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에게 예치금 인출을 맡기는 1909년 10월 20일자 고종황제의 위임장. <파란 눈의 한국 혼, 헐버트>에 실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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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비자금을 찾아 미국 은행에 넣어두라고 헐버트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헐버트는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런데 거기서 청천벽력 같은 상황을 목격했다. 덕화은행에 가보니 통장 잔고가 0이었다. 고종이 모르는 새, 모조리 인출돼 버렸던 것이다. 인출된 시점은 전년도인 1908년이었다.
그 예금은 고종황제의 명령에 의해서만 인출될 수 있었다. 고종의 명령을 조작해 돈을 인출해간 사람이 있었다. 궁내부대신 이윤용이 그 주인공이다. 이윤용의 동생이 바로 이완용이다. 이윤용 역시 훗날 일본으로부터 훈장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에게 돈을 빼오라고 지시한 사람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다.
국제금융인인 김동진은 위 책에서 그 비자금이 대한제국 1년 총세입의 1.5%에 상당할 거라고 추정했다. 최근 4년간 대한민국 중앙정부의 1년 세입 총액이 400조원 내외였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재정 규모는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1년 세입의 1.5%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런 거액이 이완용의 형에 의해 불법 인출돼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간 것이다.
<미스터 션샤인>의 구동매는 예치금 상당액을 소녀한테 요구하고, 고애신은 자기가 갚아주겠노라고 나섰다. 그 금액이 대한제국 1년 예산의 1.5%나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드라마 속 인물들이 그런 상황을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은 사라졌지만, 헐버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예치금을 되찾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고종의 명령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다. 1919년에 고종이 죽은 뒤에도 예치금을 찾기 위한 헐버트의 노력은 달라지지 않았다.
1922년에는 이승만과 프린스턴대학 동창인 킴버랜드라는 인물을 통해 거물급 변호사인 윌콕스와 접촉했다. 윌콕스는 대통령선거 때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헐버트는 킴버랜드에게 예치증서를 위탁하고 법적 해결을 부탁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헐버트는 예치금 때문에 분투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난관에 직면했다. 예치증서를 보관한 킴버랜드가 태도를 바꾼 것이다.
오랫동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헐버트는 예치증서 반환을 요구했다. 뜻밖에도 킴버랜드는 거절했다. 이 때문에 헐버트는 워싱턴 시내 한복판에서 킴버랜드와 난투극까지 벌였다. 1942년의 일이다. 헐버트의 나이 79세 때였다. 80이 다 된 나이에 고종의 명령을 지킨다며 난투극까지 벌인 것이다.
그런 소동까지 벌였건만, 킴버랜드는 절대로 내놓지 않았다. 잘 보관하고 있다며 "최근에 이승만 부부랑 저녁식사를 했다"는 말로 헐버트를 누르려 했다. 공금 문제로 말썽이 많았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뒤에도 여전히 대통령 행세를 하는 이승만을 거론하면서 증서 반환을 거부한 것이다.
그런 상태로 헐버트는 1945년 해방을 맞이했고, 이번에는 이승만한테 문제 해결을 부탁했다. 헐버트한테는 킴버랜드에게 넘긴 서류 말고도 관련 문건이 더 있었다. 덕화은행이 고종으로부터 예금을 받았음을 확인하는 영수증, 일본측이 독일 정부에 예금 인출을 요청하는 서한, 자신이 킴버랜드로부터 받은 서한 등이 있었다. 헐버트는 이 문서들을 변호사를 통해 이승만 측에 넘겼다.
이 서류들을 모두 넘긴 뒤 헐버트는 1949년 8월 5일 눈을 감았다. 만약 몇 년 더 살았다면, 그는 훨씬 더 분통 터지는 상황에 직면했을지도 모른다. 킴버랜드보다는 이승만이 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나머지 서류를 그쪽에 넘겼을 것이다. 좀 더 살았다면 이승만에 대해서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