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마당우리 초기 회원으로 80년대 이후 독립영화 교육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낭희섭 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의 청년 시절 모습

영화마당우리 초기 회원으로 80년대 이후 독립영화 교육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낭희섭 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의 청년 시절 모습 ⓒ 낭희섭 제공

 
서울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으로 이어지던 80년대 초반 영화운동의 흐름에서 1984년 3월 새로운 영화모임이 생겨난다. 신촌에 있던 문화공간 우리마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영화마당우리였다. 영화관련 행사 등을 오가며 서로를 알게 된 신촌 영화마당 설립자 김기종과 낭희섭, 정성헌이 모임의 결성을 주도했다. 김기종은 지난 2015년 3월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마크 리퍼트 대사를 피습한 사람이다.
 
낭희섭에 따르면 '영화마당우리'는 젊은 청년 등이 영화에 대한 고민 등을 나누다가 직접 만들기 위한 모임으로 발전하게 됐다. 프랑스문화원 씨네클럽에서 활동하던 외국어대 문명희와 성균관대 한정석 등 5명이 발기인이 됐고, 주로 대학 재학생들이었다.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한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일부 회원으로 참여했다. 독일문화원에서 학생들에게 제공되던 모임 공간 지원 등이 끊어진 때였기에 영화사 기획실 등을 찾아다니며 정성헌의 주도로 스터디를 했다.
 
동서영화연구회 회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1984년 3월 동서영화연구회가 사실상 해체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1982년 9월에 가입해 1984년 3월까지 활동했던 전찬일(영화평론가, 전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은 "당시 중앙대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영문원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며 "안팎으로 동서영화연구회 노선에 대한 이견들이 생기면서, 주도해 오던 세미나에서 손을 떼게 됐고, 공식적으로 해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모임이 진행되지 않으면서 2주 뒤에 사실상 해체됐다"고 말했다. 이어 "동서영화연구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정성헌이 이후 문화원에서 교류하던 김기종 과 함께 영화마당우리에 참여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1979년 독일문화원을 다니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동서영화연구회는 3년 만에 활동의 막을 내린 것이다. 전찬일은 "대학에 입학(1981년)하자마자 프랑스 문화원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영화에 빠져들던 내가 전격적으로 영화 예술을 '공부'하게 된 것도, 대학 2학년 말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동서영화연구회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며 "독문학도였던 나는 그 이후로 그 조직이 와해되기까지 1년 6개월여를 영화에, 영화 스터디에 '미쳐' 살았다"고 회상했다.
 
또한 "동서영화연구회의 실질적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는 전양준(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다"며 "유현목 감독이 초대 회장이었는데, 생전 유현목 감독께서 젊은이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써왔음에도, 훗날 후배들이 동서를 말하며 당신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는 걸 보면서 무척 서운하셨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영화마당우리는 문화원 세대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졌고, 먼저 활동하고 있던 서울영화집단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지향점을 가졌다. 서울영화집단이 제도권 영화로 통칭되던 충무로를 비판하며 영화가 민중과 호흡해야 한다는 민중영화 노선을 지향했다면, 영화마당우리는 큰 영화가 다룰 수 없는 사회적인 모순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대안으로서의 작은 영화를 추구하며 그 중간 지점에 위치했다. 한계에 부딪힌 당시 한국영화의 상황을 새로운 시선으로 돌파해 볼 수 있는 도구로써 작은 영화를 지향했던 것이다.
 
낭희섭은 당시의 활동에 대해 "충무로로 가느냐 아니면 새로운 대안을 찾느냐를 고민하는 시기였다"며 "영화법의 제한을 피하기 위해 영화제를 활용했다"고 말했다. 기존 검열과 표현의 자유가 제한됐던 한국영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8mm/16mm 영화를 고민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1984년 7얼 국립극장에서 열린 단편영화발표회

1984년 7얼 국립극장에서 열린 단편영화발표회 ⓒ 독립영화협의회 제공

 
영화마당우리의 초창기 활동에서 주목할 부분은 서울영화집단 등과 함께 1984년 7월 7일~8일 이틀간 국립극장에서 개최한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 발표회'다. 간단하게 줄여서 작은 영화제로 통칭된다. 영화마당우리가 지향했던 영화에 대한 고민들이 담겨 있는 행사였다.
 
지금은 독립영화로 불리고 있는, 당시 작은영화의 실체를 일반 대중에게 알린 최초의 영화제로서의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한국독립영화 역사에서 최초의 독립영화제로 평가하는 행사기도 하다. 슬로건은 중앙대 김의석(감독, 전 영진위원장)이 경제학자 E. 슘마허의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따와 제안했다.
 
참여한 개인과 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당시 활동하던 크고 작은 영화단체들이 대부분 망라돼 있다. 서울영화집단을 비롯해 동서영화연구회, 영화마당 우리, 한국영화아카데미, 프레임 동인, 중앙대와 한양대, 서강대, 경희대 등이 함께 준비했다.
 
서울영화집단에서는 홍기선과 문원립이 참여했고, 영화마당 우리에서는 정성헌, 한정석이 동서영화연구회에서는 신철, 안동규(영화세상 대표), 이덕신(감독), 한상준(전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 한국영화아카데미 유지나(동국대 교수), 김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용배(계원예대 교수), 황규덕(감독. 전 한국영화아카데미 교수), 김의석(전 영진위원장), 서울예술대학 조교 권영락, 프레임 동인으로 강한섭, 전양준, 정성일이 이름을 올렸다.
 
1984년은 한국영화아카데미가 개원을 한 해였기에 1기생으로 입학한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프레임은 동서영화연구회 이후 강한섭, 전양준, 신철, 정성일이 동인으로 활동하며 크라운 판형으로 한 번 발간했던 계간지였다. 전양준은 "당시 홛동했던 때가 동서영화연구회와 서울영화집단 이후 대학을 졸업 직전쯤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동서영화연구회 이름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이전 회원들이었다. 전찬일은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다들 1984년 이전에 활동했던 분들이고, 동서영화연구회가 활동을 종료하던 84년 3월까지 있던 사람은 조재홍, 이덕신(감독) 정도"라고 말했다.
 
작은 영화제에서는 모두 6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장길수 감독의 <강의 남쪽>, 서영수 감독 <문>, 최사규 감독의 <숭의 눈물>, 서울영화집단 <아리랑 판놀이>, 황규덕 감독의 <전야제>, 김의석 감독의 <천막도시> 등이었다. 프랑스문화원 토요단편영화와 각 대학 영화과 영화제 상영작, 연우무대 단편영화상영회와 청소년영화제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후보작이 추려졌다. 심사위원은 강한섭, 전양준, 정재형, 홍기선 등이었다. 1차 심사를 통해 64편으로, 2차 심사를 통해 16편이 언급됐다. 이중 갑작스런 행사 일정 변경과 오해 등으로 인해 12작품을 대상으로 프로그램 진행부였던 정성일의 진행으로 최종 6편이 선정됐다.
 
<강의 남쪽>은 1980년 제작돼 1982년 프랑스문화원에서 열리던 '토요단편'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영화였고, <문>은 1983년 9회 청소년영화제 대상 수상작이었다. <아리랑 판놀이>는 서울영화집단의 창립 작품이었고, 8mm 영화 <전야제>는 서울영화집단 황규덕과 문원립이 연출과 촬영을 맡은 작품이다. <천막도시>는 서울영화집단에서 초기에 활동했던 김의석이 각본과 연출을 맡고, 영화마당우리 발기인 정성헌이 촬영한 1983년 청소년영화제에서 우수상 수상작이었다.
 
6편의 영화는 하루 2회씩 이틀 간의 상영됐는데, 300명의 관객을 불러 모으며 성공적인 행사로 끝났다. 당시 영사기를 담당하는 실무진으로 참여했던 낭희섭은 "안성기 배우까지 영화를 보러 왔었다"며 "관객이 많아 수익을 낼 정도였다"고 말했다.
 
행사를 준비한 이들 젊은 영화인들의 마음가짐은 자료집에 실린 취지문에서 드러난다. '단편영화동인' 이름으로 발표한 '단편영화발표회에 붙여'라는 제목으로 당시 한국영화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이들은 영화법 개정의 필요성을 촉구한다.
 
작은영화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실천
 
 1985년 시작된 영화마당우리 워크숍. 이후 작은영화워크숍을 거쳐 현재는 독립영화워크숍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5년 시작된 영화마당우리 워크숍. 이후 작은영화워크숍을 거쳐 현재는 독립영화워크숍으로 이어지고 있다. ⓒ 독립영화협의회 제공

 
1984년 작은 영화제는 한국영화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점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으로 이어지며 민중영화를 지향하던 노선과 영화마당우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한국영화를 지향했던 이들이 함께 모여 만든 행사라는 것에 있다. 80년대 초반의 영화운동 역량이 결집된 행사로 평가해 볼 수 있다.
 
물론 당시의 행사가 정부의 통제를 받은 부분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전양준은 이듬해인 1985년 창간된 계간지 <열린영화>에 쓴 글 '작은 영화를 위하여'에서 "작은영화제 행사가 정부의 지원을 받은 관의 통제를 받으며 보수주의 영화들로 이뤄졌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낭희섭 역시 "오류도 있었다"며 "행사장소를 관에서 허락받아야 하는 관계로 전날에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욱관광부)로부터 검열 아닌 검열을 받아야 했다"며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서 입장 차이가 드러나기도 했다. 행사를 접자는 쪽과 홍보가 됐으니 이런 사정을 관객에게 알리고 강행하자는 의견이 대립했으나 강행으로 결론이 났다. 누군가는 필름을 들고가야 하는 악역을 맡았고, 행사는 방해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런 행사가 처음이고 선례가 없었지만, 검열관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처음의 논의와 다르게 인쇄된 자료집까지 혹시나 문제 될 수 있는 부분을 우려해 검은 펜으로 지우는 자기 검열을 망연히 지켜보게 됐다."
 
이후 작은 영화제는 더 이어지지 못하고 한 번으로 끝났지만, 1985년 시작된 영화마당우리의 워크숍에 영향을 끼친다. 85년 시작된 영화 워크샵이 30년이 넘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영화제의 영향으로 출발했다. 독립영화워크숍의 첫 출발이었다.
 
작은영화 의미에 대해 전양준은 '작은영화를 위하여'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1984년 국립극장 실험무대에서 열린 작은영화제는 처음으로 단편영화인들이 함께 한 뜻깊은 자리였는데, 작은영화의 사회적 기능과 작은영화집단의 활성화 방안을 토론하고 8mm/16mm 영화에 대한 기존의 모든 호칭들을 작은영화로 통일한 최초의 공동모임이었다.
 
작은영화는 1984년 5월 이후 만들어진 신조어로서 과거이 명확한 구분없이 사용됐던 단편영화 소형영화 실험영화라는 용어들을 폐기하고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작은영화를 통해서 구체화하려는 작은영화인들의 의지가 담긴 말이라 하겠다."

 
전양준은 이 글에서 "단편영화계의 모습이 큰 영화계의 현실과 별로 다를 것이 없고 대부분의 단편 영화인들의 영화 메커니즘 이해 혹은 전위예술이라는 구호하에 큰 영화보다 더 보수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저질 작품들을 양산해 냈으며, 또 관 구조의 청소년영화제에 참가하여 계몽, 정책영화를 만들기도 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작은영화인들은 작은영화가 결코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면서 "작은영화는 '단편영화=대항영화'라는 기존의 개념을 한국식으로 붙인 용어에 불과한 것으로, 작은영화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연결돼야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작은영화워크숍의 시작
 
 1987년 겨울 영화마당우리 사무실에서의 16mm 영화 촬영 현장

1987년 겨울 영화마당우리 사무실에서의 16mm 영화 촬영 현장 ⓒ 독립영화협의회 제공

 
1985년 1월 '영화마당우리'는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라는 작은 영화제의 정신을 계승하며 신촌에서 첫 번째 작은영화워크숍을 개최한다. 비제도권에서 영화이론이 아닌 제작실습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영화학교가 생겨난 것이다. 영화에 관심은 있었지만 비전공이었기에 굳이 영화를 전공하지 않더라도 실습 중심의 영화 제작을 교육받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 것은 이후 독립영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기자재가 부족한 상황이었음에도 33명이 온전히 수료한 것은 그만큼 제작을 경험할 수 있는 데 따른 참석자들의 기대치가 컸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홍기선 등 서울영화집단이 강사진으로 참여했고, 담당조교를 영화마당우리가 맡으면서 낭희섭은 실습조교로 참여하게 된다.

첫 번째 워크숍을 수료한 사람은 변재란(영화평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조직위원장), 권칠인(감독, 전 인천영상위원장 운영위원장), 이정향(감독, <집으로> 연출), 김형구(전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 대표), 박현철(촬영감독)등이었다.변재란은 "작은영화 워크숍 등을 통해 홍기선 감독을 알게 됐고, 이후 서울영화집단의 책 번역 등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하영(전 시네마서비스 이사, 책 <배급과 흥행> 저자)도 작은영화워크숍을 통해 영화마당우리에 합류한다. 이하영은 "1986년 1월 작은영화워크숍에 참여했다며 담배 연기가 싫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이하영은 이후 군에 입대해 복무를 마치고 다시 영화마당우리를 찾았다가 1991년 영화사 신씨네를 통해 충무로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낭희섭은 "1회 작은영화워크숍 이후 90년 독립영화협의회가 발족하여 1991년 1월에 1회 독립영화워크숍으로 승계되기 이전까지 외부 지원 없이 비제도권으로 신촌의 문화공간 우리마당에서 회비를 받아 동계, 하계 방학기간에 계속적으로 개최한 것은 의미가 크다며 사립대학의 영화학과도 아니고 국립의 영화아카데미 아닌 곳에서 영화제작, 필름확보, 배급 등의 역할을 담당하며 영화운동을 지원했다는 것은 평가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작은영화워크숍을 수료하고 학교로 복귀한 친구들은 대학 써클을 결성하거나 작은 영화제를 개최했고, 써클 자체 역량으로 이화여대 '누에'는 <시발> , 외국어대 '울림'은 <울림>, 한양대 '소나기'는 <인재를 위하여> 등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1988년 영화마당우리가 펴낸 <극복의 영상들 1>

1988년 영화마당우리가 펴낸 <극복의 영상들 1> ⓒ 영화마당우리

 
영화마당우리는 1988년 <극복의 영상들 1>을 펴낸다. 1970년대 세계문제작 시나리오 및 작품연구집으로 <택시 드라이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욜>, <에니홀> 등 외국의 주요 작품의 시나리오를 정리한 책이다. 낭희섭에 따르면 "시나리오를 못 구하는 경우 직접 비디오 테이프를 몇번이나 보면서 대사를 번역했다". 기획과 책임편집은 이정국(감독, 세종대 교수)가 맡았고 박찬욱(감독), 전찬일(영화평론가), 양윤모(영화평론가) 등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1980년대 후반 영화마당우리는 이언경, 권은선(영화평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홍효숙(전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이원재, 윤미희, 강미자, 박만규, 이재희, 김윤택, 허현숙, 이규택 등이 합류한다. 권은선은 1989년 영화마당우리에 합류했는데, 여성영상공동체인 '바리터'에서도 활동했다. 권은선은 "충무로 영화마당우리 사무실을 드나들었고, 이후 만들어진 '영화공간 1895'에서도 활동했다며 영화마당우리를 통해 이하영, 김영진 선배 등을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마당우리는 1990년 1월 31일 6개 단체가 참여한 한국독립영화협의회(약칭 독영협)가 창립되고 1991년 독영협이 단체별 가입에서 개인 가입으로 전환되고 분과체제가 되면서 활동을 마무리한다.
 
낭희섭은 "1991년까지 영화마당우리라는 이름으로 활동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활동이 약해지기 시작한 1989년에 이언경이 만든 '영화공간 1895'가 영화마당우리를 잇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봉준호가 영화의 꿈 키웠던 영화공간1895
 
 '영화공간1895'에서 활동했던 이하영(오른쪽)과 이재용 감독

'영화공간1895'에서 활동했던 이하영(오른쪽)과 이재용 감독 ⓒ 이하영 제공

 
'영화공간1895'는 시네마테크 운동을 표방했던 곳이다.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도 변변한 책 하나 없고, 영화를 보고 싶어도 볼 수도 없으며, 국내에서 출판된 원서로 된 영화 서적(루이스 자네티 의 < understanding movies >)을 겨우 구해 복사해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영화를 책으로만 공부한다는 것에 회의감을 느낀 영화마당우리 출신 20대 초반의 이언경(당시 연세대 영문과 재학, 작고)은 결혼자금으로 1988년 마포구 공덕동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얻어 '영화공간1895'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시네마테크'를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저 책에 나온 영화를 어떻게든 구해서 보고 싶다는 것, 그리고 같이 공부할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언경과 함께 '영화공간1895'를 시작한 이하영은 "1988년 군대에서 제대한 후 낭희섭을 찾아갔을 때 이언경을 만나보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됐다"며 "이념을 떠나 매우 자유롭게 영화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고 회상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의기투합해 유학 간 영화인들이 각 나라에서 보내 준 비디오와 LD(LaserDisc)를 카피해서 채워가는 방식으로 영화 수집에 더 열을 올린다.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당시 시네필들이 여기저기서 모이기 시작한다. 이하영은 "이진욱까지 포함해 3명이 중심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강의와 워크숍에 누벨바그영화제, 언더그라운드시네마영화제, 네오리얼리즘영화제, 에로영화제, 짐자무쉬영화제, 레오까락스영화제 등등 수많은 영화제를 진행했고, 시네마테크로 자리를 잡게 된다.
 
대학 여름방학 기간 중 하루 2시간씩 12회 강의로 진행된 '24시간 영화학교'에는 당시 경성대 교수였던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성일(영화평론가), 이효인(영화평론가), 이정국(감독, 세종대 교수) 등의 강의가 개설됐다. 영화제작 워크샵인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UCLA 출신인 이광모(영화사 백두대간 대표)과 박현철(촬영감독) 등이 맡아서 진행했다.
 
각종 스터디도 그룹으로 만들어져 매주 약 6개의 스터디그룹이 진행되었다. 이후 출판사업까지 진행하여 계간지 <영화언어>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론>(김용태 감독 저)' 등의 책을 출간한다.
 
 1989년 민간 시네마테크 '영화공간1895' 대표였던 이언경(2009년 작고).

1989년 민간 시네마테크 '영화공간1895' 대표였던 이언경(2009년 작고). ⓒ 이하영 제공

 
1993년 이언경이 영화감독으로 충무로 진출을 모색하고, 이하영은 영화제작으로 가게 되면서 '영화공간1895'를 '씨앙씨에'로 넘기며 마무리된다. 비디오 대여공간 역할도 했던 씨앙씨에'로 넘어간 VHS는 이후 다시 '문화학교 서울'로 흘러갔다. 이언경과 이하영은 몇 년 후 다시 의기투합해 이하영이 구해온 자금을 바탕으로 '씨네디비넷'이라는 회사를 차렸고,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dbdbdb.com)를 을 만든다.
 
'영화공간1895'는 영화청년 봉준호가 영화를 공부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은 "1991년 7월 24시간 영화학교라는 강좌를 꽤 열심히 들었는데, 나중에 봉 감독도 그 강좌를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하영은 한때 가장 활발했던 영화공간으로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에 대학생이었던 영화인들은 상당수가 거쳐 갔을 것이다"라며 "이제는 고인이 된 이언경이 너무 그립다"고 말했다. 또한 "92회 아카데미상 수상자인 봉준호 감독도 여기 '24시간 영화학교'에 참여했었고 '영화공간1895'에서 영화자료(비디오)를 가장 많이 본 사람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낭희섭은 '영화공간1895에 대해 "당시 영화법은 민간 차원의 활동은 불법이라 탄압의 대상이었지만 국내 최초 시네마테크로서의 구할 수 없는 명작들을 동호인들과 함께 감상하고 토론할 수 있게 한 역할은 매우 소중했다"고 평가했다.
 
영화청년 봉준호는 영화공간1895의 강좌를 듣고 학과 선배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1993년 첫 단편 <백색인>을 제작한다. 당시 촬영 기자재는 낭희섭의 독립영화워크숍(이전 작은영화 워크숍)에서 빌려줬다.
 
낭희섭은 "영화아카데미를 입학하기 이전에 서울지역의 인프라를 통하여 완성한 영화청년 봉준호의 첫 단편영화 연출작이 이후 아카데미에서 완성한 단편영화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완성도가 높았다"고 강조했다. 또한 "당시 연출부를 구하고 있던 박찬욱 감독이 <백색인>을 보고 시나리오작업을 함께 하려고 연락했으나, 봉준호가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중이라 불발된 것으로 안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영화감독 봉준호가 성장한 바탕에 한국영화운동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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