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손해보험 스타즈의 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시즌 2승째에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는 KB선수들을 보며 '오버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개막전 승리 이후 12연패라는 엄청난 부진에 빠졌던 KB에게 3일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전 승리를 통한 연패탈출은 챔프전 우승만큼이나 기쁘게 느껴졌을 것이다(물론 KB는 프로 출범 후 우승은커녕 아직 한 번도 챔프전에 나가본 적이 없다).

중하위권의 모든 팀이 마찬가지지만 KB 역시 이번 시즌 내심 봄 배구 진출을 노렸다. 황두연(상무)의 입대와 손현종(대한항공 점보스)의 이적으로 왼쪽이 헐거워졌지만 지난 시즌 후반기 좋은 활약을 펼친 정동근과 김정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고질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던 센터 자리에도 우리카드 위비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2014-2015시즌 블로킹 부문 1위를 차지했던 박진우를 영입해 전력을 보강했다.

하지만 KB의 시즌 준비에서 전성기를 훌쩍 넘긴 노장 김학민 영입은 그리 큰 소식이 아니었다. 물론 선수는 새로운 팀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겠다는 의지가 강했지만 KB입장에서는 김학민에게 그저 조커로 활약하며 젊은 선수들의 체력을 관리해 주는 역할 정도를 기대했다. 하지만 OK저축은행전에서 62.50%의 공격성공률로 22득점을 퍼부으며 KB의 연패탈출을 이끈 일등공신은 39세를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노장 김학민이었다.

뛰어난 탄력과 체공력 자랑하는 대한항공의 토종거포
  
 대한항공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학민은 현역 생활 연장을 위해 KB손해보험으로의 이적을 선택했다.

대한항공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학민은 현역 생활 연장을 위해 KB손해보험으로의 이적을 선택했다. ⓒ 한국배구연맹

 
대한항공은 V리그 출범 후 3년 연속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권을 따냈다. 하지만 2006년 신인 드래프트는 수련 선수를 포함해 남자부 11명, 여자부 12명만 프로무대를 밟았을 정도로 '흉년'이었다.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대한항공은 '그나마' 공격력이 가장 좋은 경희대의 라이트 공격수 김학민을 지명했다(역대 신인 드래프트에서 경희대 출신 선수가 전체 1순위로 지명된 것은 2006년의 김학민과 2012년의 이강원밖에 없다).

김학민은 경희대 시절 대학배구를 대표하는 오른쪽 공격수로 활약했지만 당시 대한항공에는 두 시즌 연속 득점 2위에 오른 브라질 출신의 외국인 선수 보비가 있었다. 김학민은 2006-2007시즌 25경기에서 229득점을 올리며 신인왕에 올랐지만 여느 유망주들처럼 생존을 위해 레프트로 포지션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서브리시브나 수비에서는 큰 강점이 없던 김학민은 그렇게 그저 그런 백업 선수로 남는 듯했다.

하지만 김학민에게는 다소 부족한 수비력을 상쇄하고도 남을 탁월한 점프력과 체공력, 그리고 상대 블로킹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 3년 차가 되던 2008-2009시즌부터 주전 자리를 차지한 김학민은 2012-2013시즌까지 대한항공의 토종거포로 활약하며 세 번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김학민은 배구 팬들로부터 '한 번 점프하면 라면을 끓여 먹고 내려올 정도로 체공력이 좋다'는 뜻을 가진 '라면'이라는 유쾌한 별명도 얻었다.

특히 선수로서 전성기에 도달했던 2010-2011시즌에는 55.65%의 공격 성공률(1위)을 기록하며 '괴물 외국인 선수' 가빈 슈미트(한국전력 빅스톰)를 제치고 정규리그 MVP에 선정됐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3년 연속 삼성화재의 벽에 막혀 V리그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했고 어느덧 서른 줄에 접어든 김학민도 2012-2013시즌을 끝으로 상근예비역으로 군에 입대했다.

종목을 막론하고 나이가 꽉 찰 때까지 입대를 미룬 선수들은 전역 후 과거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김학민은 전역 후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2015-2016 시즌 524득점을 올리며 건재를 과시했고 2016-2017시즌에는 57.12%의 공격성공률로 통산 2번째 공격 성공률 1위에 올랐다. 외국인 선수의 비중이 높은 V리그에서 2번 이상 공격 성공률 1위에 오른 선수는 이경수와 박철우(삼성화재 블루팡스), 그리고 김학민 뿐이다.

이적 첫 시즌 주장 맡아 코트에서 '마지막 불꽃' 태우는 백전노장
   
 김학민은 이번 시즌 KB의 주장을 맡아 후배들을 이끌며 팀의 주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다.

김학민은 이번 시즌 KB의 주장을 맡아 후배들을 이끌며 팀의 주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다. ⓒ 한국배구연맹

 
프로 출범 후 4번이나 준우승에 머물렀던 대한항공은 지난 2017-2018시즌 현대캐피탈을 꺾고 드디어 V리그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하지만 2017-2018시즌 챔프전 우승의 중심에는 김학민이 없었다. 시즌 초반부터 발목 부상에 시달린 김학민은 28경기에서 107득점에 그쳤고 챔프전에서는 단 한 번의 공격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말았다. 김학민은 2018-2019 시즌에도 121득점에 그치며 대한항공의 주요 전력에서 사실상 배제됐다.

김학민은 2018-2019시즌이 끝난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대한항공에는 김학민 외에도 MVP 정지석을 비롯해 '살림꾼' 곽승석, 센터 진성태 등 붙잡아야 할 내부 FA선수들이 수두룩했다. 여기에 KB로부터 윙스파이커 손현종까지 영입했다. 결국 잉여전력이 된 김학민은 대한항공과 3억 원에 FA계약을 체결한 후 지난 4월 KB손해보험으로 이적했다(대한항공은 연봉 상한선을 초과하지 않기 위해 전성기가 지난 베테랑 선수들의 '정리'가 필요했다).

사실 KB에서도 김학민의 역할은 썩 크지 않았다. 권순찬 감독은 정동근과 김정호를 주전 윙스파이커로 구상하고 있었고 노련한 김학민에게는 가끔씩 코트에 들어가 후배들을 이끌며 경기 흐름을 바꾸는 역할 정도를 기대했다. 하지만 김학민은 이번 시즌 50.38%의 공격성공률로 146득점을 올리며 외국인 선수 브람 반 덴 드라이스가 복근 부상으로 빠져 있는 KB에서 실질적인 주전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김학민은 3일 OK저축은행전에서 아직 시들지 않은 '노장의 힘'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서브득점 하나와 블로킹 하나를 포함해 양 팀 합쳐 가장 많은 22득점을 기록했고 공격성공률은 62.50%에 달했다. 사실 KB는 이날 정민수 리베로(57.14%)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의 리시브 효율이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김학민은 12번의 오픈공격 시도에서 무려 11번을 성공시키며 91.67%라는 경이적인 성공률을 기록했다.

김학민은 이번 시즌 KB의 주장을 맡고 있다. 팀 내 최고참이자 이적생이 주장을 맡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김학민은 후배들을 이끌어 달라는 권순찬 감독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았다. 주장을 맡은 후 KB가 12연패로 흔들리면서 남모를 마음고생을 했지만 김학민민은. 오랜만에 전성기 시절처럼 공격을 주도하며 팀 승리를 견인다. 역시 백전노장 김학민은 은퇴를 눈 앞에 둔 한 물 간 '퇴물'이 아니라 KB를 위기에서 구한 '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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