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의 나라> 영화 포스터

▲ <성혜의 나라> 영화 포스터 ⓒ 닷팩토리


지방에서 상경하여 반지하 월세 집에서 사는 스물아홉 살 성혜(송지인 분).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턴으로 들어갔으나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동료들의 외면 속에 강제 퇴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지금은 낮에는 취업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편의점과 신문 배달을 하며 힘겹게 생계를 꾸려간다.

그런데 성혜와 가까운 사람들은 도움을 주기보단 부담만 더한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했고 어머니는 경제적인 도움을 바라는 눈치다. 7년 동안 만난 남자 친구 승환(강두 분)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제대로 하질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주인은 보증금을 올려달라 요구한다. 하루하루가 힘겹던 어느 날, 뜻밖의 일로 인해 성혜의 인생은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성혜의 나라> 영화의 한 장면

▲ <성혜의 나라> 영화의 한 장면 ⓒ 닷팩토리


영화 <성혜의 나라>는 점점 꿈을 잃어가고 미래를 향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고단한 청춘을 소재로 삼았다. 장편 데뷔작 <여수 밤바다>(2017)에서 코믹한 로드 무비를 선보였던 정형석 감독은 두 번째 연출작 <성혜의 나라>는 차갑고 건조한 화법을 사용한다.

영화의 결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잡식성'이라 소개하는 정형석 감독은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여수 밤바다>를 마친 후 '이번엔 가볍고 재미있는 작품이 아닌, 좀 더 주제 의식을 가진 작품을 만들자'고 생각했다"고 두 영화의 차이를 설명했다. 

<성혜의 나라>는 정형석 감독이 우연히 본 하나의 뉴스에서 시작됐다. 고시원에서 한 달 만에 발견된 청년의 죽음을 접한 그는 "청년은 왜 고시원에서 홀로 쓸쓸하게 죽어갔는가?", "청년이 죽음으로 내몰린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은 어떤가?"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졌다. 여기에 극단을 운영하며 보았던 젊은 배우들의 현실을 이야기에 녹여 기성세대(정형석 감독은 1980년대에 청춘을 겪었다)가 바라본 청춘세대의 이야기인 <성혜의 나라>를 한 줄 한 줄 썼다.

<성혜의 나라>는 성혜의 고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그린다. 스물아홉 살 청춘 성혜에겐 88만 원 세대, N포 세대가 겪는 실업 문제, 생활고 문제, 결혼 문제 외에도 성희롱 문제 등 오늘날 대한민국의 청년 세대와 관련한 여러 이슈가 투영되어 있다. 꿈, 사랑, 웃음을 잃은 암울한 현실 아래에서 성혜가 갖는 작은 소망은 애완견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가 애완견샵의 강아지를 유리 너머로 바라보는 성혜의 장면 뒤에 암전을 연결한 연출은 현실의 냉정한 경고장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몇 가지 상징적인 소품을 청년의 초상에 덧붙였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성혜는 돈을 아끼기 위해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하는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성혜는 교통비를 아끼고자 '자전거'로 이동한다. 반지하라 일부분에만 볕이 드는 '집'은 그저 잠만 자는 곳에 불과하다. 누군가에게 삼각김밥은 간단한 간식이고 자전거는 운동 수단이며 집은 휴식을 즐기는 공간이겠지만, 생활난에 쪼들리는 성혜에겐 일상은 모두 돈을 아끼는 방법과 연결될 뿐이다.
 
<성혜의 나라> 영화의 한 장면

▲ <성혜의 나라> 영화의 한 장면 ⓒ 닷팩토리


<성혜의 나라>는 흑백 영화로 제작되었다. 컬러 영화, 나아가 3D, 4D 영화까지 영화 기술이 진화한 지금, 흑백 영화는 영화감독의 독창적인 표현법으로서 기능한다. 해외에선 <토리노의 말>(2012), <백설공주의 마지막 키스>(2014), <프란시스 하>(2014)가 흑백 영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바 있다. 컬러로 개봉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과 <로건>(2017)은 나중에 흑백 버전이 따로 나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흑백 영화는 계속 나오는 중이다. <오! 수정>(2000), <북촌방향>(2011), <그 후>(2017), <풀잎들>(2017), <강변호텔>(2018)을 흑백 영화로 찍은 홍상수 감독이 흑백 영화 예찬론자로 유명하다. <지슬>(2012), <동주>(2016), <춘몽>(2016), <다영씨>(2018)도 최근에 선보인 대표적인 흑백 영화다.

앞서 언급한 한국 영화들은 제작비의 문제, 미학적인 선택, 시대상의 반영 등으로 흑백을 선택했다. 반면에 <성혜의 나라>는 영화의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 흑백으로 촬영되었다. 정형석 감독은 "이야기가 너무 현실적이다 보니 판타지처럼 느껴지도록 표현하고 싶었다"며 거리감을 부연한다.

흑백은 성혜의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답답하고 억압된 심리를 반영하는 표현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선 청춘의 힘겨운 분투기를 조명했던 독립 영화 <경복>(2013), <내가 사는 세상>(2019)의 흑백과 맥을 같이 한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청년이 바라본 세상은 색깔을 잃어버린 '흑백'이라고 본 것이다.
 
<성혜의 나라> 영화의 한 장면

▲ <성혜의 나라> 영화의 한 장면 ⓒ 닷팩토리


줄곧 성혜의 일상을 좇던 영화는 후반부에 "어느 날, 거액이 생긴다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하고 싶죠?"란 질문을 던진다. 다음으로 성혜의 선택을 보여준다. 이 결말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들에 비해 논쟁적이며 파격적이다.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초등학생이 장래 희망으로 건물주를 꼽는 세태, 땀(노동)이 아닌 땅(부동산)이 존중받는 가치관을 반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 <성혜의 나라>는 결국 '성혜가 살고 있는 나라'란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스템을 만든 원인은 기성세대에 있다. <성혜의 나라>는 '청년들이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들지 못한 기성세대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영화 속 성혜의 말, "지금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하나도 모르겠어"는 이 시대 청년들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담은 한 마디다. 어린이의 꿈이 공무원 시험 합격이나 부동산 임대업자인 나라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부문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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