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일, 지정생존자 >

< 60일, 지정생존자 >ⓒ tvN

 
20일, tvN 월화드라마 < 60일, 지정생존자 >가 6.2%의 자체 최고 시청률을 올리며 종영했다. 최근 들어 tvN 월화드라마들이 시청률 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터라 < 60일, 지정생존자>의 성공이 더욱 눈에 띈다. 더구나 원작이 성공한 해외 드라마일 경우 이미 원작을 본 시청자들의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일각에선 외국 드라마를 번안할 경우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 60일, 지정생존자 >는 성공적인 각색의 한 사례로 기억될 만하다. 과연 이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이야기를 변주한 점이 주효했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 유고시 '지정생존자'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남은 대통령의 임기를 수행하도록 한다. 또한 이를 위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행사가 있으면 만일에 대비해 각료 중 한 사람을 안전시설에 머물게 한다. 바로 이런 미국 특유의 정치적 위기관리 해법을 모티브로 하여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가 만들어졌다.

이 미드를 한국으로 가져온 제작진은 설정을 살짝 바꿔, 대통령 유고시 다음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60일 동안 '지정생존자'가 권한대행을 맡도록 했다. 엄밀하게 정의하자면 '60일, 대통령 권한대행'이다.

원작에서 대통령이 된 톰 커크먼은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선출직 국가 원수로서의 '정치적 권위'를 어떻게 달성해 가는가라는, 즉 미국 정치 제도 속 딜레마를 안게 된 최하위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의 정치적 성장 이야기다.

반면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된 박무진(지진희 분)은 환경 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적 소신에 따라 대통령에게 사표를 던질 만큼 '정치인', 혹은 '각료'라기 보다는 '학자', 혹은 한주승 비서실장의 말처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학문적 주장이 정치적으로 관철되지 않자, 기꺼이 정치를 이반했던 '자연인' 박무진이 국회의사당 폭파 테러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에 떠밀려 앉게 되면서 < 60일, 지정생존자 >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휘몰아치는 위기 상황, 박무진의 선택
 
 < 60일, 지정생존자 >

< 60일, 지정생존자 >ⓒ tvN


대통령이 억지로 신긴 구두를 자유롭게 벗어던진 박무진이 다시 그 맞지 않는 구두를 꾸역꾸역 신어야 하는 거북함과 불편함으로 이야기는 시작됐지만, 어색함도 잠시 대통령이 부재한 분단 사회에 휘몰아치는 위기의 상황들은 그를 권한대행 자리로 던져 놓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양진만 대통령의 유고와 그의 정부다. 그는 민주적 정부를 표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의 민주적인 원칙과 의지는 정치적 과정 속에서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점점 떨어지는 지지율과 함께 위태로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테러는 안 그래도 취약했던 정부, 정권 자체를 흔드는 야당, 군부 세력들의 난립으로 이어진다.

서울시장은 이 틈을 타, 자신의 표를 모으기 위해 귀화한 북한 동포들을 이용해 사회 분열을 획책하고, 군은 평화 정책을 추진했던 양진만 정부의 정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국회의사당 테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오영석(이준혁 분)은 대중의 영웅이 되어 청와대를 향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언론은 안 그래도 취약한 권한대행의 청와대를 흔들고, 은밀하게 테러와 관련된 조사를 진행하던 박무진은 이전 양진만 청와대 내부사람 중 공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점점 더 누군가를 믿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또 한 사람의 영웅 대통령?

드라마는 좋은 사람, 그리고 좋은 정치를 지향했던 양진만 정부의 무기력함으로 시작해 테러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권한대행이 된 박무진을 통해 '좋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이야기인 것처럼 문을 열었다. '대통령제'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언제나 우리 사회에서 '메시아'와 같은 '희망'의 기대주였다. 그리고 < 60일, 지정생존자 >도 다시 그 익숙한 화법으로 시청자들에게 또 한 사람의 '좋은 메시아'의 도래를 선도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저 다른 정치적 조건과 제도에서 잉태된 한국적인 < 60일, 지정생존자 >라는 변주된 이야기를 넘어 원작과는 다른 결론에 도달하며 2019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정치는 무엇인지 묻는다.

그 시작은 뜻밖에도 그가 '사표'를 던지게 된 그 사건으로부터 비롯됐다. 미국과의 FTA 재협상 자리에 환경부 장관 자격으로 참석한 박무진은 미국의 압박으로 인해 한국이 불리한 처지에 놓이자, 환경적 데이터를 제시하며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으며 회담 자체를 유리하게 끌고 간다. 그런 그의 '학자적 접근'은 북한 잠수함의 출몰로 인한 군사적 충돌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돕는다. 즉 청와대 비서진들조차 '우리 진영'의 논리에 빠져 박무진에 대한 믿음을 두지 않는 상황에서, '사실'에 근거한 설득으로 도발의 함정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박무진은 양진만 정부의 일원이었지만, 기꺼이 그 정부에게 사표를 내던질 만큼 학자적 양심이 우선한 사람이었고, 대통령 권한 대행의 자리를 내던질 위기에서 한주승 비서실장의 '시민'의 권리라는 설득에 물러서는 '개인'이었다. 그에게는 소속된 진영이 의미가 없었고, 그가 권한대행의 자리에서 내리는 결정은 양심적인 민주 시민으로서의 고뇌에서 비롯된 결정인 것이다.

고뇌하는 시민, 그가 잉태한 좋은 정치
 
 < 60일, 지정생존자 >

< 60일, 지정생존자 >ⓒ tvN


그래서 드라마 속 박무진은 늘 고뇌한다. 매회 그의 정부를 흔드는 사건들 속에서 박무진은 '시민'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이웃으로서 최선을 길을 찾아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이로 인해 박무진은 차영진(손석구 분)의 말처럼 기존의 정치가 해왔던 이분법적인 결정이 아닌, 뜻밖의 결정을 통해 '정치'의 길을 새롭게 개척해 나간다.

그런 박무진의 결심은 마지막회 가장 큰 위기를 맞는다. 때로는 그를 멀리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가장 의지했던 양진만 정부의 핵심 한주승 비서실장이 테러의 배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그리고 원작과 달리, <60일, 지정생존자>의 대통령 권한대행 박무진은 '내가 괴물이 될 테니 당신은 앞서 좋은 정치를 해달라'는 한주승 비서실장의 협박인지 선언인지 모를 유혹을 뿌리치고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를 완성한다.

16부작 대장정 속에서 박무진의 정치는 늘 그와 다른 길을 걷는 세력들에 의해 시험대에 올랐다. 분단된 한반도의 위기를 고조시켜 군사적 실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군부 세력에 의해, 도덕적 해결보다는 정치적 수를 우선하는 청와대 참모를 비롯한 야당과 언론들에 의해, 그리고 자신을 버린 국가에 대항하여 테러라는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국민을 공포에 몰아넣으며 대중을 선동하여 정권을 잡으려 했던 오영석 등의 테러 집단에 의해 말이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민주적 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양진만 정부의 실세였던 한주승 실장이 자신들의 정치가 외면받자, 테러 적극 가담자인 오영석을 통해 가장 극단적인 방식의 정치적 혁명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수단을 불사하며 대중을 이용하고자 했다. 박무진은 그런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정치적 방식을 하나씩 하나씩 깨트리며 그 어느 편이 아닌 민주사회 시민의 입장에서 정치의 새 길을 텄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2019년 여전히 새롭지 않은 정치의 세상에서 매우 새로운 방식의 정치를 접하고 논하게 만들었다.

그의 옮음은 늘 그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늘 그를 위태롭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흔들었지만, 그래서 더욱 원칙을 깨트리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또 특정 세력의, 특정 정파의 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성향이 다른 야당의 대표나 자신이 사퇴시킨 전직 참모 총장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유연한 정치를 할 수 있었던 듯하다.
 
 < 60일, 지정생존자 >

< 60일, 지정생존자 >ⓒ tvN


출마 선언만 하면 대통령 자리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박무진은 민주주의가 괴물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가는 시스템임을 선언하며 출마를 포기한다. 그의 그런 모습은 민주주의는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 실패와 실수의 과정을 거쳐 도달할 수 있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의 국제 개발과 분쟁관리 연구소에 따르면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는 88개국이다. 그리고 그 중에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이룬 국가는 불과 27개국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31번째 '흠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된다. 하지만 해방 후 불과 반세기 정도 지났을 뿐인 우리가 여전히 과정 속의 민주주의 체제에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이룬 민주주의에 대해 자부심을 갖기보단, < 60일, 지정생존자 > 속 많은 회의주의자들처럼 우려와 좌절에 익숙하다. 더구나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촛불까지 든 사람들의 마음을 얼룩지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런 상황에서 박무진이라는 한 사람이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어 보낸 60일의 시련기, 그리고 그가 다시 꿈꾸는 정치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한다. 막연한 또 한 사람의 영웅 탄생이 아니라, 드라마 마지막 그와 함께 활짝 웃었던 젊은 보좌관들처럼,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같이 함께 고민해 볼 '민주주의적 정치'를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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