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석규와 최민식이 같은 작품에서 20년만에 재회한다. 12월 26일 개봉예정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아래 '천문')에서 한석규가 세종을, 최민식이 장영실을 맡아 열연하며 벌써부터 관객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석규와 최민식은 동국대 연극영화과 동문으로 사적으로도 절친한 사이다. 두 배우가 한창 충무로의 스타로 부상하던 30대에는 한 작품에서 공동 주연으로 호흡을 맞춘 경우가 유독 많았다. 하나같이 장르도 캐릭터도 천차만별일만큼 두 배우의 폭넓은 연기와 도전 정신이 돋보인다. 당시에는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한석규가 메인이고, 최민식은 서브 주연에 더 가까운 포지션이었다. 2003년에는 최민식이 주연한 걸작 <올드보이>에서 한석규와 오랜만에 다시 동반 출연할뻔 했지만 결국 무산되며 최종적으로는 유지태가 캐스팅되기도 했다.

부드럽고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한석규와, 강렬한 메소드 연기에 능한 최민식은 색깔이 전혀 다르면서도 나란히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명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배우는 이제 어느덧 50대의 원숙한 미중년 배우로 진화하며 여전히 그 매력을 잃지않고 있다. 지금껏 두 배우가 함께한 전작들 역시 배우들의 이름값에 걸맞게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작들이다.

 
최민식과 한석규 배우 최민식(왼쪽)과 한석규가 27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점에서 열린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최민식과 한석규 배우 최민식(왼쪽)과 한석규가 27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점에서 열린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휴먼드라마 <서울의 달>, (1994, MBC 드라마)

대한민국 역대 주말극에서도 손꼽히는 레전드 드라마중 하나로 꼽히는 <서울의 달>은 30대 초반의 풋풋하던 한석규-최민식 조합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한석규는 낯선 도시에서 성공에 대한 야심에 불타는 홍식 역을, 최민식은 그의 고향친구이자 순박한 시골청년 춘식 역을 맡았다. 여주인공 영숙 역에는 채시라를 비롯하여 조연으로 이대근, 백윤식, 김용건, 나문희, 김원희, 고 여운계 등 명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훗날 한석규-최민식이 쌓아가게될 커리어를 이미 알고있는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다소 색다른 작품인데, 전작 <아들의 딸> 등을 통하여 한창 지적이고 점잖은 이미지를 구축해가던 한석규가 여자들을 유혹하고 친구까지 배신하는 능글능글한 사기꾼을 맡은 것이나, <야망의 세월>의 '꾸숑' 역할로 카리스마 넘치는 청춘스타의 이미지가 남아있던 최민식이 정많고 의리있는 시골청년 역할을 맡은 것이 그랬다. 

오죽하면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실수로 배역이 뒤바뀐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당초 홍식과 춘식 역에 먼저 섭외가 된 것은 유인촌과 김영철이었지만 배우들이 거절하여 후순위로 한석규과 최민식이 배역을 맡았다. 심지어 <서울의 달>을 집필한 김운경 작가는 처음 두 배우가 캐스팅되었을 때 '저 어린 것들이 이런 작품을 어떻게 소화하겠냐'며 몹시 불만스러워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이야기다.

물론 한석규-최민식 콤비는 드라마가 방영될수록 진가가 드러났다. <서울의 달>은 서민들이 모여사는 달동네를 배경으로 낡았지만 그래도 따뜻한 인정이 남아있던 과거, 자본주의 물결이 몰아치는 현대가 공존하던 1990년대의 시대상을 리얼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인공 홍식의 캐릭터를 상징하는 '보이스 비 앰비셔스', 극중 초보 제비로 등장한 김영배가 한석규에게 댄스 스텝을 가르치며 나온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같은 명대사들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작품성과 시청률, 진지함과 코믹함을 모두 잡아낸 완성도는 막장 드라마가 넘쳐나는 오늘날의 주말극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수작이다.

 
 <서울의 달>의 한 장면.

<서울의 달>의 한 장면. ⓒ MBC

 
블랙코미디 <넘버 3>(1997)

한석규와 최민식의 그야말로 작정하고 '망가진 연기'를 볼수 있는 유일한 작품. 한석규는 폭력 조직 도강파의 중간 보스 태주 역을, 최민식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깡패같은 검사 마동팔 역을 맡으며 영화 내내 신경전을 펼친다.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장발에 가죽 점퍼를 입은 한석규가 비웃는 표정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모습에서 이 영화가 범상치 않은 작품임을 예고한다. 한석규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에서도 조폭 연기를 소화한 바 있지만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의 전작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망가진 그의 모습은, 멜로 이미지로 그를 기억하던 팬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송능한 감독의 <넘버3>는 1990년대 흥행 장르로 통했던 뻔한 '조폭 코미디'의 하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 봐도 별로 유치하지 않은 개그 코드나, 나름의 사회 비판과 풍자의식을 담아낸 점에서 잘만든 '블랙코미디' 영화라고 할수 있다. 깔끔하고 경쾌한 스토리와 명확한 주제의식, 많은 등장인물들이 출연함에도 각각의 군상들이 하나의 중심 줄거리 안에서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캐릭터 쇼'로서의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석규가 연기한 태주는 3류 조폭(넘버3)이면서도 결국 위아래로 치이면서 조직의 서열과 사회적 성공에 집착하는 찌질하고 평범한 보통 남성들의 전형이기도 하다. 한석규의 출연작을 통틀어 여기저기서 얻어터지고 구박당하고 망가지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볼수 있는 작품이다. 평소 이미지와 다른 거친 욕설과 오버스러운 코믹 연기는 다소 어색해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극후반부 태주의 급격한 심경 변화에 자연스러운 설득력을 입히는 것은 역시 한석규라는 배우가 주는 신뢰감에서 비롯된다.

최민식이 연기하는 마동팔은 태주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한편으로 그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죄가 무슨 죄가 있냐', '조직은 키울 사람에게 피를 묻히지 않는다'는 촌철살인 어록 대부분은 마동팔이 책임진다. 적절한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기싸움으로 상대의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최민식의 맛깔스러운 '말빨'은 훗날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이나 <신세계> 강과장의 대사들과 비교할 수 있는 재미 요소다.

이 작품에서 한석규-최민식 이외에도 친숙한 명배우들을 대거 만날 수 있다. 훗날 또 다른 대배우가 되는 송강호가 불사파 두목 조필로 출연한다. 흥분하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배,배,배신이야"를 외치는 장면은 한동안 큰 화제가 됐다. 역시 한석규와 호흡한 <초록물고기>에 이어 연속으로 조폭 역할을 맡으며 한동안 송강호를 실제 깡패로 착각한 이들도 많았다. 하이틴 스타 출신 이미연이 한석규의 아내이자 호스테스 출신의 현지 역할을 맡은 것도 파격이었다. 무식한 조폭 '재떨이' 역할로 출연한 박상면도 이 영화를 통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블록버스터 첩보액션<쉬리>(1999)

'한국형 첩보액션 블록버스터'의 시작을 알린 강제규 감독의 <쉬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작비와 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다. 한석규는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요원 유중원을, 최민식이 테러를 주동하는 북한 특수 8군단 소속의 공작원 박무영 역을 맡아 또다시 대립하는 입장에 섰다. 이어 송강호가 류중원의 동료 요원인 장길 역으로 한석규-최민식과 다시 호흡을 맞췄고, 여주인공인 이방희 역할에는 당시 신인이던 김윤진이 캐스팅됐다. 분량은 짧지만 이제는 중견배우가 된 박용우, 김수로, 황정민 등의 풋풋한 초창기 모습도 잠깐 만날 수 있다.

<쉬리>는 상업적으로 외화 <타이타닉>의 흥행기록을 넘는 큰 성공을 거뒀고, 한국 영화사에 있어서도 대자본이 투입된 대작영화의 가능성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이전까지 신파물이나 조폭코미디가 주류를 이루면서 '한국영화는 VHS 비디오로 봐도 충분하다'라는 과소평가 분위기가 있었다면 <쉬리> 이후로'극장에서 돈을 내고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톱배우였던 한석규는 명실상부한 흥행 보증수표로 커리어의 정점에 올랐고, 최민식은 이때부터 서브 주연의 그늘을 서서히 벗어나 원톱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다만 두 배우의 연기나 캐릭터만 놓고보면 전작에 비하여 아쉬운 면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두 배우가 연기한 류중원과 박무영 모두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숨가쁘게 진행되는 스토리와 볼거리를 나열하다 보니 주인공들의 복잡한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할 여유는 보이지않는다. 결국 개성강한 톱배우들을 데려다놓고도 그 기량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장길 역의 송강호는 미스캐스팅으로 꼽히는데 생활 연기에 익숙한 배우를 냉철한 정보요원으로 기용하면서 사투리 발음의 단점을 두드러지게 했다.

20년전 액션물이다보니 지금 다시보면 허술하고 유치해보이는 장면도 많다. 특히 류중원과 박무영의 클라이맥스 대결신은 정예 요원이라는 설정이 무색하게 박진감이 부족하다.

 
 영화 <쉬리>의 한 장면.

영화 <쉬리>의 한 장면. ⓒ 강제규필름

 
역사시대극 <천문: 하늘에 묻는다>

두 배우가 <쉬리>이후 20년만에 재회한 <천문>은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과 장영실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천재인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부터, 장영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기 전의 과정을 담아냈다. 특히 한석규는 드라마<뿌리깊은 나무>에서 우리가 아는 역사속 성군을 넘어 인간미 넘치는 세종의 모습을 재해석한 바 있다.

최민식이 연기할 장영실은 한국사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도 어느날 갑자기 기록도 없이 사라져버린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역사에서도 세종과 장영실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세종 24년, 안여(임금이 타는 가마)가 부서지는 사건으로 장영실은 곤장형을 받고 그 이후 어떤 역사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평생 같이 일한 뛰어난 신하를 버린 적이 없는 세종이기에 장영실만 사라져버린 이유는 역사의 궁금증으로 남았다. 작품을 연출한 허진호 감독은 '세종과 장영실 두 사람에게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라는 게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두 명애부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는 <대부2>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50대의 나이에 마이클 만의 범죄느와르 <히트>(1995)에서 호흡을 맞춰 발군의 연기를 보여줬다. 한석규와 최민식도 어느덧 50대의 품위 있는 미중년 배우가 되어 다시 만났다. 시대극으로만 한정하면 첫 만남이다. 두 명배우의 섬세한 연기가 기대되는 작품이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