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새로운 영화를 추구하던 흐름이 영화운동이란 이름으로 규정된 것은 5월 광주항쟁 때문이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에 의해 광주에서 자행된 피의 학살은 영화에 방점을 찍었던 '영화'운동을 영화를 매개로 운동에 중심을 둔 영화'운동'으로 변화시켰다.

단순히 보고 즐기는 영화를 넘어,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회변혁의 의식을 담기 시작했다. 그 바탕이 5월 광주였다. 군사독재에 맞서다 쓰러져간 사람들에 대한 빚진 마음을 영화를 통해 갚고자 한 것이다. 
 
이름난 DJ였던 김태영 감독 <칸트씨의 발표회>
 
5월 광주영화가 한국영화운동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였다. 첫 출발은 김태영(감독, 인디컴 대표)의 <칸트씨의 발표회>였다. 특별한 점은 김태영은 초기 영화운동과는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독일·프랑스문화원-얄라셩-서울영화집단-대학영화서클 등으로 이어지던 흐름에서 김태영은 벗어나 있었다. 평범한 청년영화인이 자생적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을 갖게 돼 영화를 만든 다소 특별한 경우였다.
 
김태영은 1980년 음악에 빠져 DJ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당시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앞 도심다방과 숙명여대 앞 라이프다방 등이 주무대였다.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때였다.
 
하지만 1980년 5월 대규모 시위는 그의 의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된다. 그는 5월 15일 버스를 타고 서울역 앞에 나갔다가 당시 서울지역 대학생들의 시위 현장을 목격한다. 당시 서울역에 집결했던 대학생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인 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이는 이틀 뒤 5.17 비상계엄 조치를 단행한 전두환 군사독재에 반격의 빌미를 준다.

이후 1980년 5월 30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 유인물을 인쇄하던 과정에서 계엄군을 피하다 떨어져 사망한 서강대 학생 김의기 열사 사건도 김태영에게 자극을 줬다. 
 
5월 시위 중 숙명여대 학생들이 경찰의 봉쇄로 인해 담을 넘어 학교로 들어가야 했을 때 그 아래서 받쳐주는 역할을 했던 김태영은 이 때부터 한국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81년 서울예대 방송연예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다시 영화과에 들어가 공부를 이어간다. 김태영은 "당시 광화문 '논장' 등 사회과학서점을 찾아 금서로 지정된 책들을 구해 읽고 사회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5월 광주를 다룬 단편영화 <칸트씨의 발표회> 한 장면

5월 광주를 다룬 단편영화 <칸트씨의 발표회> 한 장면 ⓒ 인디컴

   
단편영화 <칸트씨의 발표회>는 5.18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첫 작품이었다. 1987년 7월 제작돼 10월에 완성됐다. 광주항쟁에 참여해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어느 젊은이의 의문사를 그림으로써 시대의 왜곡과 자유와 민주주의의 중요함을 표현하는 영화다. 35분 분량으로 조선묵, 서갑숙 배우 등이 출연했다.
 
영화는 도시의 인물을 찍던 사진작가가 우연히 칸트씨라는 인물을 발견하고 그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껴 촬영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렌즈로 칸트씨를 촬영하다 묘한 애정을 느끼게 된 사진작가는 칸트씨의 모습을 인화해 같은 장소에서 칸트씨를 기다리지만 만나지 못한다. 대신 칸트씨를 잘 알고 있는 전경에게 아침 일찍 칸트씨가 잡혀간 상황과 그가 광주항쟁 때의 행방불명자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괴롭게 돌아선다. 몇 주가 지난 뒤 TV를 시청하다 사진작가의 발표회 소개 뉴스 뒤로 저수지에서 비닐에 싸인 어느 젊은이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뉴스를 보게 된다.
 
이 작품은 1985년 제작한 <관찰노트>(최민수 출연/16mm 22분)를 모태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영화를 분실하면서 2년 만에 <칸트씨의 발표회>라는 제목으로 다시 제작하게 된 것이다. 개작과정에서는 광주항쟁의 상황을 다룬 책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내용과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접목했다.
 
김태영은 연출의도에 대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다 죽어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바치고자 했던 것이다"라며 "30년 가까이 이어지는 군사독재에 국민은 노예가 됐고, 민주열사들은 감옥에 들어가 있거나, 일부는 죽어가는 현실이 연습이 아닌 실제상황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서운 겨울공화국을 살아가는 동시대의 젊은이들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오직 한가닥 타는 목마름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칸트씨의 발표회>는 1988년 38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영포럼 부문에 공식초청되고, 이탈리아 토리노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이후 하와이국제영화제와 싱가포르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는다.
 
당시 1972년 카이두 실험영화클럽을 만들었던 한옥희(영화평론가)가 독일에서 유학 중이었다. 한옥희는 당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칸트씨의 발표회>를 관람 후 월간 <객석>에 보낸 글에서 "적은 수의 관객이었지만 상영 후 뜨거운 공감의 박수를 받았고, 솔직하고 진지한 토론이 진행됐다"고 밝혔다.
 
한옥희는 당시 베를린국제영화제 분위기에 대해 "관객과 평론가들의 뜨거운 열기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라며 "당시 토론회가 끝나고 김태영 감독과 토니 레인즈 평론가의 첫 만남 자리를 우연히 주선했다고 말했다.
 
당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된 한국 단편영화들은 <칸트씨의 발표회> 외에 <그날이 오면>(장동홍 연출, 서울예전 영화과), <강아지 죽는다>(박광우 연출, 동국대 연극영화과), <공장의 불빛>(이은 연출, 중앙대 연극영화과), <버려진 우산>(조진 연출, 서울예전 영화과), <백일몽>(이정국 연출, 중앙대 연극영화과), <울타리를 넘어서>(정성진 연출, 서울예전 영화과) 등 모두 7편이었다.
 
한옥희에 따르면 당시 베를린영화제는 한국흥행영화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학생운동의 일부로 만들어져 정치적 참여성을 띤 단편영화들을 선보였다. 충무로 주류영화뿐만 아닌 영화운동의 과정에서 작은영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단편영화들이 국제영화제에 첫 선을 보인 시간이었다.
 
정부 모르게 외교행낭 통해 베를린으로
 
당시 대학생들이 만든 단편영화가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됐다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큰데, 영화운동이 이뤄낸 작지 않은 성과이기도 했다. 출발은 1987년 9월이었다. 서강대 영화공동체를 만들고 당시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 조교를 맡고 있던 김용태(작고, <미지왕> 감독)은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 초청할 한국영화를 찾고 있던 베를린국제영화제 코디네이터 담당 임혜경씨를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에게 소개한다.
 
낭희섭은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의뢰가 왔던 이유는 1988 서울올림픽을 맞이하여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배경으로 한 사회비판적 성격의 영화들을 초청하려 했고, 1985년 이후 전국 대학 및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에 단편영화를 보급하는 실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낭희섭은 당시 대학 영화전공생 작품들을 중심으로 30여 편의 16mm 필름 라이브러리를 갖고 있었다, 전두환 군사독재 치하의 한국사회 문제점과 모순 등을 베를린국제영화제를 통하여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 낭희섭은 임혜경과 함께 단 둘이 선정작업을 진행한다.
 
아무도 모르게 작업을 해야했기 때문에 서대문 치안본부(현 경찰청) 옆 허름한 5층 건물 옥탑방에 있는 '영화마당우리' 사무실에서 시사를 하고 협의를 진행해 6편의 작품을 선정했다. <인재를 위하여>(장윤현 연출, 한양대 영화써클 '소나기')도 후보로 거론됐지만, 8mm 복제가 어려워 유보됐다. 
 
당시 베를린국제영화제 측은 항공료와 숙소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1명을 공식 초청한다. 연출자들에겐 우선권이 주어졌지만, 1명만 갈 수 있다고 알려져 그 누구도 먼저 가겠다고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배급과 선정을 진행한 낭희섭이 추천됐다. 하지만 낭희섭은 당시 배급하는 일을 중단하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임자로 자처한 김윤태에게 귀국 후 배급 일을 담당하는 조건으로 초청 자격을 양도한다.
 
김윤태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출연했던 <칸트씨의 발표회>를 한 편 더 임혜경에게 보여주게 된다. 1980년 5.18 광주를 소환한 단편이었기 때문에 추가로 초청된다. 이때 김태영은 다른 편의 제공 없이 초청만 받는 조건으로 자비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여하게 된다. 공식초청을 받은 건 김윤태였지만 당시 단편 감독 중 유일하게 김태영이 참가하면서 <칸트씨의 발표회>가 주목받게 된 것이다.
 
낭희섭은 "당시 <칸트씨의 발표회>는 김윤태씨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베를린영화제에 가게된 것이었다"며 "이런 조건으로, 자비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머지 6명의 감독으로부터 김태영 감독에게 특혜를 준 것처럼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1987년 연우우대에서 개최된 '열린 영화를 위하여-작은영화제'

1987년 연우우대에서 개최된 '열린 영화를 위하여-작은영화제' ⓒ 성하훈

 
최종 출품까지 과정도 긴장의 연속이었다. 영화마당우리는 1987년 12월 1일~15일까지 대학로 연우무대 소극장에서 베를린영화제에 추천된 작품을 중심으로 '열린영화를 위하여-작은영화제'를 개최한다. 또 이듬해인 1988년 1월 18~19일까지 이틀간 독일문화원과 함께 베를린영화제 포럼에 초청받은 단편들과 <인재를 위하여>를 추가해 상영회를 준비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월 19일자 기사에서 "8mm와 16mm 필름으로 10~20분 분량으로 제작된 작은영화들이 소극장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며 독일문화원에서 열린 작은영화제와 상영작들을 소개했다. 기사에 영화평론가로 등장한 홍기선(감독)은 이들 영화에 대해 "기성영화의 폭력, 섹스 등 상업적 속성을 배제하고 우리의 절실한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것이 작은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며 "기술적인 보완을 하면 전망이 밝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작은영화제는 일정을 마무리 못하고 중단된다. 낭희섭은 "검열 없이 공개적으로 개최하려고 했는데 치외법권 지역인데도 독일대사관으로 압력이 들어왔던 것 같고, 결국 독일문화원에서 '상영을 할 수 없다'며 양해를 구하면서 작은영화제가 중단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고 항의할 생각이었다가 접었다"며 "베를린영화제를 앞두고 출국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독일문화원의 도움으로 우리 정부 모르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는 7펀의 영화들이 외교행낭으로 보내질 수 있어서 조용히 철수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단편을 모아 장편을 만들자"
 
1987년 '열린영화를 위하여-작은영화제' 상영과 1988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들은 안팎의 주목을 받게 된다. 자연스럽게 제작에 참여한 영화인들의 교류도 늘어났다. <인재를 위하여>를 연출했던 한양대 '소나기' 장윤현(감독)에 따르면 1987년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좋은 의식있는 작품들이 잇따라 나왔고, 영화계에서도 관심이 높아지면서 작품을 낸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서로 만날 기회가 자주 생기면서 이를 기회로 장편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공장의 불빛>을 연출했던 이은(제작자, 명필름 공동대표)은 "1988년 6월쯤 성균관대학교에서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됐던 영화들의 상영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서로 몇 십만 원 씩 내고 15분~20분 분량 만들던 단편영화를 모으면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오갔다"고 말했다.
 
당시 논의에는 홍기선, 이효인, 오정옥(촬영감독), 공수창(감독) 등이 함께했다. 1986년 11월 '파랑새 사건'으로 구속됐던 홍기선과 이효인은 1987년 3월 선고유예로 풀려난 이후 이정하, 변재란 등과 함께 서울영상집단을 탈퇴하는 형식으로 벗어나 있던 상태였다.
 
변재란(영화평론가, 순천향대 교수)은 "1987년 9월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중앙대 대학원에 입학했다"며 "당시 학부생이었던 이은이 홍기선 감독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연결시켰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은은 "자세하지는 않지만 당시 중앙대 앞 카페에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관련된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는 과정에서 영화운동을 했던 선배 등을 초대했는데, 그 때 변재란과 인사하게 된 것 같다"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민중영화를 추구했던 홍기선과 대학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청년 영화인들과의 장편 논의는 이런 과정을 거쳐 진행됐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한양대 '소나기', 서울예술대 영화과 등이 주축을 이뤘고, 여기서 만들어진 작품이 장편 독립영화로는 처음 5월 광주를 다룬 <오! 꿈의 나라>였다.
 
 <오! 꿈의 나라>를 공동연출한 이은, 장윤현, 출연배우 오지혜

<오! 꿈의 나라>를 공동연출한 이은, 장윤현, 출연배우 오지혜 ⓒ 장산곶매

 <오! 꿈의 나라> 오정옥 촬영감독

<오! 꿈의 나라> 오정옥 촬영감독 ⓒ 장산곶매

 
서울독립영화제가 2019년 독립영화 아카이브 구술사 프로젝트로 펴낸 책 <다시 만난 독립영화>에는 당시 <오! 꿈의 나라>를 만들었던 장산곶매 초기 회원들의 인터뷰 기록이 실려 있다. 
 
이 책에서 장동홍(감독)은 장산곶매에 대해 "개별적인 팀이다 보니 구심점이 있어야 했다. 그 역할을 했던 사람이 홍기선(감독)이었다"며 "특유의 성정과 리더십으로 후배들을 모았고, 공수창(감독)과 함께 <오! 꿈의 나라>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이은은 "이효인 선배가 모임을 같이 하다가 '민족영화연구소'를 만들면서 빠졌고, 홍기선이 맏형 역할을 했다"면서, "공수창은 시나리오, 나와 장윤현·장동홍은 감독으로 공동연출을 맡게된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자'와 '광주'라는 배경을 놓고 논의를 하다가 광주 영화로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노동자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지만 광주 이야기는 너무 늦었다는 말이 나오면서였다. 이은은 "누가 그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논의가 모여서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오! 꿈의 나라>는 광주학살과 배후에 있던 미국을 비판하는 영화다.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진압작전 직전 빠져나온 종수는 동두천에서 미군 PX 물건을 거래하고 있는 고향 선배 태호의 집으로 찾아와 은신한다. 그 과정에서 광주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광주항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 부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미국의 실체를 되짚어 본다.
 
홍정욱, 박충선, 오지혜 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김동원(감독),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교수), 이덕신(감독) 등이 단역으로 출연했다. 공동연출을 맡았던 이은도 미국을 비판하는 시민군 역할로 등장하고 장윤현도 마찬가지로 시민군으로 나온다. 홍기선 역시 공수부대에게 얻어맞는 광주시민으로 분장해 출연한다. 주요 배우들은 이은의 중앙대 후배들과 장동홍의 서울예대 후배들이었다.

도청과 시위대 진압 장면 등은 중앙대와 흑석동 인근에서 촬영됐다. 전남대에서 학생들이 게엄군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을 촬영한 외국어대 정문과 기지촌이 있던 동두천이 주요 촬영장소였다. 영화에 미국 이야기가 들어간 것은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노선인 NL(민족해방)의 영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5월 영화였으나 차가웠던 광주 반응
 
6월부터 제작에 들어간 영화는 12월 말에 완성된다. 첫 상영은 광주에서 진행됐다. 홍기선(감독)과 장윤현(감독)이 영사기를 들고 내려가 광주 민예총에서 상영했다. 하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장윤현은 "상영 전에는 '아무도 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분들이 상영관의 불이 켜졌는데도 어떤 반응도 없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한 사람이 의자를 탁 차고 일어서면서 '이게 무슨 광주영화야!' 하면서, 나가자 다른 관객들도 다들 웅성웅성하면서 뒤따라 나갔다"고 밝혔다. 그는 이때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누군가의 고통을 소재로 삼는다면 그 사람들 입장에서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의 반응은 달랐다. 유인택(예술의 전당 대표)이 운영하고 있던 신촌의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1989년 1월 14일부터 상영이 이뤄졌는데,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좌석은 70석 정도였는데, 200~300명이 들어와 관람할 정도였다.
 
 장산곶매

장산곶매 ⓒ 장산곶매

 
이 과정에서 '장산곶매' 이름도 생겨난다. 이은은 "유인택에게 영화를 상영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다"며 "여러 이름이 후보에 올랐고 투표 끝에 홍기선 감독이 낸 '장산곶매'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유인택은 "당시 이은 등 후배들이 찾아와 영화를 상영할 곳을 찾는다고 해서 연극이 없는 낮 시간대를 배려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배급은 '영화마당우리' 낭희섭이 맡았다. 1987년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 작품 선정 이후 배급에서 손을 떼려 했던 낭희섭은 대신 보냈던 김윤태가 연락도 없이 독일에서 1년 정도 체류하면서 출품한 단편영화 감독들에게 결과를 보고할 수 없어 난처한 상황이 됐고 어쩔 수 없이 독립영화 배급을 계속 하고 있었다. 1985년 작은영화워크숍 이후 대학 영화과에서 영화들을 수급해 대학 영화써클 등에 배급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은은 "낭희섭이 제작비도 일부 조달하면서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며 "예술극장 한마당 외에 대학가에서도 상영했는데, 낭희섭이 배급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로드쇼 방식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상영했다"고 말했다.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당시 상황에 대해 "<오! 꿈의 나라> 기획 당시 홍기선부터 대학생 장윤현까지 10명이 50만 원 씩 내서 500만 원으로 프로덕션을 끝냈고, 나머지 후반 작업비가 없어 선배들에게 러시필름을 보여주며 얼마라도 빌려달라고 했으나 다들 어려워서인지 아무도 빌려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영화 완성을 앞두고 1988년 10월에는 지방 상영을 확보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갔는데, 잘 데가 없어 전양준에게 연락해 당시 경성대 교수였던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 숙소에서 하루 묵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때 그나마 돈을 빌려준 사람은 신철(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다. 낭희섭은 "홍기선 감독이 가보라고 해서 제작사 황기성 사단에 갔더니 기획실에 있었던 신철이 아무 질문 없이 10만 원 수표를 건네줬고, 나중에 이자 없이 원금만 반납했다"고 말했다. 안동규를 통해 일본인 아오키 갠스게를 소개받아서 300만 원에 일본 판권을 넘겼다.
 
여기서 등장하는 일본인 아오키 갠스게는 한국말에 능통한 한국영화 전문가였다. 안동규(제작자)에 따르면 아오키 갠스게는 일본 피아(PIA)국제영화제 쪽과 친분이 있는 데다 통역, 번역, 프로그램 작성 등을 전담해 일본 쪽과 교류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장호 감독이 작품을 많이 소개했다. 당시 해외영화제에서 주류영화가 아닌 8mm/16mm영화에 관심을 보일 때였는데, 아오키 갠스게가 피아영화제와의 협력을 생각해 판권을 구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오키 갠스케는 <오! 꿈의 나라> 필름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다가 제지를 당한다. 안동규는 "당시 공항까지 따라가서 출국장에 들어서는 것까지 보고 왔는데, 이후 아오키에게 필름을 빼앗겼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직원이 필름은 놓고 혼자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안동규는 이어 "아오키도 국내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니 이미 요주의 인물이 돼 주시를 받고 있었던 것"이라며, "필름을 빼앗겼지만 이후 다른 방법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졌다"라고 덧붙였다.
 
 <오! 꿈의 나라> 한 장면

<오! 꿈의 나라> 한 장면 ⓒ 장산곶매

 
이렇듯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오! 꿈의 나라>는 전국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중심으로 대동제 등에서 1000회 이상 상영돼 20만 정도의 관객이 든 것으로 추산된다. 예술극장 한마당 상영 때는 지방에서 관객이 올라올 정도였다.

낭희섭은 "810만 원 정도의 제작비를 들여 경인지역에서 3개월 만에 5천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다"라며 "지역단체들에게 판권 100만 원에 상영권을 넘겨주면서 전국 상영으로 확대돼 상영기회가 늘어났던 것"이라고 말했다. 1회 상영료가 30만 원이었는데, 낭희섭이 담당했던 경인, 강원, 제주지역에서는 하루에 5개 대학에서 동시 상영한 적도 있었다. 상업영화가 아닌 16mm영화로서 만만치 않은 흥행력을 과시한 셈이다.
 
특히 "부산에서는 황의완(부산영화협동조합 대표, 부산콘텐츠마켓 집행위원장)을 통해 배급했는데, 구정(설날) 4일 동안 경성대에서 입장료 500원 대신 자료집으로 3천만 원의 수입이 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다"며 "배급 수입을 정리해 돌려본 후 보안 때문에 바로 소각했는데, 1억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이은은 "당시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였던 유인택이 '이런 게 영화구나!' 충격받아 이후 영화에 뛰어든 계기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태우 군사독재의 탄압은 피할 수 없었다. 상영 3일째인 1월 16일 문화공보부와 서대문구청은 신고의무와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안 거쳤다는 이유를 들어 제작자를 고발했다. 유인택 역시 사전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반전이 일어난다. 유인택은 "경찰이 필름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고, 당연히 영장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기각이 되면서서 신문에 대서특필됐고, 자동으로 홍보가 돼서 흥행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관객과 만나지 못한 비운의 영화 <황무지>
 
비슷한 시기 <오! 꿈의 나라>와 같이 제작된 5월 광주영화가 있었다. 김태영(감독)의 장편 <황무지>였다. 다만 이 영화는 제대로 관객을 만나지 못하면서 비운의 5.18 영화가 됐다.
 
1987년 11월 제작한 <칸트씨의 발표회>가 1988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소개돼 주목받은 김태영은 베를린에서 돌아오자마자 장편제작에 들어간다. <칸트씨의 발표회>가 80년 5월 광주항쟁을 겪은 젊은이의 상처받은 영혼을 그렸다면 황무지는 당시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원의 인간성 회복의 몸부림을 그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황무지>의 한 장면. 망월동 묘지에서 분신하는 공수부대원

<황무지>의 한 장면. 망월동 묘지에서 분신하는 공수부대원 ⓒ 인디컴

   
1988년 7월 일본을 방문할 일이 있던 김태영은 원고지 30매에 일본어로 줄거리를 번역해 적은 뒤 1개월 정도 머물며 후원자를 물색했으나 확보에는 실패한다. 대신 8월 중순 제작 강행을 결정하면서 국내 후원자를 물색하는데, 영화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과 의견이 조율돼 5천만 원을 투자받기로 한다. 국내판권을 투자자가 갖고 해외판권을 김태영이 갖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몇 번의 수정을 거쳐 9월 말에 완성 대본이 나왔으나, 투자자는 공수부대원이 망월동에서 양심선언과 분신하는 마지막 장면 수정과 16mm가 아닌 35mm 촬영을 요청했고, 김태영은 이를 거부하면서 투자가 어긋난다. 김태영은 "왜 이 영화가 16mm 장편으로 특히 우리 상황에서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거듭 밝혔지만 투자자를 설득시키진 못했다"고 말했다.
 
투자자를 찾는 일이 벽에 부딪히자 주연이었던 조선묵 배우의 인맥을 통해 정진우 감독의 우진필름과 접촉하게 되고 16mm 장편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투자유치에 성공한다. 11월 9일 1400만 원 어음을 받은 직후, 11월 11일 촬영에 들어가 12월 8일 촬영이 끝난다. 28일 중 23일 동안 촬영을 강행한 것이다. 
 
<황무지>는 1980년 5월의 탈영병 김의기에 대한 이야기다. 1980년 5월 기독교회관에서 계엄군을 피하다 떨어져 사망한 김의기 열사의 이름을 주인공 이름으로 사용했다. 부대를 탈영해 6개월째 도망다니던 중 군산의 기지촌 술집에서 일하게 된 김의기가 술집에서 미군을 상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비참한 삶들을 지켜보다가 광주에서 학살한 소녀를 떠올리고 그에 대한 최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결국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망월동 묘지에서 분신한다는 내용이다. 조선묵, 김영석, 서갑숙, 방은희, 전무송 배우 등이 출연했다.
 
<한겨레>는 1989년 2월 1일자 기사에서 <황무지>에 대해 소개하며 2월 중순 쯤 신촌 청파소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이고,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을 받지 않고 개봉하겠다는 김태영 감독의 입장을 전했다.
 
하지만 영화는 상영되지 못했다. 김태영(감독)은 "문화공보부의 압력이 우진필름 쪽에 가해져서 광주에서 상영할 때 필름을 탈취를 해갔다"며 "1억 원의 제작비 중 본인의 집 보증금도 3천만 원 정도가 투자됐지만 상영이 막히면서 개인적으로 파산과 함께 알거지가 됐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1989년 5월 12일 기사에서 "문화공보부 예술2과 소속 불법 음반 상설합동단속반원 3명이 서을 혜화동 예술마당 금강에서 비디오테이프로 상영되고 있던 <황무지>를 압수했다"며 "16mm 필름 상영은 문제가 없지만 비디오로 대중상영을 했기 때문에 관련 법률 위반"이라는 것이 압수 사유였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원판 필름은 광주 드라마스튜디오에서 상영 도중 우진필름에게 뺏긴 상태"라며 "우진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을 때 작성한 계약서에 네가티브 필름의 소유권은 우진에 있다는 조항을 근거로 필름을 탈취했다"고 보도했다. 김태영 감독은 "광주 상영이 시작되던 5월 4일 광주시와 문공부로부터 상영중단 요청을 받았다. 우진의 상영 방해는 당국의 영화탄압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칸트씨의 발표회>, <황무지>를 연출한 김태영 감독

<칸트씨의 발표회>, <황무지>를 연출한 김태영 감독 ⓒ 인디컴

 
당시 상영은 표면적으로 문화공보부가 막았으나 실제로는 국군 보안사령부가 개입돼 있었다고 한다. 군사독재시절 민간인을 사찰했던 보안사가 나서 영화상영까지 막았던 것이다.
 
당시 투자를 했던 정진우 감독에 따르면 우진필름에서 제작했던 <대학별곡>(1985) 출연했던 조선묵(배우)이 찾아와 사회문제에 대한 16mm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데 3천만 원이 필요하다며 투자를 요청했다. 배우의 요청에 2천만 원 정도를 지원한 후, 어떤 영화인지 확인해보니 5월 광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른 척 지나갔는데, 어느날 보안사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정진우 감독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황무지>를 보지 못했는데 광주에서인가 상영을 했다고 하더라. 보안사에서 오라고 해서 가니 이미 내가 돈을 지원해 준 것부터 시작해서 세세하게 다 알고 있었다. 결국 제작비 댄 것은 시인하고 아는 배우가 요청해서 도와준 것일 뿐 그런 영화인 줄 몰랐다고 잡아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내가 권력 쪽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는 거다. 조사를 끝낸 담당 장교가 '감독님을 봐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서 조사하기가 어렵다. 사령관님이 차 한잔 하자고 한다'며 사령관실로 안내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 고명승이었는데, 내 대학 동기와 사범학교 동창이라 알던 사이였다. 고명승이 '왜 이리 철이 없냐? 지금 어떤 세상인지 모르냐'고 했고, 결국 내가 잘 정리하겠다고 말하고, 무마할 수 있었다."

 
정진우 감독은 "보안사에 돌아와 필름을 가져오라고 지시하니 네가 필름(원판 필름) 반만 가져 왔더라"며 "이미 돌고 있는 프린트(상영 필름)은 어쩔 수 없고, 네가 필름 반을 내가 갖고 있으면 더 프린트를 뜨지 못하는 것이어서 그걸로 마무리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첫 상업영화 <부활의 노래>
 
 <부활의 노래>제작현장. 연출하고 있는 이정국 감독(앞)

<부활의 노래>제작현장. 연출하고 있는 이정국 감독(앞) ⓒ 이정국 제공

 
16mm로 제작된 광주영화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1990년에는 이정국(감독)의 <부활의 노래>가 제작된다. 상업영화로서는 첫 5.18 광주영화였다. 이정국은 문화원 세대로 동서영화연구회 초기 회원이었고, 대학 서클의 세미나와 강의를 다니는 등 1980년대 초반의 영화운동에서 영화학습을 지도하고 있었다. 1984년 만든 16mm 단편영화 <백일몽>은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광주가 피를 흘린 1980년 5월에 이정국은 전경으로 전남 해남 화원반도의 해안초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5월 21일 목포로 부식을 구입하러 나왔다가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를 만났고, 자세한 광주 소식은 이후 옆 초소에 면회를 온 전남대 간호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이정국은 고향이 전남 보성이었으나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광주영화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정국은 전태일 열사 영화 만들어보고 싶었으나 결국 못하게 됐고, 그 때 한 서점에서 눈에 들어온 책이 <광주의 넋 박관현>이었다. 박관현은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조치 이후 피신해 있다가 1982년 4월 검거됐고, 9월 5년 형을 선고받고 옥중 단식 끝에 10월 옥사한 학생운동가였다. 책의 저자인 임낙평은 이정국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이정국은 광주항쟁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윤상원과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박관현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향한 순수한 희생 정신에 감동받아 영화 제작을 생각하게 된다. 1989년 신촌 우리마당에서 그의 영화 강의를 듣던 연세대 학생 노창은(한의사)이 200만 원을 선뜻 내놓아 그 돈으로 숙대 앞에 영화사 사무실을 구한다. 중앙대, 한양대, 연세대 고려대 등에서 이정국에게 영화를 배웠던 학생들이 제작에 주로 참여하게 된다. 이 때 함께한 사람들이 중앙대 후배인 주필호(제작자), 외국어대 울림 회장을 지낸 주경중(감독), 영화마당우리 작은영화워크숍을 1기로 수료한 김형구(촬영감독, 한예종 교수) 등이었다.
 
제작사였던 새빛영화제작소 초기대표는 주경중(감독)이 맡았다. 졸업 직후 잡지사 운영 등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있던 주경중은 충무로 연출부 일을 찾다가 이정국을 만나게 된다.
 
주경중은 "영화계 소식통 역할을 했던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을 찾아가 연출부 주선을 부탁했는데, 거기서 이정국 감독을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두 가지 선택지로 비합법적인 영화제작(장산곶매)과 합법적인 이정국의 <부활의 노래> 참여를 제안받고 고민하다, 대학에서 노동영화 <울림>을 제작했던 주경중은 광주영화를 택한다.
 
주경중은 "1980년 박관현 열사의 연설을 들은 적이 있다"며 "4월에 군에 입대했는데, 그 직전에 전남대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마침 총학생회장 선거유세 연설을 들었다. 당시 친구가 학생회장으로 유력하다고 소개했다. 10년 후에 박관현을 대상으로 영화를 제작하게 된 것은 묘한 인연이었다"고 회상했다.
 
윤상원과 박관현을 주인공을 삼아 만들었던 <부활의 노래>는 도청에서 산화한 윤상원과 옥사한 박관현의 이야기에 일부 픽션을 가미해 이정국이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1990년 7월 완성돼 상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공연윤리위원회(공륜)에 의해 무자비한 가위질을 당한다. 100분짜리 영화에서 25분이 잘려나간 것이다. 공륜은 8월 연세대에서의 시사회를 꼬투리 잡아 심의 없이 상영했다고 고발하는 등 영화에 탄압을 가했다. 
 
 <부활의 노래> 첫 상영을 찾은 당시 야당 대표 김대중 전 대통령. 왼쪽부터 주경중, 이정국, 김대중, 문동환

<부활의 노래> 첫 상영을 찾은 당시 야당 대표 김대중 전 대통령. 왼쪽부터 주경중, 이정국, 김대중, 문동환 ⓒ 이정국 제공

 
이정국(감독)은 "당시 야당의원들을 찾아가 호소한 덕분에 재심의를 받게 됐고, 자체 및 공륜 심의로 5분 정도 잘린 채 심의를 통과하게 됐다"고 말했다. <부활의 노래>는 1991년 3월 1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했고, 당시 야당 대표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첫 상영 때 방문해 관람 후 금일봉을 전하며 격려했다. 주경중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영화법의 문제점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라며 "검열과 가위질이 사라져야 진정한 예술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공륜이 시사회를 문제삼아 고발한 건은 벌금 100만 원이 나왔다. 개봉을 앞두고 추후 있을지 모를 탄압에 대비해 이정국 감독이 혼자 책임지기로 하고 법적인 대표까지 맡고 있었다. 이 감독은 이에 반발해 정식재판을 청구한다. 결국 변호사 없이 혼자 소송을 해 벌금 50만 원 판결을 받는다. 이후 1994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잘린 필름을 모두 복원해 공륜 심의를 통과했고 뒤늦게 <부활의 노래>로 그 해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정국은 "감옥 갈 각오하고 만든 영화였으나, 당시 각자 자기 주머니 돈을 털어 제작에 참여하면서 같이 고생한 스태프 배우들, 그리고 후배들을 제대로 못 챙겨 지금도 항상 미안함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처음에 김형구(촬영감독)가 촬영을 맡았으나, 촬영협회에 가입한 사람이 아니면 극장 개봉이 어려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0%쯤 촬영됐을 때, 충무로 촬영 조수 출신을 소개받아 바꾸면서 김형구에게 많이 미안했다"고 덧붙였다.
 
"영화에 발을 딛게 한 건 광주항쟁"
 
이후 광주영화를 이은 것은 장선우였다. 1996년 제작된 <꽃잎>은 전남도청 앞에서 촬영된 영화로 1980년 5월 당시 전남도청 앞 계엄군의 발포 장면을 묘사했다.
 
<한겨레> 1995년 7월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장선우는 1995년 7월 12일 세종호텔에서 열린 제작발표회 기자회견에서 "왜 광주냐?"는 질문을 받았다. 장선우는 "광주는 때가 되면 하고 싶던 소재였다. 내가 81년 영화에 발을 딛게 된 것도 광주항쟁 때문이었고, 필름에 역사를 담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다.
 
 영화 <꽃잎>의 한 장면

영화 <꽃잎>의 한 장면 ⓒ 미라신코리아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어머니를 잃은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 <꽃잎>은 1995년 10월 1일 금남로에서 엑스트라 4천 명을 포함 1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도청 앞 발포 장면을 재현했다. 당시 문성근과 신인배우였던 이정현이 출연했다. 

<꽃잎> 촬영을 맡았던 유영길 감독은 1980년 5월 당시 미국 CBS 방송에서 일하며 광주를 직접 목격한 당사자였다. 카메라 배터리를 구하기 위해 장성으로 갔다가 도청 앞 발포 장면을 놓쳐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허구로나마 그날을 다시 찍게 됐다.
 
<꽃잎>은 개봉 전 미국 CNN이 광주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하며 영화를 소개해 방영 직후 해외 배급사들의 문의가 잇따랐다. 그러나 공연윤리위원회는 심의문제를 일으켰다. 제작사가 심의를 신청한 영화 광고 사진을 수정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제의 사진은 80년 5월 금남로를 재현한 장면. 시위군중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로 재현한 '학살자 전두환을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문제삼은 것이었다. 검열을 통한 딴지걸기였다.
 
2000년 들어 만들어진 광주영화는 <오! 꿈의 나라> 상영 당시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였던 유인택의 몫이었다. 유인택의 기획시대가 제작해 2007년 개봉한 <화려한 휴가>는 전체 열흘 간의 항쟁을 조명한 영화였다.
 
유인택에 따르면 당시 영화사 직원이었던 이수남 피디가 "어느 날 영화로 보고 싶은 역사적 사건 5위 안에 5.18이 있다며, 이제 518 영화 만들 때가 되지 않느냐고 제의"하면서 출발했다. 과연 투자가 될까 의심하면서도 시나리오를 먼저 완성했다.
 
유인택은 "5.18에는 영웅 주인공이 없어서 '윤상원 열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박상연 작가가 1차 시나리오를 집필했다"며 "지식인(야학선생) 부분은 재미없고, 민중 인물들이 재미있어서 이 부분을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해 박상연 작가와 나현 작가가 동시 집필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CJ가 좋게 봤지만 제작예산이 100억 원이라 여러모로 부담스러워 했다"면서 "제작비 50%를 제작사가 책임지는 조건으로 CJ 윗선의 판단을 기다렸으나 투자 결정에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결국 "5월 배경 촬영이 가을 촬영이 됐다. 11월에 촬영하니 배우들의 입김이 나와 (배우들이) 얼음을 머금고 대사 연기를 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충무로 영화계는 모두 영화 제작에 반대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완성하는 게 기적'이라는 것이었다. 유인택 역시 "영화계 마지막 작품이란 각오로 박수칠 때 떠나겠다"며 마음을 다진 후, 창업투자자를 설립해 영화 투자자로 변신했다.
 
 보수단체의 고발로 <화려한 휴가> 제작진이 조사를 받을 당시 모습. 오른쪽이 유인택 대표

보수단체의 고발로 <화려한 휴가> 제작진이 조사를 받을 당시 모습. 오른쪽이 유인택 대표 ⓒ 유인택 제공

 
2007년 대선 정국에 개봉한 <화려한 휴가>는 흥행했고, 민주당 대선 후보들(이해찬 한명숙 등등등)이 너도나도 시사회 찾으며 언론을 장식한다.
 
유인택은 "당시 한나라당(현 미래통합당)쪽에서 많이 미웠을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영화계 좌파세력 척결 프로젝트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잘 나가던 창투사 펀드매니저에서 내려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개봉 직후에는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에서 군인들을 잔인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로 제작자인 유인택을 고발하기도 해 강남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스크린을 통한 5월 광주의 재현은 학살 동조세력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운동에 있어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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