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 속의 박문수(권율 분).

<해치> 속의 박문수(권율 분).ⓒ SBS

 
 
SBS 드라마 <해치>를 이끄는 흐름 중 하나는 홋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정일우 분)이 박문수(권율 분)와 나누는 끈끈한 우정이다. 두 사람은 동지 같으면서도 친구 같고, 그러면서도 형제 같은 우정을 보여주고 있다.
 
거의 모든 드라마가 다 그렇듯, 드라마 속의 연잉군과 박문수는 처음에는 악연으로 출발했다. 이들의 관계는, 다른 사람 명의로 과거시험을 치른 연잉군을 박문수가 은밀히 추적하면서부터 시작했다. 시험 부정을 파헤치겠다는 만년 수험생 박문수의 의협심이 이들의 인연을 만들어낸 계기였다.
 
연잉군이 왕족이며, 대리시험을 칠 만한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박문수가 알게 되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180도로 바뀌었다. 그 뒤로는 완벽한 협력자 관계가 됐다. 박문수는 연잉군이 왕세제(후계자)가 되고 정치적 포부를 펴는 데 결정적 지원을 제공하게 됐다.
 
드라마를 떠나 실제로도, 영조와 박문수는 군신관계를 뛰어넘는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다. 이 점은 박문수가 무수한 비방을 당하면서도 32년간 무사히 공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 비결이다. 영조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박문수는 요즘 말로 하면 경제민주화에 목숨 건 '경복궁 정책실장'이었다. 그는 복지정책 쪽으로 돈이 많이 흘러 들어가도록 힘을 기울였다. 국고에 여유가 없으면, 세금으로 받은 소금이라도 팔아서 복지 재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보수파들의 눈에는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였다.
 
그가 실제로는 암행어사를 한 적이 없는데도 '암행어사 박문수' 이미지가 형성된 것도 그런 개혁 성향과 관련이 있다. 박문수 같은 인물이 암행어사가 되어 탐관오리들을 혼내고 세상을 바꿔줬으면 하는 민중의 바람이 '암행어사 박문수' 신화를 만들어내는 배경이 됐다.
 
그런데 박문수는 강직하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경제개혁을 추진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런 성격으로 인해 한층 더 고립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숱한 음해를 받았다. 역적 모의를 했다는 고발도 툭하면 나왔다. 죽기 1년 전에도 역모 혐의를 받았다. 성격이 너무 강직하고 대인관계가 안 좋아서 역적질에 필요한 조직을 꾸리기 힘든 사람인 줄 알면서도, 영조시대(1724~1776년)의 기득권층은 박문수를 그렇게도 열심히 음해했다.
 
그런 박문수가 32년간 안정적인 공직 생활을 하면서 장관급인 판서로 은퇴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영조의 전폭적인 신뢰 덕분이었다. 영조는 박문수란 인물을 속속들이 이해했다. 남의 것을 착복할 사람이 아니며 역적 모의를 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박문수가 공격을 받을 때마다 믿어주고 지켜주었다.
 
 
 <해치> 속의 영조(연잉군, 정일우 분).

<해치> 속의 영조(연잉군, 정일우 분).ⓒ SBS

 
 
영조는 상당히 감성적인 인물이었다. 임금 된 지 13년이나 지난 1737년(당시 43세)에는 과거시험 답안지에서 자기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는 이유로 신하들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 적도 있다.
 
당시 영조는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궁녀 증원을 추진했다. 궁녀든 내시든 군인이든 임금 옆에 사람이 많아야 왕권이 강해질 수 있었다. 궁녀들은 궁궐 살림뿐 아니라 행정사무를 보조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영조가 궁녀 증원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런 영조의 의도를 사대부들이 견제하는 속에서, 이현필이란 수험생이 궁녀 증원에 대한 비판을 시험지에 담았던 것이다.
 
음력으로 영조 13년 3월 26일자(양력 1737년 4월 25일자)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이현필이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 노릇하기가 참으로 괴롭다"며 목멘 울음을 터트렸다. 답안지를 쓴 이현필도 밉고, 합격시켜준 신하들도 미웠을 것이다. 다들 한통속이란 생각에, 감정을 참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영조가 대인관계에서 상당히 여린 면모를 보여줬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박문수에 대한 영조의 든든하고 변함 없는 우정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박문수에 대해서만큼은 한없는 이해심을 보이며 단단한 우정을 과시한 것은, 영조의 대인관계에서 좀 특별한 부분이었다.
 
그런 영조와 박문수의 우정은 좀 특별한 계기로 출발했다. 둘을 맺어준 사람은 뜻밖에도 영조의 '정적'이었다. 사적으로는 둘도 없는 이복형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립관계였던 경종이 두 사람을 이어준 '중매자'였다.
 
경종은 소수파인 소론당의 지지를 받았고, 영조는 다수파인 노론당의 지지를 받았다. 소론과 노론은 똑같이 서인당에서 출발했지만, 이 시기에는 소론당이 진보 색깔, 노론당이 보수 색깔을 띠었다. 경종과 영조의 아버지가 다스린 숙종시대 후반에 서인당만 제도권 정계에 남게 됐다. 그러자 서인당 일부인 소론당이 진보세력 역할을 하게 됐던 것이다.
 
노론당은 경종이 아직 30대 군주인에도 이복동생 영조(당시엔 연잉군)를 왕세제로 밀어붙였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영조를 경종의 후계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노론당은 경종을 압박해 2선으로 퇴진시키려고까지 했다. 경종과 영조의 형제관계가 좋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정치적 라이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적일 수밖에 없는 경종이 동생인 영조에게 소개해준 인물이 바로 박문수다. 박문수가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정9품)이 된 지 1년도 안 돼, 경종은 박문수를 왕세제 교육을 담당하는 세제시강원의 정7품 설서로 승진시켜주었다. 젊고 강직한 인재를 이복동생한테 소개해주고자, 다소 파격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했던 것이다. 박문수가 영조의 참모가 된 1724년 이 해에 경종은 36세, 박문수는 33세, 연잉군은 30세였다.
 
이복형이지만 정적인 경종이 보내준 박문수를 영조는 의심 없이 대했다. 박문수는 소론당이었지만, 영조는 이 점도 개의치 않았다. 박문수의 인격과 능력에만 주목한 것이다.
 
박문수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한 <박문수 졸기>에서는 "박문수는 춘방(春坊, 세제시강원)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임금(영조)이 알아줌을 받았다"고 했다. <박문수 졸기>는 영조 32년 4월 24일자(1756년 5월 22일자) <영조실록>에 내용 일부가 인용돼 있다. <박문수 졸기>는 영조가 왕세제 시절부터 박문수의 인간성과 능력에 호감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박문수는 영조의 '정적'이 소개해준 참모인 동시에 영조의 반대편인 소론당 출신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프로필이 영조와 박문수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영조는 박문수를 완벽한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박문수는 그런 영조를 위해 일평생 충실하게 일했다. 박문수는 영조의 탕평책과 복지정책을 지원했고, 영조는 박문수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영조가 탕평정치를 펴고 서민층을 돌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군신관계를 초월한 두 사람의 끈끈한 우정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