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어사전 편찬 과정 혹은 한글 운동도 영화 소재가 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그런 것도 영화 소재가 될 수 있나 고개를 갸웃거릴 법하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일제로부터 갖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국어학자들의 실화를 감동적으로 녹여내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26일 기준, 전국에서 258만 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이 영화를 봤다. 우리말과 글의 역사를 연구해온 '국어사학자'들은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영화 줄거리가 어떻게 실제와 같고 다른지도 영화를 본 관객의 관심거리다. <말모이>를 본 국어사학자들의 '남다른' 소회를 들어봤다.
 
 <말모이> 포스터.

<말모이>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한글운동은 민족운동= 소강춘 국립국어원 원장은 지난 22일 "작가가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각본을 잘 썼다"면서 "사실이 아닌 것도 영화 속에 많이 있지만 당시에 그런 일을 했던 대표적 인물상을 끌여들여서 기술을 잘했고 감정에 호소를 많이 했다. 아주 감동적이고, 참 잘 만든 영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 원장은 또 "개화기 때 조선에 들어온 러시아·영국·프랑스인들이 한러·한영·한불사전을 만드는 걸 보고 선진국들은 다 사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당대 학자들은 사전이 없는 민족은 문화 민족이 아니라는 의식이 강했다. 결국 민족운동이었다. (사전 편찬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힘듦을 겪었다"고 덧붙였다.  

조선어학회 주필을 지낸 건재 정인승 연구자인 이태영 전북대 교수는 23일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일제 때 한글로 민족운동을 한 것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안타까웠다"며 "한글이란 것을 우리가 당연하게 인식하는데 민족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단어 하나, 각 지역의 방언 조사 과정을 통해 이런 식으로 사전이 편찬됐다는 것,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사전이 만들어지는 절실하고 절절한 과정을 보여줘서 제작진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소회를 전했다. 

반면 국내 첫 개별 품사사전인 <부사사전>(2014)을 편찬한 손남익 강릉원주대 교수(한국어의미학회 회장)는 23일 "시작과 끝에 (사실을 담은) 자막이 나와서 픽션이 섞인 중간 부분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오해를 사면 역사 인식에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손 교수는 "영화를 보면서 원고를 잃어버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면서 "본인도 <부사사전>을 만들 때 외장 하드 4개에 따로 저장을 해뒀다. 일제강점기엔 컴퓨터도 없었고 3만 2000매의 원고와 20만장의 어휘 카드를 따로 저장할 수 없어서 많이 어려웠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판수가 정환과 다투고 나와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판수가 정환과 다투고 나와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류정환은 건재 정인승= 영화 속 조선어학회 대표로 나온 류정환(윤계상)의 실제 모델은 누구일까. 1942년 일제에 피체됐던 조선어학회 회원 33인이 모두 모델일 수 있다. 이태영 교수는 이에 대해 1942년 당시 조선어학회 내 사전편찬실의 주필(총책임자)을 맡은 정인승 선생이 류정환의 모델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건재 정인승과 가깝다. 외솔 최현배는 전체 학회의 책임자였고, 고루 이극로는 상임 집필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정인승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5년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영어 교원으로 부임했다. 당시 국어를 못 가르치게 돼 있음에도 정인승은 방과후 따로 시간을 내 과외로 국어를 가르쳤다. 일제 경찰이 이에 대해 사납게 다그치자 맞서서 호통칠 정도로 강인하고 대쪽 같은 풍모를 지녔다. 

정인승은 자신을 탄압하는 경찰을 피해 1935년에 고창고보를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와 <조선말큰사전> 편찬에 합류했다. 최현배가 "정 선생이 사양하면 사전을 못 만든다"며 주필을 맡긴 것. 이 교수는 "배우 윤계상의 외골수 연기가 정인승 선생의 실제 성품과 닮았다"며 웃었다.     

◇간도에서 시베리아까지 걸어간 이극로=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영화 속 류정환의 대사다. 이는 조선어학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극로가 남긴 말이다. 손남익 교수는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선생 등 많은 인물이 있지만, 류정환 역할에 대해 딱히 누구라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다만 류정환의 대사는 이극로가 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이극로의 생애와 관련해 놀라운 에피소드가 한가지 전해진다. 시베리아 치타에서 소설가 이광수가 젊은 이극로를 우연히 만났다. "자네 여기 어떻게 왔나?" "걸어서요. 간도에서부터 걸어 왔어요." 이극로가 태연히 답했다. "그 거리를 걸어서 왔다고?" 이광수가 놀라 묻자 다시 답했다. "여비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걸었어요."

이렇게 보면, 실제의 이극로는 부유한 친일파 아버지를 둔 영화 속 류정환보다 <운수 좋은 날>에 펑펑 울면서 공감하는 김판수(유해진)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 이극로는 '거지 박사' '짚신 박사'로 불릴 만큼 소박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극로는 1893년 경남 의령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3년 동안 머슴으로 일하기도 하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했다. 이후 1916년 봄 상하이에 도착해 독일계 퉁치 대학에 입학했다. 4년 뒤 동향인의 후원으로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 <중국의 생사공업>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궁핍 및 배고픔과 싸우면서 얻은 결과물이었다. 1929년 귀국 뒤 그는 곧장 조선어학회에 가입해 사전 편찬에 합류했다.
 
 판수가 정환에게 한글을 배우고 있다.

판수가 정환에게 한글을 배우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국어학자들은 만 3년간 옥고= <말모이> 속 일련의 사건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먼저 일제가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며 탄압한 것은 사실이다. 이 교수는 "일본 순사들이 편찬실에 자주 와서 뒤지는 장면은 실제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민우철(민진웅)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인 아내를 살리기 위해 일제에 협조, 탄압의 발단을 제공하는 장면은 사실이 아니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듯 통학 전차 안에서 여학생들의 대화를 엿들은 일본 경찰이 이들을 연행, 고문해 정태진이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했다는 자백을 받아낸 것이 일명 '조선어학회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후 33인의 학회 관련자가 검거됐고 일제에 의해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단체'로 날조됐다. 학자들은 1942년 10월께 체포당해 1945년 8월 17일까지 만 3년간 갇혀 있었다. 그러나 영화 속엔 조 선생(김홍파)만 고문으로 희생되고, 나머지 회원들은 전국의 사투리를 수집하고 공청회를 여는 등 활동을 계속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밥알 단추 만들어 옷 여민 일석 이희승= 이와 관련해 기자가 접한 국어사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영화에서 '감옥서 고생하는 장면'이 적은 것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이태영 교수는 "함흥형무소에 있을 때 어려운 과정에서도 학회 회원들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대목들이 회고록에 많이 나온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영화엔 나오지 않는 실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이희승 선생이 감방에서 주는 밥을 조금 남겨놨다가 단추를 만들었다. 밥으로 단추 모양을 만들어 말린 뒤 옷에서 뺀 실로 밥알 단추를 바느질했다. 감옥에서 얼마나 절실했으면 옷을 여밀 게 없으니까 밥알을 갖고 단추를 만들었다고 하면 지금 사람들이 믿을까 싶다. 고문받고 오면 서로 위로하는 내용도 많이 나온다. 고문 종류도 다 기록돼 있다." 

검거에서 기소, 예심 종결까지 2년에 걸쳐 경찰은 손발을 등 뒤로 돌려 봉으로 묶고 천장에 매다는 공전, 콧속에 고춧가루 물을 부어 넣는 해전, 나무총이나 죽도로 때리는 육전 등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이윤재와 한징이 옥사했다.
 
 1945년 촬영된 조선어학회 해방 기념 사진.

1945년 촬영된 조선어학회 해방 기념 사진.ⓒ 국가기록원


◇서울역 창고서 발견된 2만 6500장 원고는 사실= <말모이>에서 조 선생은 퇴근 뒤 그날 작업의 필사를 따로 해두고 이것을 숨겨놓는다. 정환은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어학회 지부로 위장해 일제에 협력하는 척한다. 또 정환과 판수는 한밤중에 찾아온 우편배달부에 이끌려 간 체신국 창고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우편물을 발견한다. 이 우편들은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사투리들이다. 하지만 이 장면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가 발행한 잡지 <한글> 속 '전국의 사투리를 보내달라'는 광고와 이에 따라 수많은 이들이 사투리를 보낸 것, 표준어 확정을 위해 전국의 국어교사가 모여 공청회를 연 것은 사실이다. 조선어학회는 이를 통해 1936년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했다. 일제 말기로 그려진 영화 속 설정보다 한참 빠른 시기다. 소강춘 원장은 "전국적으로 5000여명의 사람들이 도움을 줬다"며 "표준말 사정을 한 것은 맞지만, 영화에서처럼 극장에서 한 것은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또 "해방 뒤 서울역 창고에서 원고를 찾는 등 굵직한 사건은 실제 사실과 잘 맞는다"고 말했다. 2만장이 넘는 사전 원고는 함흥지방법원에서 경성고등법원으로 보낸 상고심 재판 관련 서류에 포함돼 있었으나, 해방을 맞으면서 경성역 조선통운(현 CJ대한통운) 창고에 방치돼 있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이 석방되자마자 서울로 달려와 애타게 원고를 찾았고 1945년 9월 8일 기적적으로 원고가 발견됐다. 

손 교수는 "사전 집필의 어려움과 지난함, 표제어 선정·어휘 풀이의 어려움, 인간적 고뇌, 집필진 간의 갈등 등이 약하게 표현된 것은 아쉽다"면서도 "문맹자의 한글 학습 과정,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 민족 독립, 방언의 소중함이 잘 표현됐다"고 밝혔다. 
  
1936~1957년까지 21년간의 편찬사 중 영화는 일부만을 극화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최현배가 <조선말큰사전>의 원고(4·5·6권에 해당)를 땅에 묻고 피란을 갔다. 서울 수복 이후 회원들이 다시 모여 편찬을 재개, 유네스코로부터 종이와 인쇄비를 지원받아 1957년에 비로소 총 6권이 완간됐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영화 못지않게 극적이다. 현재 남북한은 <조선말큰사전>을 계승하는 <겨레말큰사전>의 남북공동편찬사업을 올해 안으로 재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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