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말
 
 <쿵후 선생> 영화 포스터

<쿵후 선생> 영화 포스터ⓒ (주) 케이알씨지

 
이안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영화를 참 쉽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쉽다'라는 표현은 절대 '대충'의 의미가 아니라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을 쉽게 다가가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한 감독이라는 의미다. 쉽게 다가온 것은 빠르게 멀어지지만 이안 감독이 연출한 영화들은 재미의 크기만큼 여운의 파장도 크다. 마치 내지르는 고음 없이도 멀리 퍼지는 음색의 베테랑 가수처럼.

1995년 <센스 앤 센서빌리티>가 개봉했을 때, 대만 출신의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것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기는 했어도 대만에서 나고 자란 이안 감독이 19세기 영국 문화와 감성을 과연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우려했으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성공적인 할리우드 데뷔 이후, 차기작 <아이스 스톰>에서 7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 이면을 완벽하게 그려내며 그의 출신은 핸디캡이 아니라 자신의 연출력을 부각시키는 장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후 쉬지 않고 소재와 장르를 불문하고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내며 이안 감독은 대만을 넘고 할리우드를 넘어 전 세계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거장으로 자리매김 한다. 
 
 <쿵후 선생> 영화의 한 장면

<쿵후 선생> 영화의 한 장면ⓒ (주) 케이알씨지

 
'대만 아버지 삼부작'으로 불리는 그의 첫 세 작품은 세대와 문화 간의 차이와 갈등을 소재로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91년 첫 작품 <쿵후 선생>에서 1994년 <음식남녀>로 갈수록 이야기와 캐릭터가 풍부해지고 그 속에서 주제의식을 노골적이지 않게 잘 녹여냈다.

<쿵후 선생>은 중국에 살던 주선생(랑 웅)이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고 미국에서 자리 잡은 아들 부부과 함께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갈등을 다룬 영화다. 영어를 모르는 시아버지와 "셰셰(고맙습니다)"를 제외하고는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며느리의 공통분모는 그들의 아들이자 남편인 알렉스가 유일하다. 하지만 알렉스는 서로 다른 생활방식과 가치관이 빚어내는 갈등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등의 골을 키워나간다. 
 
 <쿵후 선생> 영화의 한 장면

<쿵후 선생> 영화의 한 장면ⓒ (주) 케이알씨지

 
어느 시대에나 세대 간의 갈등은 존재하기 마련이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동양사회에서 '핵가족'이 본격화되고 젊은 세대들이 서양 문화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세대 간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쿵후 선생>이다. 

영화는 잘 짜여진 기-승-전-결의 플롯과 인물들의 가치관과 철학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대사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와 캐릭터의 농도는 조금 싱겁게 느껴진다. 영화가 담고 있는 갈등들이 에피소드들의 나열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 피로연> 영화 포스터

<결혼 피로연> 영화 포스터ⓒ (주) 케이알씨지

 
1993년 개봉한 <결혼피로연>은 <쿵후 선생>이 가진 부족한 점들을 완벽하게 보완한다. 영화의 배경은 <쿵후 선생>과 마찬가지로 미국 뉴욕이고, 미국에서 부동산 딜러로 자리 잡은 대만 출신의 웨이가 주인공인데, 게이인 그는 남자친구 사이먼과 함께 행복한 동거를 하고 있지만 결혼을 하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계약 결혼을 계획한다. 아들의 결혼 소식에 웨이의 부모님이 뉴욕으로 찾아오고, 부모님을 속이기 위해 벌이는 웨이의 아슬아슬한 연극은 웃음과 감동을 자아낸다. 

<결혼피로연>이 보여주는 세대 차이는 <쿵후 선생>보다 구체적이고 복합적이다. 자칫 심각하고 불편해질 수 있는 소재를 영화는 코미디로 잘 포장한다. 동성애 코드를 추가함으로서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에피소드들의 디테일을 개성 있고 풍성해진 캐릭터들이 잘 소화한다. 
 
 <결혼피로연> 영화의 한 장면

<결혼피로연> 영화의 한 장면ⓒ (주) 케이알씨지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와 고생 없이 자라 원하는 만큼 공부하고 미국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자식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들은 엄연하게 서로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고 가족 간에도 선입견과 편견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결혼피로연>은 서로가 가지는 편견을 공격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선입견이기에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가족이 가지는 한계와 가능성 모두를 보여주는 것이다.
 
 <음식 남녀> 영화 포스터

<음식 남녀> 영화 포스터ⓒ (주) 케이알씨지

 
<쿵후 선생>과 <결혼피로연>이 문화 차이로 세대 간의 갈등을 교묘하게 덮고 있는 반면, 대만으로 장소를 옮긴 <음식남녀>는 90년대 대만 사회가 가지는 가족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보다 정통적이고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은퇴한 수석 요리사 주사부는 장성한 세 명의 딸들과 함께 살고 있으나 함께 식사를 하기 힘들만큼 각자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 만찬에서야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데 아내와 사별하고 모든 집안일을 책임지는 주사부는 딸들과의 만찬 때마다 예전의 솜씨를 발휘하지만 그의 미각은 예전 같지가 않고 딸들은 늙고 약해진 아버지를 부양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 
 
 <음식 남녀> 영화의 한 장면

<음식 남녀> 영화의 한 장면ⓒ (주) 케이알씨지

 
이안 감독은 <음식 남녀>의 주제를 '가족의무 대 자유의지의 충돌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영화에서 보이는 충돌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가 아니라 각각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그것은 극 중 인물들, 특히 아버지 주사부와 둘째 딸 가천의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에게는 냉정하고, 이기적으로 보였던 커리어 우먼 가천이 실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가장 강한 인물이었다는 점과 하나둘씩 떠나가는 자식들의 빈자리를 받아들이고 노년의 삶을 독립적으로 일궈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야기의 정형성에 변주를 더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기존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음식 남녀> 영화의 한 장면

<음식 남녀> 영화의 한 장면ⓒ (주) 케이알씨지

 
세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모두 해피 엔딩으로 나름의 해결책에 도달한다. 하지만 이 해결책이라는 것이 갈등을 해소하고 가족의 화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1990년대 초 대만사회를 반영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한발 짝 앞선 내일의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안 감독이 직접 대본을 쓴 위의 세 영화는 중국 출신의 대만 이민자 부모와 대만에서 자라 미국에서 공부한 감독 자신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할리우드로 활동 영역을 옮긴 후로 연출과 제작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가 각본가로서도 훌륭한 영화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쉼 없이 영화를 만들고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센스 앤 센서빌리티>이후로 주로 원작이 있는, 그러니까 이미 검증된 이야기들을 영화로 연출한다는 것과(비영어권의 그가 영어로 시나리오를 쓰는 것부터 어쩌면 굉장히 비효율적인 영화 제작 방법일 수도 있다) 제임스 샤머스라는 <쿵후 선생>때부터 함께 작업해온 훌륭한 각본가이자 제작자, 감독이기도 한 평생의 파트너가 있다는 것이 그의 성공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가 관객들에게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선사하는 뛰어난 연출가이자 가장 안정적인 영화의 호흡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연출가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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