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세계 여자 피겨는 그야말로 '러일 전쟁'을 방불케 했다. 지난 9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막을 내린 2018 국제빙상연맹(ISU) 피겨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러시아 선수 3명(엘리자베타 툭타미쉐바, 알리나 자기토바, 소피아 사모두로바)와 일본 선수 3명(키히라 리카, 사카모토 가오리, 미야하라 사토코)가 각축을 벌인 끝에, 일본의 신예 키히라 리카가 총점 217.98점으로 올림픽 챔피언인 자기토바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들 전쟁의 핵심에는 트리플 악셀이 있었다. 우승후보로 꼽힌 키히라 리카, 알리나 자기토바, 엘리자베타 툭타미쉐바 중 자기토바를 제외한 나머지 두 선수는 모두 실전에서 트리플 악셀 점프를 구사했다.
 
 2018 그랑프리 파이널 여자 피겨 수상자 모습. 키히라 리카(가운데), 알리나 자기토바(왼쪽), 엘리자베타 툭타미쉐바(오른쪽)

2018 그랑프리 파이널 여자 피겨 수상자 모습. 키히라 리카(가운데), 알리나 자기토바(왼쪽), 엘리자베타 툭타미쉐바(오른쪽) ⓒ 국제빙상연맹

   
키히라 리카, 일본 열도를 열광에 빠뜨리다

이번에 우승을 차지한 키히라 리카는 올 시즌 시니어로 올라온 신예다. 키히라 리카는 특히 트리플 악셀 점프를 쇼트프로그램에서 한 차례, 프리스케이팅에서 두 차례 시도해 과거 아사다 마오(은퇴)를 떠올리게 한다. 지난 11월 자국에서 열렸던 그랑프리 4차 대회에서 프리스케이팅에서 이 점프를 성공하며 대역전극을 펼쳐냈던 그는 이번에도 트리플 악셀 점프를 과감히 시도해 성공하면서 결국 우승까지 차지했다. 일본 여자피겨 선수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2013년 아사다 마오 이후 5년 만이다.
 
이에 일본 열도는 극도로 흥분하고 있다. 이미 '제2의 아사다 마오'라면서 새로운 피겨여왕이라도 탄생한 듯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일본 여자피겨는 줄곧 상위권을 차지하고는 있었지만 1인자 자리에는 번번이 오르지 못했다. 아사다 마오 시절에는 '피겨여왕' 김연아(28)와 워낙 격차가 컸던 탓에 줄곧 막혔고, 소치 올림픽 이후에는 러시아의 초강세 속에 격차를 좀처럼 좁히지 못했다.
 
그런데 키히라 리카의 등장으로 일본 열도는 다시 여자피겨에 대한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반영이라도 한 듯 키히라 리카는 이번 대회에서 쇼트프로그램, 프리스케이팅 150.61점을 받았다. 특히 실전에서 성공했던 점프들에는 모두 1점 이상의 두둑한 가산점을 챙긴 것은 물론이고, 프리스케이팅 구성점수에서 무려 9점대를 받는 등 시니어 1년차임에도 최정상급의 점수를 받았다. 그는 이번 우승으로 평창 때까지 1인자로 활약했던 미야하라 사토코를 밀어내고 일본 여자피겨의 간판으로 떠오르게 됐다.
 
올림픽 챔피언 자기토바, 복병 키히라와 부딪히다

한편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챔피언에 오른 알리나 자기토바(러시아)는 올 시즌 전만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두 차례 그랑프리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번 파이널에서 부상에 발목을 잡힌 것이 화근이었다.
  
알리나 자기토바 '금빛 연기' 23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러시아출신 올림픽선수의 알리나 자기토바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지난 2월 23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러시아출신 올림픽선수의 알리나 자기토바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 연합뉴스


특히 올 시즌에 접어들면서 기존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 점프로 내세웠던 트리플 러츠-트리플 루프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연결점프의 회전수 부족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자선수들은 1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체형 변화 등으로 인해 전보다 몸이 무거워지고 이 때문에 회전력이 예전 만큼 나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자기토바 역시 평창 이후 키가 부쩍 크면서 체형이 변하기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과도기가 온 셈이다. 결국 애석하게도 목표했던 지난해 이은 파이널 2연패가 무산되고 말았다.
 
현재 자기토바는 올림픽 금메달, 그랑프리 파이널 금메달, 유럽선수권 금메달 등 피겨 대회에 대부분의 금메달을 갖고 있다. 이제 그에게 은퇴 전에 남은 것은 세계선수권 금메달 단 하나다. 그래서 자기토바는 올 시즌 2019년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키히라 리카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만만치 않게 됐다. 두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맞대결을 펼쳤는데 첫 대결에서 키히라 리카가 승기를 잡으면서 기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2019년 세계선수권이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릴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기토바 입장에서는 더욱 조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승기를 잡지 못한 자기토바는 세계선수권에서 키히라를 꺾고 키히라와 자기토바 모두 이번 대회에서 점프에서 한 차례씩 실수가 있었다. 키히라는 트리플 악셀, 자기토바는 트리플-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다. 즉 두 선수 모두 점수에 있어서는 아직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자기토바는 트리플 악셀 점프가 없는 만큼 트리플-트리플 점프에서 실수할 경우, 키히라보다 기술점수가 뒤쳐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반면 키히라는 트리플 악셀 점프를 모두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두 선수의 맞대결은 향후 남아있는 피겨 시즌에 최대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쉐바 연기 모습

엘리자베타 툭타미쉐바 연기 모습 ⓒ 국제빙상연맹

  
또 부활한 툭타미셰바, 점점 멀어지는 메드베데바

한편 러시아 피겨에서 반가운 소식이 있다. 과거 기대주이자 2015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부활한 것이다. 그는 올 시즌 다시 한 번 트리플 악셀 점프를 들고 나와 높은 성공률을 자랑하고 있다. 당초 그는 2014년 자국에서 열렸던 소치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최대 기대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하지만 체형 변화 등의 과정에서 기량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결국 올림픽에 한 번도 나서지 못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소치와 평창 올림픽 직후 시즌에 모두 부활에 성공했다. 정확한 토픽과 에지 사용이 점프에서 장점으로 꼽히는 그는 올 시즌에는 트리플 악셀 점프까지 성공률이 높아지면서 그야말로 또 한 번 기사회생에 성공하면서 결국 파이널 동메달까지 거머쥐었다.
 
반면 평창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좌절되고 난 후 둥지를 캐나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로 옮겼던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러시아)는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이다. 그는 올 시즌 점프에서 급격하게 난조를 겪었고, 결국 프랑스에서 열렸던 그랑프리 6차 대회에서는 포디움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파이널 진출도 생애 처음으로 무산됐다.
  
한 마리 새처럼 23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러시아 출신 올림픽선수(OAR)'의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지난 2월 23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러시아 출신 올림픽선수(OAR)'의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 연합뉴스


애초 점프 매커니즘 자체가 좋지 못했던 메드베데바는 올 시즌 기량 저하가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프리스케이팅에서 탱고 음악을 사용하면서 체력적인 부담까지 여지없이 나타나고 있다. 불과 직전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대회를 다 휩쓸면서 올림픽 금메달까지 바라본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결과다.
 
여기에 내년에는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주니어에서 이미 시니어 선수들을 능가하고 있는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알레나 코스토르나야, 안나 쉐르바코바 등이 모두 내년에 시니어로 올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이번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금, 은 메달을 휩쓸며 빈틈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들이 모두 시니어로 올라온다면 이미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메드베데바에게는 기회가 더욱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는 자기토바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러시아 피겨는 매 시즌마다 다양한 선수들이 뜨고 지면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들의 대항마이자 새로운 얼굴인 키히라 리카가 나타나면서 여자 피겨판 '러일 전쟁' 양상은 앞으로 더욱 첨예하게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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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스포츠와 스포츠외교 분야를 취재하는 박영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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