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 끼고 사는 여자, '이끼녀' 리뷰입니다. 바쁜 일상 속, 이어폰을 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여백이 생깁니다. 이 글들이 당신에게 짧은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말]
 
김동률 김동률의 신곡 '동화'

▲ 김동률김동률의 신곡 '동화'ⓒ 뮤직팜

  
오늘 아침에도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했다. 왼쪽으로 올라갈까, 오른쪽으로 올라갈까. 나는 5호선 광화문역에서 내려 회사로 출근한다. 아침에 지하철에서 내리면 올라가는 계단이 양갈래로 나있고 어느 쪽으로 올라가도 벽면을 채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속 구절을 만날 수 있다. 다만 오른쪽과 왼쪽의 문구가 다르다.

오른쪽 계단 벽: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왼쪽 계단 벽: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초반에는 오른쪽 계단으로 자주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그래, 내 맘 속엔 우물이 있으니까' 이렇게 속삭이며 나는, 내 삶은 지금 사막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오글거려도 조금만 더 참아줬으면 한다. 아직 왼쪽 이야기가 남았다.

요즘은 거의 왼쪽 계단으로 올라간다. 처음엔 오른쪽 문구만큼 와닿지 않았는데 볼수록 나를 건드리는 느낌이다. 한때 나는 어른이란 점점 '완성'에 가까워지는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어린이가 아닌 것에 열등감마저 갖고 있다. 무엇 하나를 해도 내 현재 처지를 의식하고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재미있는 제안을 받아도 그것이 내 시간을 유익하게 만들어줄지 아닐지 따져본다. 지금 이 순간 너무 즐거워도 늘 1분 후를 생각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어린이만큼 완전한 존재는 없는 것 같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정신의 세 단계 변화로 낙타, 사자, 어린이를 비유한 게 이런 의도였을 거다. 어린이가 최고다. 어른이 될수록 구겨져가고 제대로 살고 있단 느낌에서 점점 멀어지는 나는 어린이처럼 현재에만 머물고 싶고 자유롭고 싶고 나 자신이 되고 싶을 뿐이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 어린이였다"는 왼쪽 계단의 문구를 볼수록 그래서, 마음이 밝아진다.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나도 한때는 완벽한 존재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생긴다. 자꾸 오글거리게 해서 미안하지만, 생텍쥐페리의 저 문구를 볼 때마다 나는 이런 다짐을 한다.

"기억하자. 내가 어린이였다는 것을 오늘도 기억하자."

며칠 전 김동률의 새 노래 '동화'가 나왔을 때 이 곡이 소중하게 다가왔던 건, 내가 기억하려는 것을 더 기억하기 쉽게 만들어줘서다. 내가 한때는 어린이였다는 것을 이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기억하게 된다.

"먼 옛날 내가 아주 어릴 적/ 내 조그마한 어깨엔 날개가 있었죠/ 모두가 잠든 밤에 아무도 모르게 난/ 날아올랐죠 온 세상을/ 먼 옛날 내가 아주 어릴 적/ 내 조그마한 이마엔 뿔이 두 개 있어/ 세상 나쁜 사람들 물리치곤 했죠/ 그땐 너무 쉬웠던 마법 같은 이야기/ 어느샌가 잊히고 말았죠"

어린이였을 땐 내 몸에 날개와 뿔이 있어서 삶을 더 자유롭고 용감하게 살았는데 이젠 그것들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래 가사를 잘 보면 날개와 뿔이 '없다'고 말하는 대신 '잊히고 말았다'고 말한다. 그래, 어쩌면 내가 기억해내기만 한다면 다시 날개와 뿔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온종일 충만했던/ 길었던 내 하루가/ 눈 깜짝할 새 흐르는 지금/ 햇살 한 움큼에도 가슴이 두근대던/ 소년 소녀의 시간도 흘러/ 문득 더듬어 보는/ 우리 어깨와 이마 그 어딘가/ 아직 어렴풋이 남아 있죠"

모든 게 새로움이었던 어린 시절엔 작은 햇살 하나도 '큰 사건'이었다. 그렇게 큰 사건들에 하나하나 감탄하다 보면 내 하루는 가득하게 찼다. 어른이 되어 하루가 눈 깜짝할 새 흘러버렸다고 말하는 건 내가 매 순간 빛나는 것들을 허술하게 흘려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김동률은 말한다. 우리 어깨와 이마 그 어딘가 날개와 뿔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고. 아침마다 왼쪽 계단을 오르며 느꼈던 그 희미한 희망을 동화 같은 노랫말로, 김동률과 아이유의 은혜로운 목소리로, 런던심포니의 오케스트라 선율로, 6개월동안 공들여 완성한 김영준 감독의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로 만나다니... 나는 진짜 어린왕자라도 만난 기분이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두 눈을 감고서/ 훨훨 날아갈래요 두 손을 맞잡고/ 넓은 세상 끝에서/ 다시 태어날래요/ 우린 아직 꿈을 꿔도 돼요/ 그대 뿔이 멋지네요/ 이제 우린 꿈을 꾸게 됐죠"

노래가 끝나고 그랬다. 그대 뿔이 멋지네요, 이 한마디로 충분하다고. 그림자처럼 숨어있던 내 뿔을 누군가 알아봐주고 "멋지네요" 말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동화'라는 노래를 통해 김동률이 말해주고 아이유가 그렇게 말해줬을 때 나는 애쓰지 않아도, 기억하고자 다짐하지 않아도 다시 어린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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