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집> 스틸컷

영화 <우리집>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럴 줄 알았다. 영화 <우리집>은 내 기대를 전혀 허물지 않았다. 감독만 보고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문데, 내겐 윤가은 감독이 그렇다.
 
윤가은 감독의 전작 영화 <콩나물>을 보지 않았다면, 소녀 세 명의 용감하긴 했으나 다분히 무모한 가출(?)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하지만 7살에 처음으로 홀로 콩나물 심부름을 떠났던 <콩나물> 속 소녀 '보리'의 여행을 떠올린 나는, 세 소녀들 역시 '보리'처럼 무사히 집에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린아이에겐 수년의 시간처럼 느껴졌을 그 짧았던 여행은, 세 소녀들 앞에 당도할 때로는 위태롭고 때로는 권태로운 시간들을 두려움과 조급함 없이 맞이하게 해줄 것이다. 길을 나선 윤가은의 소녀들처럼, 홀로 집을 나섰을 어릴 적 내 딸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낯선 곳에서 홀로서기를 실행하고 있는 18살의 내 딸은 어릴 적 홀로 집 밖을 나섰던 길들을 기억해내곤 할까.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떠나보지 않고서야 무심히 두고 온 일상속의 빛나는 순간들을 어떻게 건져 올릴 수 있겠는가. 탕아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홀로 길을 떠날 수 있는 서사가 어찌 남성들만 전유할 성장담이던가. 소녀들이여, 여성들이여, 길을 떠나라. 길 위의 시간은 고된 만큼 그대들을 성장시킬지어니...
 
7살에 홀로 집을 나선 <콩나물>의 '보리'
 
 윤가은 감독의 2013년 작품인 단편 <콩나물> 스틸컷

윤가은 감독의 2013년 작품인 단편 <콩나물> 스틸컷ⓒ 윤가은


지금은 아주 좋아하게 된 윤가은 감독을 알게된 건 영화 <콩나물>을 보게 되면서다. 한 5년 전쯤 영화 모임에 속해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보석을 찾았다. 영화를 보고 생각을 나눌 시간이 필요했기에 영화 모임에선 거의 단편을 보았는데, 그중 하나가 <콩나물>이었다. <부산행>의 배우 '수안'을 보다 어디서 봤다 했더니, 바로 <콩나물>의 주인공 '보리'이지 않은가. '와, 많이 컸네' 싶어서 어찌나 반갑던지. ㅡ콩나물>에서 엄청 귀여웠는데...
 
당시 영화 모임 멤버들은 모두 아이를 키우던 엄마들이었다. 우리는 <콩나물>의 '보리'가 콩나물을 사러 혼자 집을 나설 때부터 왠지 조마조마했다.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신도시 마을에서도 아이를 혼자 심부름 보낸 경험들이 거의 없다 보니, 이 골목이 저 골목 같고 저 골목이 그 골목 같은 미로 형 동네를 혼자 다니는 보리가 위태로워 보였던 것이다. 저런 골목에서 숨바꼭질하며 날이 저무는 지도 모르게 놀던 어린 시절을 모두 잊은 채.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심장이 바짝 쪼그라들었어요."

영화가 끝나고 한 멤버가 입을 열자, '그렇고 말구' 하는 표정으로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우리가 그렇게 두려웠던 거죠? 미디어에서 하도 흉한 범죄 사건 소식만 듣다 보니 불안했던 것 같아요. 저렇게 잘 찾아오는데."

왜 아닌가. '보리'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여긴가 저긴가 헤매긴 했지만, 결국 집을 찾아왔다. 보리의 여행 중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언제나 혼자 있는 여아에게 변고가 생기기에 들었던 것이겠지만, 결론을 봤을 때 전혀 맞지 않았다. 아이는 제 깜냥만큼 해냈다. '보리'의 무사귀환은 뜻밖의 카타르시스를 주었는데, 엄마들이 두려움의 실체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두려웠던 것은 관찰하는 '나'였지, 여행의 당사자 '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보리'는 이 골목 저 골목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찾아내기에 바빴고, 그 분주함은 실상 일종의 모험으로, 모험에 따르는 제반 경험들을 동반한다. 모험이란 모름지기 긴장, 호기심, 상상력, 육체적 효용 등 자신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시키고 활용하게 하는 더할 나위 없는 오락이지 않은가. 실상 '보리'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골목 탐험을 한껏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딸애는 초등 3년 때부터 어린이 기자단 활동을 했는데 그 모임이 격주로 있었다. 모임 장소로 가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는데 딸애와 세 번 동행했고 그 다음부터는 혼자 다녀보라고 했다. 애는 큰 탈 없이 전철을 타고 혼자 다녀왔다. 하지만 남편은 아이를 혼자 보냈다고 벌컥 화를 냈고, 주위 엄마들은 "어린애가 어떻게 혼자 다니느냐"며 대견한 듯 말했지만, 혼자 보낸 엄마를 마땅치 않아 하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정작 딸애는 혼자 다녀온 후, '보리'처럼 아주 뿌듯해했는데 말이다.
 
<우리집>의 세 소녀, 길을 나서다 
 
 영화 <우리집> 스틸컷

영화 <우리집>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집>의 주인공 하나(김나연)는 부모님이 이혼 위기에 처해 있어 심란하다. 엄마 아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툰다. 12살 하나는 어떻게든 집안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애쓴다. 하나는 부모의 어긋난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집>의 또 다른 주인공 유미(김시아), 유진(주예림) 자매. 자주 다니는 이사 탓에 자매는 친구들하고도 마을하고도 정들면 이별인 신세다. 하나와 유미, 유진 자매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우연히 알게 된 뒤 우정을 쌓아간다. 실상 자매는 부모 없이 지내는 처진대, 이들 앞에 돌연 나타난 하나는 어엿한 맏언니 노릇을 하며 자매에게 든든한 친구가 되어 준다.
 
어느 날 자매는 사는 집에서 이사를 가야한다는 정보를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듣고 고민에 휩싸인다. 이제 겨우 하나를 친구로 얻었는데, 또 낯선 동네로 이사가 새 친구를 만들어야 하는 일은 어린아이들에겐 신산한 일이다. 게다 10살인 언니 유미에게 7살짜리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일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고작 10 살이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니. 그렇다고 자매가 그렇게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이 아이들도 나름의 삶을 꾸려 나간다. 때론 울고 때론 웃으며.
 
집을 떠나기로 작정한 하나와 유미, 유진은 길을 나선다. 유미는 불안하지만 하나가 "가보자"며 추동하자, 유진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하나는 가족과 떠나기로 했던 가족여행이 어그러진 실망감에, 유미와 유진은 사는 집이 임대 나가지 않게 하려는 절박함에 셋은 공모한다. 이 아이들은 목적지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을까?
    
윤가은의 또 다른 영화 <우리들>의 소녀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서로를 탓하며 할퀴다 파국에 이르듯이, <우리집>의 세 소녀 역시 불안했던 여행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며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에 휩싸이자,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다투게 된다. 셋은 공들여 만든 박스 집을 발로 이겨 부수며 서로의 화를 삭인다. 집이야 다시 만들면 되고 길이야 다시 찾으면 되는 것 아닌가.

소녀들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걸 눈치챌 즈음, 각자의 휴대폰의 배터리도 방전이 되고 소녀들의 에너지도 고갈된다. 이때 소녀들은 마법처럼 나타난 텐트를 차지하고 하룻밤을 묵게 된다. 길 위에서도 몸을 누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소녀들. 셋이 나란히 텐트 안에 누운 모습은 이들의 말처럼 '우리 집' 같다. 비록 텐트지만 하룻밤 지친 몸을 누이기에 충분하니.
 
비록 짧은 이틀간의 길 잃은 여행이었지만, 여행을 마친 소녀들은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콩나물>의 7살 '보리'가 한나절의 결코 녹록지 않았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환한 것처럼, 하나, 유미, 유진의 무모한 여행도 결국 다시 '우리 집'이라는 종착지에 와 닿았다. 다시 들어가야 할 우리 집이 반드시 '즐거운 나의 집'은 아닐지라도.
 
소녀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윤가은 감독의 영화들
 
 윤가은 감독의 2015년 작품 <우리들> 스틸 컷

윤가은 감독의 2015년 작품 <우리들> 스틸 컷ⓒ (주)엣나인필름


그의 모든 영화 속에 담긴 윤가은 감독의 시선은 소녀들을 몰아치지 않으며 쫓고 있다. <우리들>의 소녀들이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옳은 것인가, 혹은 어느 친구와 손잡는 것이 이로울 것인가를 갈등을 겼으며 깨닫게 되듯이, <우리집>의 세 소녀들 역시 두려움, 상실감, 이기심을 겪고도 지속될 수 있는 삶과 우정을 믿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윤가은의 모든 영화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어린 소녀들의 '성장기'다.
 
<콩나물>의 보리는 이제 홀로 태연하게 집 밖을 나가게 될 것이다. 집 안의 안전을 뒤로하고 보리가 집 밖으로 내디딜 매일의 모험은 그애에게, 세상은 밖으로 열려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우리들>의 소녀들은 서로를 헤집고 할퀴어 상처 주었더라도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관계의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집>의 세 소녀들은 난생처음 경험한 불안했지만 야릇하게 흥분됐던 그 여행의 쾌감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소녀들은 이제 문을 밖으로 열기만 하면 멀리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