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포스터

<디에고> 포스터 ⓒ 워터홀컴퍼니(주)


다큐멘터리는 사실에 기반한 영화다. 여기서 사실에 기반했다는 말은 좀 애매하다. 다큐멘터리의 반대 개념인 극영화 중에서도 사실에 기반한 작품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은 아마도 논픽션이 아닐까. 픽션이 아닌 영화라는 뜻이기에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일도양단으로 정의한다. 기록영화라는 말도 있으나, 따지고 들면 다큐멘터리만 기록영화의 성격을 갖는 게 아니라는 반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영화 <디에고>(원제 Diego Maradona)는 다큐멘터리이다. 한국 개봉작에서는 그의 인생을 대표하는 '마라도나'를 빼고 이름 '디에고'만 남겨 영화 제목으로 썼다. 그런 선택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에 원제 '디에고 마라도나'가 더 나은 제목이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축구는 근대 스포츠이다. 근대국가, 상업적 스포츠와 스포츠의 상업주의, 미디어 등 복잡다단한 현대의 현상이 한 곳에 집약된 얄궂은 영역이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펠레와 함께 근대 스포츠인 축구의 대표적인 전설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세계적인 축구선수로서 마라도나를 기억한다.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연출얼개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사회적(혹은 축구의) 페르소나와 인간 디에고를 구분하여 '디에고'와 '마라도나'가 분열하고 화합하며 하나의 인생과 불멸의 전설을 작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전 코치인 페르난도 시뇨리니는 "그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 두 개의 인격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카파디아 감독은 "관객들에게 전설 같은 재능과 천재성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고, 그를 삶의 어두운 길로 밀어 넣었던 악한 것들에 빛을 비춰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 마라도나가 말하듯, 그러나 '디에고' vs. '마라도나' 구도는 '마라도나'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리' vs. 매운탕
 
 <디에고> 스틸컷

<디에고> 스틸컷 ⓒ 워터홀컴퍼니(주)


다큐멘터리는 논픽션이기 때문에 소재 자체가 중요하다. 두말할 필요 없이 디에고 마라도나는 논픽션으로 다루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다. 그의 인생이 픽션보다 더 픽션스럽다. 사실에 기반한 영화 중에서 소재 자체의 스토리가 강력할 때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되곤 한다. 흔히 일식집에서 생선 상태가 좋으면 '지리'로 먹고 덜 좋으면 '매운탕'으로 먹는다고 하는 바로 그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재료라고 해도 요리사가 시원치 않으면 사발면보다 못한 음식으로 전락한다. 카파디아 감독은 2015년에 <에이미>로 제8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상과 제69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앞서 2011년에는 <세나: F1의 신화>로 제60회 멜버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제27회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받았다. '진중한 기록가'로 불리는 카파디아 감독의 천재 다큐 3부작의 마지막 인물이자 하이라이트가 디에고 마라도나이다.

축구 천재로는 마라도나 외에 펠레가 있고 메시가 있고 또 누군가 있겠지만 축구영웅 중에 마라도나만큼 강렬하게 악명을 떨친 이는 없다.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가장 높이 날았고, 영광의 정점에서 치욕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드라마틱한 삶을 산 디에고 마라도나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다룬다면 카파디아 감독보다 나은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마라도나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마라도나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이 사람들이 다음엔 내 영화를 만들 거래요"라는 말을 카파디아 감독 등이 오스카상을 받는 사진과 함께 올렸으니 말이다. 이제 관객만 좋으면 된다. 개봉 전 소수의 관객 중 하나로서 나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보잘것없는 젊은이에게 찾아온 너무 대단한 전성기
 
 영화 <디에고> 스틸컷

영화 <디에고> 스틸컷 ⓒ 워터홀컴퍼니(주)


영화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전성기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시작 장면은 1984년 이탈리아 나폴리 산 파올로 경기장. 마라도나의 나폴리SSC 입단 환영행사장이다. 8만명이 넘는 나폴리인들이 나폴리SSC 홈구장에 모여 그의 입단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후 그는 나폴리의 신이 된다. 나폴리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집안에 붙여놓았으며 시내 곳곳엔 성모마리와 동급으로 취급된 그의 벽화가 그려졌다. 그가 나폴리에 있는 동안이 그의 축구인생의 전성기였다. 불과 20대 중반이란 나이에 도래한 전성기. 그것도 황제나 교황에 못지 않은 명성을 구가한 전성기.

1984년 '코파 델 레이(Copa del Rey: 스페인 국왕컵)' 결승전에서 난투극을 벌여 FC바르셀로나로부터 퇴출된 뒤 이탈리아 SSC나폴리로 이적한 시점부터 1992년 나폴리를 뜰 때까지를 영화는 중점적으로 그린다. 그 시기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1986
-아르헨티나의 주장으로 멕시코 월드컵 우승(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신의 손' 논란)
-시나그라와의 사이에서 혼외자 득남

1987년
-리그 우승

1989년
-UEFA컵 우승
-코파 이탈리아 우승

1990년
-두 번째 리그 우승
-이탈리아 월드컵 준우승

1991년
-코카인 양성 반응으로 15개월 출장 정지

1992년
-스페인 세비야 FC로 이적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공만 차고 산 그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천대받는, 성서의 신약시대로 치면 갈릴리에 해당할 정도인 나폴리에서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기록한 것은 참으로 공교롭다. 마라도나가 나폴리로 이적할 때 언론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가 가장 비싼 선수를 사들였다"고 보도했다.

빈민가 출신의 작고 까만 소년이 부모에게 집을 사주기 위해 죽기살기로 공을 찼듯이 나폴리에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런 전성기의 '마라도나'의 이면에서 여전히 소년인 '디에고'가 무한정으로 펼쳐진 스포츠상업주의·자본·미디어·유명세·섹스 등의 거센 흐름에 떠내려갔다. 세상은 그의 재능과 인기를 이용하지만 당연히 그를 사랑하진 않았다.
 
 영화 <디에고> 스틸컷

영화 <디에고> 스틸컷 ⓒ 워터홀컴퍼니(주)


어쩌면 디에고 자신만이 디에고 마라도나를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공을 먼저 찼고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들여다보기 전에 남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었다. 결국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인생의 젊은 전성기의 급류에서 표류하다가 삶을 잃어버리고 만다.

특히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르헨티나 대 이탈리아의 경기가 나폴리에서 열린 건 신의 장난이라 할 만하다. 극중 인터뷰에서 마라도나가 나폴리 관중이 자신을 응원해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가 다리 말고는 많은 것이 성장유예 단계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팀은 이탈리아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지만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신에서 나폴리와 이탈리아의 원수로 바뀌어 전면적인 적대 속에서 사실상 축구인생의 마지막을 맞게 된다.

영화에 표현되듯 "마라도나의 이탈리아 시절 마지막은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하다. 8만 명의 군중이 환영하는 가운데 영웅의 모습으로 나폴리에 도착했던 남자가 그곳을 떠날 땐 쓸쓸히 혼자서 빠져나갔으니 말이다"(아시프 카파디아 감독),
가디언은 "그(마라도나)의 성공이 그의 삶을 소비하도록 내버려둔 남자, 결국 그를 파괴한다"라고 평했다. 적절한 평이긴 하지만, 디에고 마라도나의 인생에 관한 평이지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영화에 관한 평으론 부족하다. 영화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나폴리 산 파올로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첫 장면 사이사이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전체 줄거리를 여러 컷으로 삽입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재능', '성공', 그리고 '스타덤'. <디에고>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키워드들을 '디에고 마라도나'의 인생을 통해 뒤집어보며 관객들에게 진짜 성공한 삶은 무엇일지,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일지 돌아보게 만든다"는 보도자료의 친절한 설명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의미에 관한 성찰 비슷한 것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성찰.

영화의 말미에서 눈물짓는 늙은 디에고에서 나는 그리스 비극의 영웅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숭고하지 않고 남루한 영웅. 악행을 일삼았지만 악한은 아니었던 일그러진 시대가 배출한 일그러진 영웅. 그럼에도 나는 영화 초반 마라도나의 다음 인터뷰에서 삶의 틈에 드러난 모종의 숭고함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경기장에서 뛸 땐 삶이 사라져요. 문제들도 사라지고 모든 게 잊히죠."(디에고 마라도나)

12월 12일 개봉.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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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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