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서울 삼성과 울산 현대모비스의 경기에서 울산 양동근이 드리블하는 모습.

울산 현대모비스 양동근이 드리블하는 모습. ⓒ 연합뉴스

 
한국 프로농구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울산 현대모비스의 심장' 양동근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소속팀 현대모비스는 3월 31일 양동근의 은퇴소식을 밝혔다. 2004년 프로 입단 이후 상무 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오직 현대모비스에서만 14시즌을 활약한 양동근은 유재학 감독과 함께 총 6번의 정규리그 우승과 6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함께하며 '현대모비스 왕조'를 구축한 쌍두마차였다.

개인 타이틀도 화려하다. 2005년 신인상을 비롯해 총 4번의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 3번의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했고, 한국농구연맹(KBL)이 선정한 베스트5에 9회 선정됐다. 팀 우승을 포함하여 모두 KBL 최다 개인수상 기록이다. 이밖에 최우수 수비상은 2회, 수비 5걸상 3회, 모범선수상은 2회를 수상했다. 명실상부하게 21세기 KBL을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산 기록은 명성에 비하면 아주 화려하지는 않다. 프로 14시즌동안 정규리그 665경기에 출전해 평균 11.8득점, 5어시스트, 2.9리바운드, 1.5스틸을 기록했다. 그나마 가장 돋보이는 기록은 통산 어시스트(3.126개)로, 주희정(5,381개)과 이상민(3,583개)에 이어 역대 3위에 이름을 올렸다.

국가대표 경력도 빼놓을 수 없다. 양동근은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첫 성인 국가대표팀에 승선한 이래 2015년 아시아선수권까지 10년간 한국 농구대표팀 부동의 주전 포인트가드로 활약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농구가 이란을 제치고 12년 만의 금메달을 따내는데 주역으로 활약했다.

프로 데뷔 초, 저평가 받았던 양동근

농구선수라면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커리어를 달성한 양동근이지만 사실 그의 농구인생이 시작부터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양동근은 프로 데뷔 초창기까지만 해도 저평가를 받았던 선수에 가까웠다. 용산고-한양대를 졸업하고 신인 1순위로 모비스에 입단했지만 당시만 해도 양동근이 프로무대에서 이 정도로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지금이야 공격력을 갖춘 '듀얼가드'가 각광을 받는 시대지만, 양동근의 데뷔 시절만 해도 한국농구에서는 아직 이상민, 강동희, 주희정, 김승현 같은 '천재형' 정통 포인트가드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던 상황이었다. 팬들의 눈높이에서 화려한 패스나 경기운영능력을 갖추지 못했던 양동근은 플레이 스타일상 '단신 슈팅가드'에 가깝다거나 '모비스 시스템에만 최적화된 선수'라는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실제로 모비스에서의 첫 우승(2006-07) 당시만 해도 모비스의 경기운영은 패스능력이 뛰어난 '포인트 포워드'였던 고 크리스 윌리엄스가 양동근의 리딩부담을 상당히 덜어주는 형태였다. 포인트가드로서 양동근의 역량에 대한 저평가는, 그가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했던 국가대표팀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더 두드러졌다.

하지만 양동근은 특유의 노력과 열정을 바탕으로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양동근에게는 역대 어느 전설적인 선배 포인트가드들도 갖추지 못했던 강철같은 체력과 내구성, 안정적인 수비력을 가졌으며 꾸준한 발전 의지가 있었다. 

양동근은 KBL 역사상 최고의 '공수겸장'으로 꼽힌다. 허재나 스테판 커리 같은 공격형 가드들이 득점에 집중하기 위하여 종종 수비에서는 힘을 아끼는 것과 달리, 양동근은 매 경기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면서 수비에서는 상대 에이스급 선수를 전담으로 틀어막는 게 가능했다. 

공격과 수비에서 기복 없이 똑같은 100%의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강철같은 체력과 활동량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선수시절 뛰어난 기술에도 불구하고 양동근과의 매치업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전태풍은 양동근의 플레이를 가리켜 '짐승 같다'고 표현할 만큼 그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농구선수로서 전성기를 넘긴 30대 중반 이후에도 양동근에게는 그 흔한 에이징 커브(전성기를 지나 성적이 노쇠화로 접어드는 시기) 조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수경력 내내 큰 부상이나 슬럼프가 거의 없었을 만큼 '꾸준함'은 역대 어느 선수보다도 독보적인 양동근만의 진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됐다. 

또한 스타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전혀 없었다는 것도 양동근의 장점이다. 양동근은 초창기 유재학 감독의 혹독한 조련을 받으며 매일같이 혼나면서도 지적을 수용하여 자신의 단점을 고치기 위하여 노력하고 연구한 일화는 유명하다.

팀 사정에 따라 같은 포지션에 김시래-이대성 같은 선수들이 입단했을 때는 과감하게 주전 포인트가드나 메인 볼핸들러의 자리를 양보하고 조연으로 물러나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양동근이라는 든든한 베테랑이 중심을 잡아줬기에 모비스는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많은 선수들이 팀을 거쳐가면서 특유의 색깔을 잃지 않고 강팀으로 장기집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양동근에게는 스타보다는 리더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양동근의 전성기, 한국농구의 암흑기

한편으로 양동근이 한창 전성기를 보내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한국농구의 암흑기였다. 대표팀이 국제무대에서 최악의 성적을 잇달아 경신하는 흑역사를 수립할 때마다 주전 가드였던 양동근도 덩달아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동근은 묵묵히 대표팀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하마터면 역적이 될 뻔했다가 마지막에 영웅으로 기사회생했던 2014 아시안게임 결승 이란전은 양동근의 파란만장했던 대표팀 경력을 구원해준 '마지막 선물'과도 같았다. 만일 양동근마저 없었다면 한국농구의 2000-2010년대는 훨씬 더 암울했을 것이다.

포지션은 다르지만 양동근이 걸어온 농구인생이나 스타일은 NBA의 전설적인 파워포워드였던 팀 던컨(샌안토니오)과 흡사하다. 선수생활 내내 한 팀의 원클럽맨으로서 왕조를 개척했다는 것이나, 오랜 세월 화려함보다 기복없는 꾸준함이 돋보였던 농구스타일, 팀을 위하여 에이스에서 조연으로 세월의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였던 열린 자세 등이 흡사하다.

양동근은 한국 나이로 40세가 된 올해에도 경기당 평균 28분24초, 10득점, 4.6 어시스트, 2.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지만 시즌이 조기종료되자 미련없이 은퇴를 선언했다. 화려한 농구인생을 걸어왔음에도 역시 별다른 이벤트없이 조용히 은퇴를 선언했던 던컨과 비슷한 행보다.

역사적으로 양동근보다 더 재능있는 선수, 단기적으로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들이라면 여러 명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동근이 'KBL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현대 프로농구 선수들의 모범이 될만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한국농구와 팬들은 아마도 그 어떤 선수보다도 오랫동안 양동근의 빈 자리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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