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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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는, 공부를 특히 잘한 세 집단이 발견된다. 순수한 지적 탐구심 때문에 하는 공부도 있지만, 어느 시대건 간에 공부는 대개 다 '취업용'이었다. 과거시험이 있었건 없었건, 어느 시대건 다 그랬다. '행복은 성적순'이란 말은 실상에 부합하지 않지만, '취업은 성적순'이라는 말은 어느 시대건 실상에 상당부분 부합됐다.
 
그런 취업용 공부를 가장 잘한 집단은 신라 육두품, 고려 신진사대부, 조선 사림파였다. 이들은 각각 자기 시대의 지식과 학문을 담당했다. 역사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은 주로 이 집단들에서 나왔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사료(역사 기록물)도 거의 다 이들의 작품이다. 이 세 집단의 아이들이 공부를 가장 잘했던 것이다.
 
특히 신진사대부와 사림파의 경우에는, 각각 자기 시대의 과거시험 급제자들을 대거 배출했다. JTBC 금토드라마 < SKY 캐슬 >에서 '포트폴리오'로 불리는 시험용 공부의 노하우는 신진사대부와 사림파 가문의 부모자녀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육두품·신진사대부·사림파는 당대 최고 부자들은 아니었다. < SKY 캐슬 > 속의 주민들이 재벌들이 아닌 것처럼,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 SKY 캐슬 > 주민들처럼 자녀교육에 거액을 투자할 정도로 부유하긴 하지만, 최정상 부유층은 아니었다.
 
어느 나라건 간에 왕조국가에서는 왕실이 최고 부자였다. 서울 주변에 널린 조선왕릉들만 봐도 왕실 경제력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 부부가 죽을 때마다 수만 평의 토지를 할애해 왕릉을 조성할 수 있는 경제력을 왕실은 갖고 있었다. 또 왕실은 전국 모든 토지에 대해 이념적 혹은 관념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런 권리를 근거로 왕실은 일반 민가의 토지를 수용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최고의 경제력을 가진 왕실 바로 밑에 신라 육두품이 있었다. 당나라에서까지 명성을 떨친 유학자 최치원의 사례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육두품은 취업용 공부만큼은 신라 최고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정몽주를 배출한 신진사대부도 그랬고, 조광조를 배출한 사림파도 그랬다. 이들의 뿌리는 고려시대의 지방 향리다. 지방 군청에서 대대로 국장급 정도를 세습하던 가문들에서 고려 후기의 신진사대부가 나오고, 이 신진사대부 출신들에서 조선 초기에 사림파가 나왔다. 이들 역시 최고 부자들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들 위에는 왕실과 대지주들이 있었다. 물론 이들도 일반 백성들이 볼 때는 대단한 부자들이지만, 나라 전체로 볼 때는 중소 규모 지주들에 불과했다.
 
최고의 경제력을 보유하지 않았는데도 취업용 공부를 가장 잘했다는 것은, 경제력이 공부 실력을 규정하는 최상의 지표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어야 아이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지만, 집안 경제력이 어느 수준을 넘으면 그때부터는 경제력 향상이 학업능력 향상에 직결되지 않기 마련이다.
 
세 집단이 가장 공부를 잘 한 비결
 
 공부하는 아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공부하는 아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러므로 세 집단이 공부를 가장 잘한 비결은 다른 데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학습 의욕을 고취시키고 분발을 촉구할 만한 다른 요인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요인이란 것은 그들 앞에 놓인 정치적 한계였다.
 
육두품은 혈통의 한계 때문에 제약이 많았다. 이들이 출세하려면, 최고 권력집단인 왕실의 눈에 들어야 했다. 어느 시대건 간에 왕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외부 사람은 능력을 가진 인재였다. 세금을 거두고 반란을 방지하고 외침을 막는 데 필요한 지식과 실무능력을 가진 인재를 왕실은 항상 갈구했다. 육두품이 왕실의 인정을 받는 방법은 그런 실력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그러자니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왕족들은 죽어라고 공부할 이유가 없었다.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목적이 아닌 한, 공부는 다른 누군가에게 발탁될 목적으로 하기 마련이다. 왕족들은 누군가에게 발탁되지 않고도, 최고의 지위와 명예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전투적인 학습 의욕이 생기기 힘들었다.
 
왕위계승 가능성이 있는 왕족들은 어려서부터 영재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공부는 주로 사람을 관리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나라를 구체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실무능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왕족은 취업용 공부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왕족들의 경쟁 상대는 대개는 왕실 내부에 있었다. 이런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공부 실력이 아니었다.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확보해두는 게 최고였다. 사람을 관리하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족들은 머리 싸매고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머리 싸매고 열심히 공부했거나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우수한 사람들을 골라서 자기 옆에 두면 그만이었다. 육두품은 그런 왕족들에게 잘 보여야 했기 때문에, 공부 실력을 닦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신진사대부와 사림파도 비슷했다. 이들은 자기 지역에서는 유지 급이었지만, 중앙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정치적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중앙 권력에 다가가는 방법은 공부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길뿐이었다. 이 점이 이들을 분발시키는 요인이 됐다.
 
신진사대부나 사림파로 분류되는 유학자 혹은 선비들의 의식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점이 있다. 임금에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은 님에 대한 사랑의 노래다. <사미인곡>의 '님'은 임금이다. 군주를 님처럼 사모하는 정서는 선비들의 의식세계에서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비숫한 의식이 선비들의 대스승인 공자의 내면에서도 발견된다. <논어> 양화(陽貨) 편에 따르면, 공자는 "나를 써주는 이가 있으면 나는 동주(東周)를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기를 기용해주는 군주가 있다면, 주나라 같은 문명국가를 동쪽에 세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직접 나라를 세울 정치적·경제적 자산이 없는 선비들은 공자 같은 꿈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군주를 만나서 자기 뜻을 펼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군주를 만나려고 하다 보니, 선비들이 학문 실력을 열심히 닦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집안들이 취업용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취업용 공부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상류층은...
 
 임금과 신하.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율곡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임금과 신하.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율곡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런데 육두품·신진사대부·사림파와 달리, 왕족이 아니면서도 취업용 공부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경제적 상류층이 어느 시대나 있었다. '가난하지만 명문가 출신인 선비와, 부유하지만 관직 없는 부잣집 딸의 결혼'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부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취업용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남한테 발탁되지 않더라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자녀교육에 목숨을 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들도 자기 자녀가 우수한 인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자녀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걱정할 일이 없을 거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 SKY 캐슬 > 부모들처럼 아이들 학업 문제로 노심초사할 이유가 없었다.
 
취업용 공부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부자가, 정조 임금 때 무관인 노상추의 일기에도 나타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에 실린 이 일기에 따르면, 경상도 선산의 안강 노씨 가문에서 1746년 출생한 노상추는 훈련원에 근무할 목적으로 한양에 전셋방을 구했다. 훈련원은 서울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부근에 있었고, 노상추의 셋방은 한 정거장 거리인 충무로역 인근에 있었다. 꽤 좋은 기와집이라 전세보증금이 27냥이었다.
 
집주인은 관직을 가진 사람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한양에 땅과 토지가 있는 부자였다. 그래서인지 위세가 대단했다. 종6품 훈련원 주부(지방 사또 급)인 노상추가 입주한 지 1개월 만에, 집주인은 "40냥 내고 들어온다는 사람이 있으니 방을 빼시오"라고 요구했다. 노상추가 항의하자 "그럼, 3냥만 더 내고 그냥 사시오"라고 입장을 바꿨다. 노상추가 계속 버티자, 주인은 "그럼 저 방을 쓰시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저 방'에는 다른 관원이 이미 세들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결국 노상추는 집주인의 위세에 눌려, 방을 빼고 이사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사 가는 날,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으로 10냥밖에 돌려주지 않았다. 급한 일로 썼으니 이해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만한 부자가 돈 17냥이 급해 전세보증금에 손을 댔을 가능성은 낮다. 그냥 돌려주기 싫었던 것이다. 노상추는 할 수 없이 그 돈만 받고 나왔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노상추는 소송을 걸지 않았다. 공직자 체면이 깎일까봐 그랬던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소송의 승산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무리 체면이 중요하다 해도, 고급 기왓집 전세보증금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소송을 걸지 않은 사실, 또 집주인이 공직자 세입자들을 함부로 대한 사실은 집주인에게 그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관직과 관계없이 위세를 부릴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력만으로도 그런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은 과거시험에 굳이 목숨을 걸지 않았다. 아이들의 취업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 권세를 확보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아도 신임 사또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가고,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었으니 취업용 공부가 관심 밖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이런 집안에서는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문가 출신이지만 가난한 선비' 혹은 '한미한 가문 출신이지만 과거 급제자'를 사위로 맞아들이는 데 신경을 썼다. '똑똑한 놈이 있어야, 급할 때 집안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정도 부자가 아닌 육두품·신진사대부·사림파들은 자녀 공부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자녀가 서울대 의대 졸업을 거쳐 주남대학교 병원에 취업해야 고급 사택을 물려줄 수 있는 스카이 캐슬 주민들처럼, 세 집단에 속한 가문들은 자녀가 공직자가 돼야만 직업과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취업용 공부에 매진하다 보니, 우리 역사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는 집단이 됐던 것이다.
SKY 캐슬 스카이 캐슬 자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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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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