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다 슈이치 감독의 <모리의 정원>(2018)을 보고, 그의 출세작인 <남극의 쉐프>(2009)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19'로 인해 바깥 활동이 어려워졌을 때부터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남극을 대표하는 펭귄조차 보이지 않는 황량한 얼음 벌판 위에서 400일 이상 자발적으로 고립된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남극의 쉐프>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카모메 식당>에 이어 영화로도 화제가 된 <리틀 포레스트> 시리즈와 함께 훗날 한국 방송계에 대대적인 붐을 일으킨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의미의 신조어) 예능의 모티브로 작용한다. 

언제 <남극의 쉐프>를 봤는지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꽤 유쾌하고 즐거운 힐링영화라는 잔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물론 2020년 4월 다시 본 <남극의 쉐프> 역시 여전히 즐겁고 명랑하고 유쾌한 힐링 영화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장면들을 이제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다는 정도였다. 아무튼 오랜만에 다시 본 <남극의 쉐프>는 마냥 따뜻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영화 <남극의 쉐프>(2009)

영화 <남극의 쉐프>(2009) ⓒ 스폰지

 
실제 남극 돔 후지 기지에서 조리를 담당했던 니시무라 준의 에세이 <재미있는 남극요리인>을 영화로 재구성한 <남극의 쉐프>는 남극관측기지 조리대원 니시무라(사카이 마사토 분)가 장장 1년 반 동안 이어가는 남극 생활을 조명한다. 애초 남극 파견이 예정된 동료의 사고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남극에 가야 했던 니시무라는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남극에 당도한 7명의 남자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져야 한다.

남극에 파견되기 전에도 해군 함선 조리대원으로 일했던 니시무라는 남극에서 본업인 요리 외에도 대원들 연구 보조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해야한다. 니시무라와 함께 남극에 파견된 대원들 또한 자신의 주 업무에만 매달릴 수 없다. 다른 남극 기지와 소통 조차 원활하지 못한 대원들은 식사는 물론 청소, 빨래, 장비수리, 심지어 의료까지 기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그들 손으로 직접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남극기지의 핵심 업무를 수행하는 기상학자, 빙하학자, 대기학자를 제외하고 남극에 파견된 대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차량담당, 통신담당, 의료담당, 조리담당으로 분류된다. 조리대원인 니시무라를 제외하고 의식주와 관련된 대원이 따로 파견 되지는 않았다. 이 말은 즉슨, 요리를 제외한 청소와 빨래와 같은 가사노동은 대원들이 직접 해결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영화 <남극의 쉐프>(2009)

영화 <남극의 쉐프>(2009) ⓒ 스폰지

 
하지만 남극기지에 오기 전 대원들은 자기 집에서 빨래, 청소 등 가사노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대개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 혹은 애인으로 그려진다. 니시무라가 남극 파견을 망설였던 것도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한다는 점 때문이었고, 빙하학자라는 직업특성상 남극에 올 수밖에 없는 모토(나마세 카츠히사 분)은 오래 전부터 남극행을 반대하는 아내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허나 가족 때문에 남극행을 망설였던 니시무라가 이것만으로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가정적인 남편으로 보여질 수 있을까. 남극에 파견되기 전 해군대원들의 식사를 담당했던 니시무라는 정작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가부장적인 남편으로 돌변한다. 쉬는 날 니시무라가 온종일 거실에 누워 TV만 보는 동안, 갓난 아들의 독박육아와 살림, 식사차림 노동 모두 전적으로 니시무라 아내의 몫이었다. 심지어 니시무라는 아내가 아들 밥 먹이느라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도 아내가 만든 닭튀김을 타박하기 일쑤다. 

본업이 요리사인데 정작 집에서는 가족을 위한 음식조차 만들지 않는 남자. 물론 일터에서 온종일 음식 냄새에 시달렸을 니시무라에게는 집에서까지 요리를 하고 싶지 않은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이유로 집에서는 어떠한 가사 노동도 하지 않으려는 남자는 비단 니시무라뿐만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는 집 바깥에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것이 공식처럼 여겨진 시절이 있었다. 

영화는 1997년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니시무라와 같은 남자는 가족 생계 부양만 열심히 하면 좋은 남편,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보다 3년 전, 서울 대치동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벌새>에서 주인공 은희의 부모님은 공동으로 떡집을 운영하지만, 가사노동과 식사차림 노동은 온전히 은희 엄마가 감당해야할 몫이다. 부부가 함께 떡집을 운영해도, 은희 아버지가 가사노동에 참여하거나 도움을 주는 장면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요즘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이 생계를 부양하는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남성들 또한 전보다 가사노동에 많이 참여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처럼 여겨진다.
 
 영화 <남극의 쉐프>(2009)

영화 <남극의 쉐프>(2009) ⓒ 스폰지

 
23년 전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남극의 쉐프>가 불편하게 느껴진 이유는 그래서였다. 집에서 사소한 가사 노동조차 도와주지 않는데 가족을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이유로 가정적인 남편, 아버지로 면죄부를 주는 듯 했기 때문. 그리고 가사, 돌봄 노동은 오로지 여성들의 역할로 한정짓는 프레임에 있었다.

니시무라는 남극에서 대원들 식사 차림 노동은 물론, 때로는 오랜 고립 생활로 실의에 빠진 대원들의 몸과 마음을 챙기는 돌봄 노동까지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귀국 후에는 여전히 집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TV만 보는 남편이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TV보기를 좋아했던 큰 딸이 TV가 아닌 외모 가꾸기에 몰두한다는 것. 

그리고 <남극의 쉐프>보다 23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긴 하지만, <모리의 정원> 역시 남성은 예술(사색) 활동과 육체 노동 담당, 여성은 가사, 돌봄 노동 담당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오키타 슈이치의 영화 속 남성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완벽한 '소확행'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남극의 쉐프>는 그저 유쾌한 '소확행' 영화로만 바라보기에는 씁쓸한 장면이 두드러지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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