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와이프> 포스터

영화 <더 와이프> 포스터ⓒ (주)팝엔터테인먼트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조셉(조나단 프라이스)과 그의 아내 조안(글렌 클로즈)이 처음 인연을 맺은 시점은 1952년이다. 조셉은 조안에게서 자신이 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을 발견한다. 얼마나 훔치고 싶은 재능이었을까? 조안은 제자였지만 이미 청출어람이었다. 그는 아무리 갈고닦아도 닿을 수 없는 지점에 벌써 도달해 있는 조안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면서, 그런 그녀에게 반한다. 교수라는 지위를 이용해 그녀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던 조셉은, 그녀의 사랑을 적절히 활용하며 곁에 두기로 작정한다. 그는 이미 자신의 성취에 그녀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예감했을지 모른다.
 
지질한 조셉, 그가 아내의 재능을 이용한 방법
 
 영화 <더 와이프>(2017) 한 장면

영화 <더 와이프> 스틸 컷ⓒ 그린나래미디어(주)

 
극중에서 조셉은 지질하기 이를 데 없다. 아내의 재능에 얹혀 글을 파는 그의 인생 자체가 '자기 기만'이다. 자신의 비겁함과 열등함을 은폐하기 위해 교만한 독설로 동료 작가들을 조롱하고, 불륜 스캔들을 수없이 남발한다. 위대한 작가라는 명성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 공허한 명성을 이어나가려니, 자아가 분열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조셉은 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걸까.
 
부족한 작가로서의 자질을 포기하고, 그보다 훨씬 잠재력 있는 아내에게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할 수는 없었던 걸까.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걸 깨닫고 평론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평론가 황현산이나 신형철처럼, 잘 읽고 해석하는 능력으로 훌륭한 작가를 발굴해내고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격려하는 길을 걸을 수는 없었던 걸까? 어쩌면 남성우월주의가 조셉의 한계와 가능성 모두를 막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사회적 명성이나 지위에서 아내보다 우월한 지점을 점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더라면, 그는 훨씬 나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겁나, 아들의 소설 하나 제대로 평해 주지 못하는 비겁한 아버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 명성을 아무리 얻은들, 자식에게 부정당하는 인생이란 너무나 남루하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조안뿐 아니라 조셉 또한 남성우월주의의 희생양이었을지 모른다. 여성보다, 아내보다 나아야한다는 억압은 아내 조안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도, 아내 조안을 작가로서 지지할 동료애도 모두 왜곡시켰을 수 있기에 그렇다. 남편으로 체면을 지키려는 알량한 우월감이, 결국 평생을 아내의 그림자를 쫓게 만들었다.

조안은 남성우월주의가 만든 피해자일까 
 
 영화 <더 와이프>(2017) 한 장면

영화 <더 와이프> 스틸 컷ⓒ 그린나래미디어(주)

 
조안은 천성이 소심하다. 기량이 출중한 기성 작가로부터 "여성의 대담한 문체를 대중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써 봐야 읽히지 않을 글을 쓰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 의기소침해 진다. 게다가 조셉에게 빠져버린 그녀는 자신의 작가로서의 정체성마저 고민하게 된다. 결국 조셉의 아내가 되는 것으로 안식처이자 도피처를 마련한다.

하지만 어떻게 쓰고 싶은 욕망을 누를 수 있을까? 남편에게 출판할 기회를 잡게 해주고, 작품을 쓰도록 권고한 조안은 조셉이 정말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조셉은 글을 평가할 수는 있지만, 잘 쓸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조안이 그 사실을 몰랐다고 믿을 수 없다. 물론 그렇게 시작한 공모가 평생 이어질지는 몰랐겠지만.
 
남편을 문단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킹메이커'가 된 것을 선의로만 해석하기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당시 문단이 남성 작가만을 발굴해 키워내는 남성들끼리의 연대로 똘똘 뭉쳐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환경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성 문인들에게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다. 하물며 1952년에야 오죽했을까.

그렇다고 해서 조안이 부정의한 과정과 결과를 선택한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글은 자신의 영혼을 담는 일이다. 영혼을 빚는 자가 가짜 영혼을 불어 넣고 아닌 체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일이다.
 
조안이 가부장적인 사회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가부장의 허세에 찌든 조셉이 역겨운 건 사실이지만, 평생을 같이 공모해 온 조안 역시 그 잘못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안이 "더 이상은 이런 모욕을 견딜 수 없다"고 조셉을 향해 퍼붓는 비난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조안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인 이름으로 출판할 수 없어, 처음엔 남성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던 '브론테 자매들'을 떠올려 보자. 이들은 이후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발표했다. 여성이 살아가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던 '버지니아 울프'도 생각해 보자. 조안보다 앞선 세기의 여성들이었던 이들은 죽도록 고독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비록 여성이기에 당대에 큰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은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소중한 것을 버렸다. 조안이 조셉과 공모하게 된 이유 전부가, 여성의 낮은 지위 탓이라고만 눙칠 수 없는 이유다.
 
'쇼윈도 부부'가 맞닥뜨린 결말 
 
 영화 <더 와이프> 스틸 컷

영화 <더 와이프> 스틸 컷ⓒ (주)팝엔터테인먼트

 
조안과 조셉 부부는 서로에게 떳떳할 수 없는 공모자였기에, 평생을 서로에게 진솔할 수 없었다. 이들 공모의 '화룡점정'인 노벨상 수상이 예기치 않게, 가식으로 점철된 이들의 삶을 극도로 분열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가장 영광스런 순간에 가장 가증스러운 장면들을 연출하는 자신들에게 너무나 깊은 환멸을 느낀다. 이들 쇼윈도 부부의 파국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시상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의 조안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녀가 결코 헌신적인 아내, 노벨상의 숨은 공신인 '킹메이커'의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없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조안은 이제 글에 대한 욕망을 버릴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욕망은 이제 어떻게 펼쳐질까? 두 가지 상상을 해본다. 이름을 감추고 쓰던가, 남편의 유고집인 양 계속 조셉으로 쓰던가. 뭐가 됐든, 진실을 은폐한 작가의 모습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2019 골든 그로브 시상식에서 글렌 글로즈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수상소감을 밝혔다. 잠깐이나마 <더 와이프>의 조안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 그녀가 수상수감을 말하는 장면은 조안이 스스로를 변론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은 오랫동안 양육자로서 살았어요. 어머니로 아내로서.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성취를 이룰 수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렇다. 여성은 할 수 있다.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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