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 예능을 보다가 문득 이런 말을 내뱉게 됩니다. "다시 태어나면 저 캐릭터(사람)처럼 살고 싶다." '2020은 이 사람처럼'에서는 닮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 속 캐릭터(사람)들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새벽까지 드라마 대본을 쓰다가 아침이 밝아오면 깜빡 잠이 든다. 열 시가 채 되기 전 눈을 뜨고, 야심 차게 쓴 글을 다시 읽다 보면 전기세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본 듯하고, 진부하고, 새로울 것 없고, 주제도 선명하지 않고 재미도 없고...

그저 내게 '습작의 시간이 필요했다'라는 주문을 외우며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근처 도서관으로 향한다. 제1 문헌실을 한 바퀴 돌고 제 2문헌실로 올라간다. 그저 손 가는 대로, 눈에 잡히는 대로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윽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미디어 실 문을 연다. 노트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자주 가다 보니 눈에 익은 사람들도 몇 보인다. 다들 무엇을 하는지 고개를 처박고 저마다의 세상에 들어가 있다. 나도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노트북을 열기가 겁난다. 어떻게 된 게 이 자리에만 앉으면 배가 고프든지 커피가 갑자기 당기든지 하다가, 갑자기 강아지 밥을 주고 왔는지 헷갈리고, 연락이 끊어진 친구가 잘 있는지 걱정돼 전화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잡념 대잔치.
 
대본을 쓰면서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흘러가 버린 것 같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누가 나를 믿어준다고. 금세라도 잡힐 것 같던 파랑새는 "약 오르지롱" 혀를 날름거리며 날마다 더 멀리 날아가 버린다. 어떤 날은 그만둘까 싶다가도 어떤 날은 약이 올라 이판사판 짱돌이라도 확 던져서 맞춰버리고 싶다. 약이 오른 마음과 좌절하는 마음이 얽혀 요상한 증상이 생겼다. 평소라면 나처럼 긍정적이고 태평한 사람을 찾기 힘들 텐데, 이제 나도 드디어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 되었다. 예술가의 기질 획득! 이제 글만 쓰면 된다.

콜레트와 오드리 햅번의 만남
 
 오드리 헵번과 콜레트

오드리 헵번과 콜레트 ⓒ 위키피디아


글은 안 써지고 뭉개진 자존감을 회복시켜줄 뭔가가 필요하다. 여기저기 검색하다가 눈이 행복해지는 사진을 발견했다. 얼굴만 봐도 미소가 번지는 그 이름 오드리 헵번. 환하게 웃으며 공중부양하는 그를 보니 발로 대본을 써도 그가 연기해 주면 명작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명인 오드리를 보고 스타성을 단박에 알아본 이가 있었으니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 1873~1954)'다. 콜레트는 20세기 초 프랑스 문화의 아이콘인 작가다. 여성 최초로 콩쿠르 아카데미 회장을 역임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그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질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나의 워너비 작가인 콜레트와 오드리가 만나 불꽃이 튀었다. 1951년, 78세의 콜레트는 22살의 오드리를 보자마자 자신이 쓴 소설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지'의 주인공으로 낙점하고 자신 없어 망설이는 오드리를 설득했다. 연극이 막이 올랐고, 오드리는 콜레트의 손을 잡고 날아올랐다. 곧이어 1953년, 로마의 휴일이 개봉하면서 전 세계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오드리 헵번이 탄생했다.
 
바로 이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지난해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으로 개봉한 <콜레트>다. 콜레트는 프랑스 작은 시골 마을 태생으로 14살 연상의 편집자 윌리와 결혼해서 파리로 온다. 파리 생활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콜레트는 윌리의 낭비벽에 경제적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클로딘'이란 소설을 쓰는데 이게 전 프랑스를 휩쓸어 버린다. 하지만 문제는 출판이 남편 이름으로 이뤄졌기에 모든 공로는 남편에게 돌아가고 콜레트는 혼란을 겪는다.
 
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클로딘 이름을 건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모두 완판을 기록한다. 다음 편을 출간해야 하는 남편은 콜레트를 감금하고 글을 쓰게 만들기까지 하는데 결국, 콜레트는 이런저런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영화 속 콜레트를 연기한 키이라 나이틀리가 역대 자신이 맡은 배역 중에 최고라 꼽을 만큼 콜레트는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내가 나로 오롯이 존재하는 삶
 
 영화 <콜레트> 스틸 컷

영화 <콜레트> 스틸 컷 ⓒ (주)NEW , (주)팬 엔터테인먼트


콜레트는 작가뿐 아니라, 배우, 댄서 등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도전했다. 여성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사회적인 관습이나 타인의 시선에 갇혀 살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택한 콜레트.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선택하고 개척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외려 낡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때때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나로 오롯이 존재하는 삶이 그때도 지금도 울림이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이 또한 나의 워너비인 이유다.

영화 속 '펜을 든 자가 세상을 바꾼다'라고 말했던 콜레트도 실제로는 매일 글 쓰는 일이 고통이라고 했다. 매번 새로운 것을 쓰지 못할 바에야 아예 글을 쓰지 말자고 다짐했던 무수한 시간이 있었으며, 글을 계속 써야 하는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두려운 날도 있었다. 오히려 두려움을 느껴야 안심했다고 한다. 어쩌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의 심정일 터. 콜레트를 떠올리며 나의 올해 목표를 되새긴다.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너무 멀리 보지 말 것. 그저 한 걸음만 내디딜 것.'
 
또 글은 못 썼지만, 오늘은 전기세만 낭비한 것 같지 않다. 나의 두려움과 불안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고 싶은 용기가 일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을 나오는데, 매일 보던 무인 도서 반납기에 적힌 문구가 새삼스레 내 마음에 박혔다.
 
"당신의 노력은 절대로 쓸데없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꼭 믿어주세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어야 합니다."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중에서.

 
나에 대한 믿음이 절실한 나는 혼자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콜레트는 오드리의 손뿐 아니라, 세기를 뛰어넘어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숨 쉬는 내 손도 잡아주었다. 먼 훗날 나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날이 어두워지면서 기온이 뚝 내려갔다. 코가 쨍하다.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푸는데, 눈물이 같이 나왔다. 안 슬픈데 눈물이 나는 건 힘든 건가? 씩씩하게 눈물을 닦으며 다짐한다. 콜레트처럼 펜을 들고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펜을 끝까지 붙잡고 응시하면서 내 틀, 내 편견, 내 무지와 생각이라도 바꿔보자. 적어도 내가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영화 <콜레트> 스틸 컷

영화 <콜레트> 스틸 컷 ⓒ (주)NEW , (주)팬 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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