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캡틴 마블>의 포스터.

영화 <캡틴 마블>의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슈퍼 히어로'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일련의 '맨'들입니다. 중년 이상의 관객에겐 슈퍼맨과 배트맨이, 그보다 어린 세대에게는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이 제일 먼저 떠오르겠죠. 그밖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남성 슈퍼 히어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 슈퍼 히어로라고 하면 딱히 생각이 잘 안 납니다. '원더우먼' 한 명이 달랑 떠오르고, 좀 더 기억을 더듬어야 마블의 슈퍼 히어로 영화에 나왔던 블랙 위도우나 스칼렛 위치, <엑스맨> 시리즈의 진 그레이 정도가 생각납니다.

슈퍼 히어로의 이런 심각한 성비 불균형은 슈퍼 히어로 장르가 탄생한 제2차 대전 시기 미국 코믹스의 주 독자층이 남자 어린이나 10대 소년,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 장르의 기본 틀은 남성 캐릭터가 활약하는 단순한 권선징악 이야기였죠.

하지만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세계 대전이나 냉전 같은 대결 구도가 없어졌기 때문에 2000년대 이후 슈퍼 히어로 영화는 단순한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좀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여성 슈퍼 히어로도 늘어날 것입니다. <캡틴 마블>은 그런 경향을 대표하는 마블 스튜디오의 신작입니다.

비어스(브리 라슨)는 옛 기억을 잃어버린 채, 우주의 위대한 전사 종족 크리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발현되지 않은 모종의 힘을 가진 그녀는 크리족 특공대 스타 포스의 일원으로서 활약 중이죠. 자유자재로 변화를 일삼는 스크럴 족을 소탕하는 임무에 투입된 비어스는 작전이 틀어지면서 1995년의 미국으로 떨어집니다. 여기서 쉴드 요원 닉 퓨리(사무엘 L. 잭슨)를 만난 비어스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과거와 자기가 가진 힘의 실체에 관해 알게 되죠.

<어벤져스4: 엔드 게임>으로 향하는 관문
 
 영화 <캡틴 마블>의 한 장면. 카리스마 넘치던 쉴드 국장 닉 퓨리의 젊은 시절은 우리가 알던 것과 사뭇 다르다.

영화 <캡틴 마블>의 한 장면. 카리스마 넘치던 쉴드 국장 닉 퓨리의 젊은 시절은 우리가 알던 것과 사뭇 다르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성공한 영화의 후속 작품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시리즈물이나 세계관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분노의 질주> 시리즈 정도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만큼 성공적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캡틴 마블>은 마블 영화답게, 기존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다음에 나올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높입니다. 새로운 인물과 상황을 자꾸 설명하려 들면서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고, 플래시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주인공의 상황을 관객이 직접 보고 느끼게 만들죠. 관객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비어스/캐럴 댄버스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그녀의 성공을 응원하게 됩니다.

기존 등장인물인 쉴드의 닉 퓨리나 콜슨 요원, 크리족 사령관 로난 등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전체 세계관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만든 것도 돋보입니다. 특히 이전 작품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줬던 닉 퓨리의 젊은 시절을 재미있게 풀어내어 훨씬 더 친근감 있는 캐릭터로 바꿔 놓은 부분은 시리즈의 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물론, 다른 마블 영화들보다 액션 장면의 규모가 작고 화려한 볼거리가 적은 것이 아쉬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각성한 주인공의 활약이 워낙 시원시원하게 연출돼 있어서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죠. 그간 마블 영화의 전투 시퀀스가 쓸데없이 현란하고 장황한 감이 있다고 느꼈던 관객이라면 오히려 더 깔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마블 최초의 여성 슈퍼 히어로 단독 작품
   
 영화 <캡틴 마블>의 스틸컷. 크리족 특공대 스타 포스 소속의 비어스(브리 라슨)는 상관 욘-로그(주드 로)에게 교묘하게 통제당하고 있다

영화 <캡틴 마블>의 스틸컷. 크리족 특공대 스타 포스 소속의 비어스(브리 라슨)는 상관 욘-로그(주드 로)에게 교묘하게 통제당하고 있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할리우드가 그리는 영웅들은 대부분 주인공이 어떤 깨달음을 통해 좀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납니다. 하지만 같은 영웅이라도 남성과 여성은 좀 다른 방식으로 성장합니다. 남성 영웅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를 버릴 줄 아는 '자기 희생'의 과정을 통해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에 반해 여성 영웅의 성장은 주변 환경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억압 때문에 희생당하고 감춰졌던 '자기 안의 힘'을 일깨우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캡틴 마블>은 이 여성 영웅의 성장 플롯을 교과서적으로 적용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비어스가 자신이 미국 여성 공군 조종사 캐럴 댄버스라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에서 그녀가 받아온 억압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녀는 온통 '하면 안 된다', '해 봤자 안 될 거다'라는 소리만 듣고 살아왔습니다.

비어스란 이름으로 크리족 스타포스의 일원이 된 다음에도, 상관으로부터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든지, 비정상적인 힘에 기대지 말고 정정당당히 싸우라는 말을 들으며 자신의 능력을 봉인해야 했죠. 결국 비어스/캐럴 댄버스는 자신의 힘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그것을 마음껏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단계로 나아감으로써 '캡틴 마블'로서의 성장을 완성하고,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사실, 이런 여성 영웅의 성장 플롯을 가장 잘 활용해 온 것이 마블의 모 회사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입니다. <라푼젤> <겨울왕국> <모아나>로 이어지는 2010년대 디즈니 공주물은 모두 억압 때문에 능력을 잃은 여성 주인공이 자신의 능력을 되찾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다루는, 전형적인 여성 영웅의 이야기였습니다. <주토피아>(2016)와 <주먹왕 랄프> 1, 2편 역시 여성 주인공이 부당한 억압을 떨치치고 자신의 재능을 되찾는 과정이 들어가 있죠.

억압 받은 자의 귀환, 공감을 이끌어내다
 
 영화 <캡틴 마블>의 한 장면.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은 어릴 때부터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공군 조종사까지 된 인물이다.

영화 <캡틴 마블>의 한 장면.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은 어릴 때부터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공군 조종사까지 된 인물이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할리우드가 채택한 여성 영웅의 성장 이야기는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여성 신화 모티브를 차용한 것입니다.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여성이 억압받아 온 역사가 길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이 금지와 억압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도 공주 인형과 분홍색을 강요받는 여자 어린이, 여자니까 안 된다는 말을 듣는 성장기 소녀, 사회 생활 하면서 온갖 불이익을 경험하는 젊은 여성, 평생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온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바로 이것이 <캡틴 마블>을 본 여성들이 환호하고 통쾌함을 느끼는 이유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여성 영웅의 신화는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화적 모티브가 그렇듯 알레고리를 통해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확장됩니다. 사회적 소수자나 성소수자 같이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 자본가의 억압에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들, 기성 세대의 욕심에 희생양이 된 젊은 세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받은 억압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캡틴 마블>의 이야기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페미니즘 영화'라는 이유로 비난을 퍼붓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와 무관하게 기록적인 흥행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런 상황은 영화 내용과 묘하게 겹칩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으려는 부정적인 낙인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기어이 많은 관객과 만나 원래 기획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캡틴 마블>의 성공에 연대와 지지의 마음을 보냅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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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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