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환 .

▲ 차준환.ⓒ 국제빙상연맹

 

지난 2010년 2월 26일, 캐나다 밴쿠버에서는 한국 출신의 '피겨여왕' 김연아(28)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올림픽 챔피언이 탄생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 이번에는 한국 남자피겨 선수가 사상 처음으로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며 또 하나의 역사가 쓰여졌다. 그 주인공은 차준환(17·휘문고)이다.
 
차준환은 8일 오후(한국시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2018 국제빙상연맹(ISU) 피겨 그랑프리 파이널 남자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에서 174.42점(기술점수 91.58점, 구성점수 83.84점, 감점 1점)을 얻었다. 그는 쇼트프로그램 점수 89.07점과 더해 총점 263.49점을 받으며 전체 6명 가운데 3위에 올라 동메달을 차지했다.

열악한 한국 피겨 현실에 그저 높아 보이기만 했던 남자피겨의 벽을 차준환이 서서히 허물으면서 태극기가 다시 한 번 피겨 링크장에 펄럭였다. 대회 직전 부츠교체 등의 변수를 딛고 정신력으로 버텨내며 끝내 메달까지 거머쥔 17살의 소년은 이제 돌풍의 주역으로 거듭났다.
 
약속의 땅 밴쿠버, 이번엔 남자피겨다

한국 피겨에 있어 밴쿠버는 그야말로 '약속의 땅'이다. 김연아가 자신의 오랜 목표였던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꿈을 달성했던 곳이 바로 밴쿠버였다. 당시 김연아는 밴쿠버 올림픽에서 2위였던 아사다 마오(일본)와 무려 23점 차이의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으며 시상대 맨 위에 당당히 섰다.

동계올림픽에서 애국가가 쇼트트랙이나 스피드스케이팅 이외에 다른 종목에서 울려 퍼지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김연아가 그것을 해냈고 한국 피겨는 그간의 설움을 딛고 수 많은 유망주들을 배출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8년이 지나 또 다시 밴쿠버에서 피겨 시상대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그것도 이번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느껴졌던 남자피겨에서 나왔다. 그 주인공은 차준환이다. 이미 올 시즌 차준환은 여러 차례 한국 남자피겨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사상 처음으로 시니어 그랑프리 메달을 두 개나 따낸 데 이어 파이널 진출까지 해냈다. 사실 그가 파이널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한국 남자피겨의 역사가 새로 쓰여진 것이었다. 그런데 메달까지 따냈으니 그야말로 '겹경사'가 아닐 수 없다.
 
남자피겨는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국내 남자피겨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현재 국내 피겨 대회중 가장 큰 대회인 회장배 랭킹대회와 종합선수권에서 남자 피겨 선수가 출전 인원은 대략 15명 내외다. 여자선수가 그에 3배가 넘는 50여명의 선수가 출전하는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여기에 2010년도까지 ISU 시니어 대회에 출전했던 남자피겨 선수도 채 1명이 될까 말까할 정도로 세계와 격차도 컸다. 평창을 앞두고 차준환의 선배인 이준형(22·단국대)과 김진서(22·한국체대) 등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전체적인 역사나 명맥을 봤을 때 그야말로 '열악하다'는 말 외엔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다.
 
그런 상황에서 차준환이 등장한 것은 분명 과거 김연아가 그랬던 것처럼 '기적'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벽은 생각보다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차준환의 놀라운 잠재력 속에 세계 남자피겨에도 태극기가 꾸준히 새겨지고 있으며 격세지감을 실감케 하고 있다.
 
 
 차준환의 연기 모습

차준환의 연기 모습ⓒ 국제빙상연맹

 

부츠 악재 딛고 일어난 차준환
차준환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부츠를 전격 교체했다. 사실 차준환은 파이널에 진출할 예상을 전혀하고 있지 못했다. 대개 파이널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그랑프리 시리즈 두 개 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것은 물론이고 최소 한 차례 2위 이상을 해야만 가능하다. 동메달 두 개를 수확한 차준환으로서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는 이달 21일에 열리는 국내 회장배 랭킹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사이 부츠를 바꿨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파이널 진출이 확정되면서 큰 대회를 앞두고 부츠를 바꾼 꼴이 되고 말았다. 보통 선수들이 큰 대회를 앞두고는 경기력에 민감한 부츠를 변경하지 않는다. 방상아 SBS 피겨 해설위원은 "차준환은 부츠를 변경하면서 발등에 멍이 생겨 압박이 심한 상태"라고 전하기도 했다.
 
이 같은 변수에도 불구하고 차준환은 프리스케이팅에서 쿼드러플 토루프 점프 한 차례만 넘어졌을 뿐 그 외 나머지 점프는 물론 쇼트프로그램도 클린 연기를 해냈다. 더욱 파이널 진출은 생애 처음이었음에도 전혀 긴장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 있는 연기력과 집중력을 보여준 것이 놀라웠다. 보통 첫 점프에서 넘어질 경우, 몸에 상당한 충격이 가서 다음 점프와 이후 연기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차준환에게는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정신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돌풍의 주역 차준환
차준환은 그야말로 이제 세계 남자피겨계의 '돌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올림픽 직후 시즌에는 새로운 세대교체가 진행되는데 그 중심에 바로 차준환이 있다. 지난시즌 고관절과 허리 등에 심한 부상으로 인해, 시니어 그랑프리 데뷔전에서 제 기량을 보여주짐 못하고 큰 아쉬움을 남겼지만 두 번의 아픔은 없었다. 특히 불과 시니어 2년차 선수가 자신보다 경력이 최소 3~4년가량 많은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상대에 오른 것은 분명 박수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차준환은 두 번의 그랑프리 동메달, 그리고 파이널 동메달을 차지하면서 세계 10위권에 충분히 들 수 있는 톱레벨 선수로 성큼 다가섰다. 그를 반증하는 것이 구성점수다. 이번 파이널에서 차준환은 쇼트프로그램에서 구성점수를 41점, 프리스케이팅에서 83점대를 받았다. 특히 쇼트프로그램에서 그동안 여러 차례 클린연기를 펼치고도 좀처럼 40점대 벽을 넘지 못했는데, 이번에 40점대를 넘어서면서 심판들로부터 확실히 레벨을 인정받았다. 또한 프리스케이팅 역시 한 차례 넘어지고도 직전 대회보다 구성점수가 2점가량 상승하면서 모두 8점대의 점수를 받았다.
 
차준환의 레벨 상승은 이번 파이널에서 관중들이 그에게 보내준 뜨거운 환호와 박수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이미 프리스케이팅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름을 본 따 준리엣(Junliet)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는 연기 직후 수많은 인형 세례를 받았다. 남자 선수에게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신데렐라 연기를 자신만의 매력과 고급스러운 연기로 해냈고, 식상할 수 있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독창성을 발휘하며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겸비해 새롭게 재해석해 냈다.
 
이제 차준환에게 올 시즌 남은 국제대회는 4대륙선수권과 세계선수권이다. 이 대회는 국내에서 열리는 회장배 랭킹대회와 종합선수권 성적에 따라 출전선수가 배정되기 때문에 확정은 아니다. 하지만 올 시즌 차준환의 성적을 보면 충분히 출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 차준환이 써내려가는 기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서막을 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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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스포츠와 스포츠외교 분야를 취재하는 박영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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