데,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84년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생으로 입학해 한 해 뒤 1985년 졸업하고 고민 중 첫발을 내디딘 곳이 영화 연출부가 아닌 영화제작사였다. 비영화과 출신으로서 영화계를 부감으로 실체를 한 번 보고 난 후 연출부로 내려가서 맨땅에 헤딩하는 세월을 길게 보내겠다는 태도였다.
 
당시 아주 굴지의 큰 영화사인 화천공사 기획실에 들어가서 일 좀 배워보려고 서류 냈는데. 들어가보니 아무도 없는 커다란 조직의 기획실장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이춘연(제작자)의 후임이었다. 그곳에서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 6개를 떠맡아서 8개월 정도 혹사당하다가 결국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온 거다."

 
같은 시기 서울대 영화서클 얄라셩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이봉원(감독)은 명보극장 출신으로 태멘과 푸른극장을 운영했던 기획자 김정률과 함께 <엘리베이터 올라타기>를 제작했다. 얄라셩 이후 서울영화집단에서 영화운동을 하던 홍기선(감독)은 <엘리베이터 올라타기>에 참여하면서 충무로 현장을 경험한다. 이봉원(감독)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홍기선과 최사규는 조감독이었다.
 
당시 이태원이라는 예명을 썼던 이봉원의 <엘리베이터 올라타기>는 검열로 인해 심한 피해를 본 작품이었다. 이봉원은 "미국의 경기가 나빠졌다는 대사, 호텔에 게양된 성조기의 클로즈업 컷 등이 반미적인 내용이라고 검열에 걸려 22군데가 삭제당했고, 방송 광고가 금지될 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은 영화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홍기선이 1986년 '파랑새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엘리베이터 올라타기> 조감독을 했던 것으로 인해 이봉원은 공안기관에 불려다니며 홍기선의 배후 아니냐는 추궁을 받게 된다.
 
대학영화 지원의 숨은 공신 권영락
 
충무로에서 영화운동을 지원했던 또 다른 핵심인물 중 하나는 권영락(제작자)이었다. 서울예대 조교 출신 권영락은 1984년 작은영화제에 참여한 이후 영화운동이 충무로로 전선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조력자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그는 1982년 홍기선과 박광수 등이 서울영화집단을 만들었을 때부터 꾸준히 연대했고, 대학영화운동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준 숨은 공신이었다.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1985년 이후 만들어진 각 대학 영화서클이 다양한 영화제를 개최하는 데 있어, 권영락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이다. 초기 대학영화운동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그의 폭넓은 활동은 대학영화운동 성장에 디딤돌이었다.
 
 1987년 여름 서울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 출신 영화인들의 MT에 함께한 권영락. 앞줄 왼쪽부터 김인수, 문원립, 신한섭, 김신희, (김홍준 딸 안고 있는)박광수, 홍기선. 뒷줄 왼쪽부터 권영락, 명혜원(가수. 권영락 부인), 김정희, 김명숙(김홍준 부인), 김홍준.

1987년 여름 서울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 출신 영화인들의 MT에 함께한 권영락. 앞줄 왼쪽부터 김인수, 문원립, 신한섭, 김신희, (김홍준 딸 안고 있는)박광수, 홍기선. 뒷줄 왼쪽부터 권영락, 명혜원(가수. 권영락 부인), 김정희, 김명숙(김홍준 부인), 김홍준. ⓒ 권영락 제공

 
권영락은 "외국어대 영화서클 '울림'의 김태균(감독)과 장기철(감독)이 주도해 외대 안에서 칸영화제 작품들을 상영할 때 기술적 지원 역할을 했다"면서 "당시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은 설립자인 유치진 작가의 아들 유덕형 학장이 미국을 통해 다양한 비디오와 장비를 들여와 갖춰 놓고 있던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이를 조교였던 권영락이 관리하면서 서울예대가 다른 대학의 영화서클에 장비를 지원해주고 대학에서 자체 영화제를 할 수 있도록 돕게 된 것이었다. 당시 이화여대 학생들은 첫 영화 <시발>을 만들며 영화서클 '누에'를 창립했는데, 서울예전의 16mm 장비를 대여해 주고 사용법을 가르쳐 준 것이 바로 권영락이었다.
 
권영락은 충무로 입문이 이르다는 점이 특별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78년 제작된 이원세 감독의 <속 엄마없는 하늘아래>(1979) 연출부 막내로 충무로에 첫발을 디뎠는데, "또래 중 충무로 입성이 가장 빨랐다"고 말했다.
 
1년 뒤 대학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당시 촬영 현장에 있던 영화인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영화를 제대로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1979년 서울예대에 입학한다. 권영락은 "당시 하길종 감독이 교수로 있었는데, 입학하던 때 돌아가셨다"면서 "교수진이 정용탁, 김기덕, 안병섭 교수 등 쟁쟁했다"고 회상했다.

대학입학 직후 군에 입대한 권영락은 1982년 복학해 이듬해 졸업한다. 이후 1984년 충무로 현장과 서울예대 조교를 병행하게 된다. 1984년 작은영화제는 영화에 열정을 불태우던 비슷한 또래 청년영화인들을 만나게 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권영락은 "양윤모(영화평론가)가 조교 선배였고, 내 뒤로 심승보(감독)와 안병기(감독) 등이 조교를 했다"면서 "1985년과 1986년에는 서울영화집단 이효인(전 한국영상자료원장. 경희대 교수)과 같이 <썩지 아니한 시>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서울예대 졸업 이후 다른 대학영화운동을 도우며 다른 줄곧 감독 데뷔를 준비하던 권영락은 1992년 강우석 프로덕션 <투캅스> 기획이사(프로듀서)를 맡으면서 제작으로 방향을 정하게 된다.
 
충무로 세대교체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이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한 것도 1985년 이후부터였다. 대학에서 서클 활동 등을 통해 영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던 학생들이 충무로에 들어서면서 인적 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1985년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안동규(제작자)에 따르면 1980년대 이전 충무로의 한국영화 스태프들은 도제식으로 경력을 쌓은 데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어려웠던 시대를 관통했기에 대학을 마친 사람이 드물었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쪽이 '딴따라'라 불리던 시기였던 탓에 대학 졸업 후 영화를 택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도 했다. 
 
비록 각자 개인적인 관심에서 비롯됐으나, 영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청년들이 충무로에 들어선 것은 충무로 변화의 초석이었다. 안동규는 "충무로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강했다"며 "제작자들이 좋아했던 이유는 말이 통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970년대~1980년대 충무로 제작 현장은 1950년 이후 곤궁했던 시기에 출생했던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때였다. 말로는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실제적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운 시기라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을 위해 영화제작 현장에 들어와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영화 원로 정진우 감독에 따르면 1950년대~60년대 영화계에 들어온 인사 중 대학 졸업자는 엄앵란 배우(숙명여대), 최무룡 배우(중앙대), 정진우 감독(중앙대), 김기영 감독(서울대), 신영균 배우(서울대), 유현목 감독(동국대) 김수용 감독(서울사대 전신 서울사범학교) 정도로 많지 않았다.

여기에 이형표 감독(서울대), 장일호 감독(국학대), 서정민 감독(고려대), 정일성 촬영감독(서울대)이 추가되는 정도였다. 대부분이 도제식 시스템을 거친 경우였다.
 
 1985년~1986년 즈음 영화청년들의 회식자리. 왼쪽부터 김태균, 임종재, 이덕신, 정성일, 오른쪽 권영락, 김의석

1985년~1986년 즈음 영화청년들의 회식자리. 왼쪽부터 김태균, 임종재, 이덕신, 정성일, 오른쪽 권영락, 김의석 ⓒ 권영락 제공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영화운동 출신들은 기존 구조를 바꾸면서 세대교체와 제도 개혁의 바탕으로 작용한다. 권영락은 "젊은 영화인들은 충무로 도제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도 강했고, 영화현장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당시 조감독과 스태프 처우가 열악했고, 배운다는 전제로 노동착취가 심했다"고 말했다.
 
이어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커지면서 기존의 조감독협회를 거부하고 조감독협의회를 구성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조감독협의회는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출신 임종재(감독)를 대표로 안동규 등 대학 영화운동 출신들이 참여한다.
 
이는 1990년대 진보적인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기존 충무로 영화단체와는 다른 새로운 단체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 기초 역할을 했다. 1990년대 후반 영화인회의가 만들어지는 데 있어 바탕이 된 것이 조감독협의회였다.
 
동서영화연구회에서 제작자로
 
1980년대 중반 충무로의 주요 인물로는 신철(제작자,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빼놓을 수 없다. 제작 쪽에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1977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장선우(감독), 유인택(제작자) 등이 중심이었던 문화패에서도 활동하면서,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도 자주 찾아 영화를 즐겼던 문화원 세대였다. 전양준, 강한섭 등과 함께 동서영화연구회 모임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1년 신철은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장길수(감독)의 소개로 김수용 감독의 <도시로 간 처녀>(1981)와 정지영 감독의 <여자는 안개처럼 속삭인다>(1982)에 참여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충무로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도시로 간 처녀>에서는 목소리가 좋다고 여주인공에게 편지를 남기고 도망간 남자의 내레이션을 대신 녹음하기도 했다. 당시 <도시로 간 처녀> 연출부 퍼스트(조감독)는 정지영 감독이었고, 세컨드는 장길수 감독이었다. <여자는 안개처럼 속삭인다>는 연출부 퍼스트가 장길수 감독이었다.
 
하지만 충무로 도제식 시스템은 신철에게도 고달픈 시간이었다. 연출부 막내로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게 돼 힘이 빠지는 데다 수입이 너무도 적어 생계가 막막했다. 충무로는 그가 꿈꾸던 '시네마 천국'과 멀었다. 충무로 현실에 회의감이 생기면서 결국 정지영 감독의 연출부 생활을 중간에 그만두게 된다. 이후 과외교사로 생활비를 벌면서 영화를 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신철 대표

신철 대표 ⓒ 권영락 제공

 
신철이 다시 충무로에 발을 딛게 된 것은 1985년이었다. 이번에도 연결고리는 장길수(감독)이었다. 장편 데뷔작 <밤의 열기 속으로>(1985)를 준비하던 장길수가 제작사인 (주)우성사의 기획실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 것이다.
 
기획실 업무는 기존 충무로에서 밑바닥 생활을 체험할 때와는 다른 것이었다. 보도자료를 마련해 언론사에 돌리고 광고·홍보 방안, 전단 및 포스터 등을 만드는 등의 일이었는데, 신철은 "처음 해보는 기획실 일이 흥미로웠고 재밌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게다가 <밤의 열기 속으로>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보람도 크게 생겼다. 대종상 신인감독·녹음·음향효과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촬영상, 황금촬영상 은상을 수상하는 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보람이 컸다고 한다.
 
우성사에 있던 신철은 1986년 피카디리 극장에 스카우트 됐고, 이후 1987년 명보극장을 거쳐 1988년 자신의 영화사인 '신씨네'를 설립하게 된다. 신철은 "피카디리에서 일할 때는 기존에 하던 방식과 다르게 했다고 3시간 동안 야단을 맞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영화사 '신씨네'는 당시 영화사 황기성사단의 사무실 구석에서 만들었다. 이때 제작한 영화가 강우석 감독이 연출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였다. 이른바 기획영화 시대를 연 첫 작품이었다. 신철은 "건강한 이야기를 가지고 재밌게 가자는 방향을 정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철은 "당시 교육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면서 "청소년의 유서를 보고 기획했고, 학생 50명을 인터뷰했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1기 김의석(감독)이 연출한 <결혼이야기> 때는 신혼부부 200쌍 취재해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신철이 제작한 영화들은 하나같이 사회성 짙은 작품들이었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여성문제를 다룬 것이었고, <베를린 리포트>는 통일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교육문제로 관심의 폭이 확대된 것이었다.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의 탄생
 
 1990년 한국영화기획실 모임 야유회

1990년 한국영화기획실 모임 야유회 ⓒ 명필름 제공

 
198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세대교체의 원동력이 됐던 기획영화는 새로운 영화를 추구했던 영화운동 출신들에게 잘 들어맞는 옷이기도 했다. 새로운 제작사들이 생겨나는 것과 맞물리며 영화운동 출신들의 충무로 결합은 한국영화 도약의 발판이 됐기 때문이다. 충무로라는 주류 시스템에서 영화운동이 주도할 수 있는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이때 태동하게 된 것이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이었다. 1987년 안동규와 신철, 유인택, 권영락 등 서울 시내 극장의 기획실 직원들이 어울리며 시작된 기획실 모임은, 1980년대 말 한국영화의 비중 있는 모임으로 성장하면서 영화운동의 전선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시 한국영화는 영화기획을 담당하던 이들이 거의 없던 시기였다. 이춘연에 따르면 "당시 영화기획자라고 하면 황기성(황기성사단 대표), 김갑의(프로듀서, 전 영화기획협회 대표) 정도"였다. 이런 시기 전문기획자의 중요성을 부각한 것이 바로 이춘연이었다.
 
핵심은 관객이 원하는 영화가 어떤 것이냐였다. 이춘연은 1990년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를 기획할 때 가장 고려할 사항은 관객의 흐름이다"라며 "관객의 취향을 무시하거나 잘못 짚으면 흥행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철의 생각도 이와 비슷했다. "제작을 하면서 관심을 둔 것은 관객들이 원하는 영화였다"며 "우리 영화 관객들은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지'를 찾았다"고 말했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가 영화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젊은 기획자들에겐 어떤 절박함 같은 것이 있었다.
 
친목모임처럼 운영되던 기획실모임은 채윤희(영상물등급위원장), 심재명(명필름 대표) 등 영화기획을 담당했던 젊은 여성영화인들이 하나둘 합류하며 확대됐고, 1991년 2월 7일 정식으로 발족하게 된다. 대표 역할인 운영위원장은 이춘연이 맡았다.
 
이춘연은 1987년 황기성사단 제작 담당 상무로 스카우트된 이후 당시 도종환 시인(국회의원, 전 문체부 장관)의 베스트셀러 시를 원작으로 박철수 감독이 연출한 <접시꽃 당신>(1988)을 비롯해 장선우 감독 <성공시대>(1988), 김성홍 감독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 등을 제작하면서 기획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신철이 기획한 강우석 감독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도 이춘연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회문제와 함께 당시 전교조 결성의 바탕이 됐던 교육문제 등 주제의식이 선명한 영화들이었다.
 
이때부터 이춘연의 역할은 도드라진다. 후배들과 함께 기획영화의 새바람을 주도하면서 큰형으로서 역할을 맡기 시작한 것이다. 1987년 이후 기획자들이 삼삼오오 모이며 시작된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은 1991년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열면서 영화운동과 충무로를 아우르기 시작한다.
 
창립 회원이었던 채윤희(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은 "당시 주로 식당에서 모임을 했고, 기획실 모임이 주는 상도 받았다"고 말했다. 심재명(명필름 대표)은 "각 영화사 기획실에 근무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여행도 가고 운동회도 여는 말 그대로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회원들은 일가친척들보다 더 자주 얼굴을 보던 사이였고, 퇴근 무렵 충무로 한복판에 있던 '베어가든'에 들르면 누구든 몇몇은 모여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 "기획실 모임 회원들이 당시 신철과 오정완(제작자)이 데이트할 때 같이 따라가기도 할 만큼 친하게 지냈다"고 덧붙였다.
 
 1991년 올해의 기획자상과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의 소식지 기획시대

1991년 올해의 기획자상과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의 소식지 기획시대 ⓒ 채윤희, 한결 제공

 
1991년 5월 발행된 한국영화기획실모임 부정기 소식지 <기획시대>에서 이춘연(제작자)은 회지 머리말에 '알찬 기획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외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상 최일선 현장에서 뛰면서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존재를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열심히 일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서로가 위로하고 용기주고 중요함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참견하고 견제하고 누구를 미워하는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들의 능력개발에 전력할 것이며, 소속된 회사의 특징적 발전을 도모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작은 힘으로 전체 영화계의 미래가 조금이나마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 행복할 것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진지한 자게로 일할 것이며, 모든 문제를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해서 끈질기게 추구할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의 이런 진지한 움직임에 부담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순간 시각을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우리 모임 발족 이후 다수의 영화인들과 관계자들께서 격려와 칭찬과 기대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들의 관심이 우리 모임을 더욱 빛나게 해주신 점 아울러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우리는 한국영화의 심장부에서 일하면서 참 많은 우려를 하게 됩니다. 당장 해결되어야 할 작은 문제부터 큰 문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 연구 분석하여 최상의 대안을 여러 관계자분들께 부탁을 드리고 건의하겠습니다. 한국영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계속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초기 회원은 모두 48명으로 외대 영화서클 '울림'을 만든 김태균(감독)과 이대 영화서클 '누에'에서 활동했던 김수진(제작자)을 비롯해 민족영화연구소에서 활동했던 김준종(전 부천영화제 사무국장) 등 영화운동 출신들과 충무로의 젊은 기획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창립 회원 명단과 당시 소속회사는 다음과 같다.
 
곽옥자(UIP), 권영락, 김경식(현진필름), 김미희(동아수출공사), 김상홍(범진영화사), 김수진(영화기획정보센터), 김영철(대동흥업), 김은경(다남흥업), 김준종(모가드 코리아), 김태균(영화공장 서울), 남훈(시네포럼), 노종윤(영화기획정보센터), 모창균(우친필름), 박미희(서울필름), 박은경(시네피아), 박현우(서울극장), 소병무(옴니시네마), 손윤, 신철(신씨네), 심재명(극동스크린), 안동규(성일시네마트), 송영진(디자인플라자), 유인택(판영화사), 오정완(신씨네), 윤명오(화천공사), 윤종찬(하명중영화제작소), 이은(애니기획), 이경미(미도영화사), 이광희(동보흥행), 이문형(신씨네), 이성자, 이수정(영화기획정보센터), 이원기(명보극장), 이춘연(황기성 사단), 임상수(영화기획정보센터), 임충렬(남동흥업), 정승혜(신씨네), 정태진(길 영화사), 조철현(오픈시네마), 지미향, 채윤희(삼호필름), 천규정(삼영필름), 최보근(동아수출공사), 한민정(판영화사), 현남섭(영화공장 서울), 홍승훈(우진필름), 홍진웅, 황인웅(프레임영화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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