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오후, 현우(정해인)와 미수(김고은)는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말없이 밖을 보다 눈이 마주쳐 배시시 웃는 이들 사이에 음악이 울려 퍼진다. "오늘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 비가 오니까." 뮤지컬의 한 장면이 아니다. 절묘한 선곡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린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2019) 이야기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포스터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포스터ⓒ CGV아트하우스


정지우 감독의 신작 <유열의 음악앨범>은 개봉 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대세 배우 정해인과 김고은의 로맨스도 구미를 당겼지만, 1994년부터 2007년까지 방송됐던 동명의 KBS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영화는 오랫동안 해당 프로그램의 작가를 지낸 이숙연 작가가 각본을 쓰고 DJ 유열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하며 단순히 제목만 빌린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당연히 작품의 배경도 라디오 프로그램이 시작한 1994년 10월 1일부터 2005년 어느 여름날까지 이어진다. 즉, 같은 이름의 영화와 라디오는 불가분의 관계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트렌디한 로맨틱 코미디와는 거리가 멀다. 우선 정서를 다루는 방식부터 다르다. 최근 국내의 로맨스 영화가 코믹 요소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면, <유열의 음악앨범>은 <접속>(1997), <미술관 옆 동물원>(1998),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클래식>(2003) 등 한때 충무로를 석권했던 정통 멜로물에 가깝다. 두 청춘 남녀의 대화는 꽤 진중하고, 둘을 그리는 영상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정지우 감독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 디테일한 연출이 순간순간 빛을 발한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컷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컷ⓒ CGV아트하우스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한 건 다름 아닌 음악이다. <클래식>을 본 관객이라면 손예진과 조인성이 소나기를 뚫고 대학 캠퍼스를 달릴 때 나오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자전거 탄 풍경, 2001)을 잊지 못할 것이다. <건축학개론>(2012)의 수지와 이제훈이 함께 듣던 '기억의 습작'(전람회, 1994)은 어떤가. 이처럼 음악은 때로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오르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과장을 좀 보태면, <유열의 음악앨범>은 모든 삽입곡이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요, '기억의 습작'이다. 그 정도로 영화 속 음악의 힘이 강력하다.

작품의 선곡표는 대개 작중 시간대와 발을 맞춘다. 1994년, 미수와 은자(김국희)가 운영하는 '미수제과'의 분주한 아침은 3인조 그룹 모자이크의 유일한 히트곡 '자유시대'(1994)가 꾸민다. 활기찬 복고풍 사운드와 당대 청년들의 연애 풍경을 가사에 담은 노래는 이미 영화 <과속스캔들>(2008), tvN 드라마 <응답하라1994>(2013) 등에 사용되어 젊은 세대에 다시금 회자된 바 있다. 영화는 도입부에 그 시절을 대표하는 노래를 삽입하며 작품의 전반적 레트로 기조와 장차 진행될 연애담을 자연스레 암시했다.

이야기 속 음악을 다루는 방식은 신승훈의 '오늘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1991)에서 선명해진다. 실제 원 테이크로 촬영된 장면은 어떠한 대사도 없이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연출됐다. 특정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언어로 직접 표현하는 대신, 화면과 잘 어울리는 노래를 들려주는 것으로 스토리텔링을 이룬 것이다. 몇 번의 엇갈림 끝에 연락이 닿게 된 현우와 미수를 축복하듯 울려 퍼지는 핑클의 '영원한 사랑'(1999)도 재미있다. 영화는 그 유명한 "이젠 내 사랑이 되어줘"에 맞춰 설렘 가득한 두 사람의 표정을 담는 것으로 백 마디 말을 대신했다.

"같은 시간에 우린 어쩌면 서로를 그리워했었는지 모르네. 같은 거리를 걷다가 우리는 어쩌면 서로 못 본채 스쳐 갔는지 모르네." 또 다시 어긋났던 현우와 미수가 그리움 끝에 우연히 서로를 다시 만나던 밤에는 윤상이 부른 토이의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1999)가 흐른다. 두 남녀가 눈을 껌뻑이며 서로를 쳐다만 볼 때 유희열이 쓴 노랫말이 두 사람의 마음을 대변한다. 이윽고 연인이 된 현우와 미수의 첫 데이트에선 이소라의 '데이트'(2002)가 흘러나온다. 소박한 데이트를 로맨틱하게 포장한 건 이소라의 산뜻하고도 달콤한 음성이었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컷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컷ⓒ CGV아트하우스

 
주연 배우 정해인이 '이렇게 슬픈 노래인 줄 미처 몰랐다'고 회고한 노래도 있다. 루시드 폴의 '오, 사랑'(2005)이다.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날개가 없어도 나는 하늘을 날으네.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돛대가 없어도 나는 바다를 가르네." 곁에 없는 연인을 그리워하며 담담히 사랑을 노래한 이 곡이 현우와 미수에게는 이별가가 됐다.

작은 말다툼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고, 미수는 끝내 현우를 떠난다. 그러자 현우는 이 노래를 배경으로 다른 남성의 차를 타고 떠나는 미수를 쫓아 북촌 골목길을 끝도 없이 달린다. 현우의 거친 숨소리, 두 사람의 격한 감정과 달리 시종일관 담백한 루시드폴의 목소리는 먹먹하게 관객의 마음을 울렸다.

영화의 대미는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Fix You'(2005)가 장식했다. 삽입곡 중 유일한 외국곡인 'Fix You'는 과연 비싼 사용료를 감수할 만한 회심의 한 방이었다.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디오 프로그램 <유열의 음악앨범>을 통해 현우의 변함없는 마음을 확인한 미수는 과거 현우가 그에게 달려왔던 것처럼 서울 시내를 달리고 달려 현우에게 간다.

하염없이 뛰는 미수의 발걸음을 재촉하듯 울려 퍼지는 노래는 관계의 회복과 온전한 연결을 상징한다. 영화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는 장면을 끝으로 막을 내리지만, 관객은 이 노래와 엔딩 크레디트에 삽입된 루시드 폴의 '보이나요?'(2005)를 들으면서 둘의 결말이 아름다울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컷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컷ⓒ CGV아트하우스


<유열의 음악앨범>은 삽입곡을 통한 연출의 모범 사례라고 할 만하다. 적어도 음악 활용의 측면에서 근래 이보다 뛰어난 작품은 없었다. 시대적 배경과 각 장면의 분위기를 두루 고려한 선곡은 관객의 향수를 자극했고, 배우의 대사를 대신했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앞으로 '오늘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를 들을 때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던 현우와 미수를 떠올릴 테다. '오, 사랑'을 들으면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을 떨구던 현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릴지도 모른다. 나 또한 당분간은 영화에 사용된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울 것 같다.

"나 언제나 돌아올 땐 따뜻해진 가슴으로 말하지. 그대가 처음 사랑 가르쳤다고."(유열 '처음 사랑', 1993)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민재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minjaejung/75)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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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평론가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필자 | http://brunch.co.kr/@minjae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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